[단독] '가등기' 덫에 정부기관도 강제경매 유찰... "셀프 낙찰도 막혀"

김동욱 2024. 3. 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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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등기 걸린 주택 경매 현황 살펴보니
한 달간 29건 중 25건이 전세사기 주택
임차인 지위 넘겨받은 HUG도 유찰 피해
"전세사기 때 가등기 남발 방증"
1월 21일 서울 시내 빌라 밀집 지역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13일 서울남부지방법원에 양천구 신정동 도양라비앙빌 2층 202호가 경매에 올라왔다. 최초 감정가는 2억900만 원이었지만 앞서 7번 유찰돼 경매 입찰 최저가격이 4,300만 원까지 떨어졌다. 그럼에도 이날 또 유찰됐다. 경매 채권자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임차인에게 전세보증금을 물어주고 대신 채권 회수에 나선 것이다.

이달 19일 경매가 열리지만 낙찰 가능성은 제로(0)에 가깝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바로 소멸되지 않는 선순위 소유권이전청구권 가등기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인천 남동구 만수동 980-16 우림빌라 9동 1층 102호도 임차인 지위를 넘겨받은 HUG가 강제경매를 신청했지만, 같은 이유로 거듭 유찰돼 입찰 최저가격이 감정가의 20% 수준까지 떨어졌다.

전세사기 피해자(임차인)를 대신해 강제경매에 나선 HUG도 전세사기 조직이 걸어둔 '가등기' 덫에 걸려 보증금 회수에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피해자들은 가등기 탓에 '셀프 낙찰'도 받을 수 없다며 정부를 향해 대책 마련을 호소하고 있다.


선순위 가등기 경매 86%는 전세사기

그래픽=신동준 기자

한국일보가 지지옥션을 통해 '선순위 가등기'가 걸린 주택의 경매 현황을 조사했더니, 이달 11일부터 한 달간 진행되는 경매는 총 29건이었다. 이 중 25건이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세입자가 강제경매를 신청한 경우였다. 그만큼 '가등기'가 전세사기에 악용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25건 중 6건은 HUG가 임차인 지위를 승계한 경우다. HUG가 전세금반환보증에 가입한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대신 물어주고 강제경매로 보증금 회수에 나선 것이다. HUG가 후순위로 전세금을 못 내준 집주인 상대로 가압류를 건 사례도 4건이나 있었다.

하지만 25건 모두 짧게는 6개월부터 길게는 2년 넘게 경매가 진행됐지만 가등기 탓에 연달아 유찰된 것으로 파악됐다. 한 경매보고서엔 거듭된 유찰 배경으로 '임차인의 보증금을 인수하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선순위 가등기 인수 문제 때문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 개인 세입자는 물론 정부 기관인 HUG도 가등기 덫에 걸려 보증금 회수에 문제를 겪고 있는 셈이다.

최근 문제가 되는 '소유권이전청구권 가등기'는 미래에 이 집을 소유할 예정이라며 일종의 매매 예약을 걸어두는 등기다. 경매시장에선 순위 보전 효력 때문에 가등기가 걸린 주택은 이해관계자가 아닌 이상 눈길도 주지 않는다. 가등기 신청자가 본등기를 하는 순간 소유권 시점이 본등기 날짜가 아니라 가등기 신청날로 소급돼, 경매를 낙찰받아도 언제든 소유권이 넘어갈 위험이 있어서다.

전세사기 조직은 전세금으로 집값을 치르는 무자본 갭투자 과정에서 바지 집주인을 들인다. 이때 바지 집주인이 함부로 집을 팔지 못하게 하려고 소유권이전청구권 가등기를 설정하는 사례가 최근 본보 보도로 드러났다. 가등기는 세입자 입주 뒤에 이뤄지다 보니 세입자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더구나 세입자의 확정일자가 가등기 시점을 앞섰더라도 가등기를 소멸시킬 수 없다. 확정일자는 등기부상 권리가 아닌 탓에 선순위 임차인은 오직 경매의 우선 배당권만 있다.

HUG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분명 가등기 탓에 유찰된 사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진행 중인 모든 경매를 전수조사하고 전세사기가 의심되면 적극 수사 의뢰해 보증금 회수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피해자 "선순위 가등기 말소시켜 달라"

그래픽=신동준 기자

문제는 전세금반환보증에 가입하지 않은 개인 피해자다. 이들은 경매에서 낙찰되지 않으면 피해 구제 길이 막힌다. 본보 보도 이후 같은 유형의 피해를 봤다는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

2022년 3월 경기 광주시 장지동의 한 빌라에 전세로 들어간 김모씨는 경찰을 통해 살고 있는 집이 전세사기에 연루됐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가등기가 걸려 강제경매가 막힌 상황이다. 김씨는 "경매로 낙찰받으려고 하는데 바지 집주인은 가등기권자가 연락이 안 된다는 말만 하고, 수사기관도 그 부분은 알 수 없다고 해 답답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박모씨는 "정부 운영 센터에서도 이런 사례가 거의 없다며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김용우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임차권의 허점이 드러난 만큼 정부 차원의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주현 지지옥션 연구위원은 "전세사기 조직원이 차명으로 가등기를 걸어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법상 무효인 명의신탁에 해당할 수 있다"며 "정부가 피해자 중심으로 법리를 해석해 가등기 말소를 위한 길을 터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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