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범 열에 아홉 ‘가족사진’ 찍은 적 없어… 카메라 앞에선 마법이 일어나죠

김윤덕 기자 2024. 3. 1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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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양종훈
작년부터 제주 서울 안양소년원에서 아이들의 가족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양종훈 상명대 교수. 국내 손꼽히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그는 고향인 제주를 베이스캠프로 장수사진, 참전용사 사진, 제주해녀 사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공항에서 제주소년원으로 차를 몰던 양종훈 상명대 교수가 “용두암 바다는 집 나간 둘째 아들도 받아주는 어머니의 품 같다”며 웃었다. 그는 부모의 사업이 실패해 육지로 떠났던 열여섯 살 때까지 제주 칠성통에서 살았다.

한길정보통신학교란 간판을 단 소년원은 가수 이효리가 소길댁으로 불리며 살던 애월읍 소길리에 있었다. 국내 손꼽히는 다큐멘터리 작가 양종훈은 한 달에 한 번 서울에서 날아와 이곳 아이들의 가족사진을 찍는다. 소년범 열 명 중 아홉이 가족사진을 찍어본 적 없다는 뉴스를 보고 제주·서울·안양소년원 세 곳에서 자비를 들여 시작한 일이다.

“말 안 듣죠, 처음엔. 머리를 이마 뒤로 넘기면 사진이 더 잘 나온다고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부모님들도 어색해서 카메라를 잘 못 쳐다봐요. 근데 촬영이 끝날 즈음엔 달라져요. 마법이 일어납니다, 하하!”

◇미웠던 엄마를 업고 웃다

-가족사진 촬영을 작년 2월에 처음 시작했더라.

“일단 서울, 안양, 제주에서 시작했다. 전국에 소년원이 10곳 있는데, 모든 곳에서 가족사진 프로젝트가 진행됐으면 좋겠다.”

-왜 가족사진이었나.

“소년원 아이 상당수가 결손가정 혹은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와 사이가 좋을 수 없고 가족 관계가 이미 훼손된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의 90%가 가족사진을 찍어보지 않았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끼어들기로 했다.”

-촬영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처음엔 어색해한다. 부모와 멀찌감치 떨어져 눈도 안 마주친다.”

-냉랭한 분위기를 어떻게 녹이나?

“내가 그 무뚝뚝한 제주 해녀 삼춘들을 20년 넘게 촬영한 사람이라 상대를 무장해제하는 데는 재주가 있다(웃음). 일단 긴장이 풀릴 때까지 기다린다. 빵을 구우며 부모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한다. 남자애들에겐 엄마를 업어보라고도 한다. 등에 업힌 엄마는 쑥스러워하고 무표정했던 아들 얼굴엔 만감이 교차한다. 한 아빠는 아들과 티격태격하며 쿠키를 만들더니 완성된 과자에 아이가 환호하자 눈물을 흘리더라. 왜 이런 시간을 많이 갖지 못했는지 가슴 아파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가족이 있는지.

“두 딸이 다 학교 폭력으로 소년원에 들어와 있었다. 딸들을 만난 엄마가 30분을 울기만 해서 사진 촬영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남부러울 것 없이 부유한 가정인데 아버지의 폭력이 자녀들에게 대물림된 경우였다. 엄마는 무슨 죄가 있나 싶어 두 딸에게 엄마를 꼭 안아주게 했다. 결국 웃으면서 촬영했다.”

사진작가 양종훈의 '히말라야 가는 길'. 엄홍길 대장과 함께 2007년 히말라야를 등반하며 촬영했다.

◇모든 걸 용서하는 바다처럼

-소년원 모든 아이들이 촬영하는 건 아니더라.

“부모님이 거부하는 경우도 있어서 일단 희망하는 가족에 한해 찍는다. 근데 일단 촬영이 끝나면 표정들이 확 달라져 있다. 아이들은 사진보다도 엄마 아빠와 대화하며 눈길, 손길을 스친 것 자체로 행복해한다. 부모님들도 ‘먹고살기 바빠 가족사진 찍어본 적 없는데 좋은 기회 주셔서 고맙다’고 절을 한다. 나는 가족사진을 찍은 것 자체로 용서와 화해가 시작됐다고 믿는다.”

-모든 경비를 사비로 지출하나.

“물론이다. 얼마 들지도 않는다. 사진은 3종 세트로 뽑아서 선물한다. 집에 걸 큰 사진과 소년원 관물대에 넣을 사진, 그리고 지갑에 넣고 다닐 사진으로. 사진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오고, 다시는 나쁜 짓 말아야지 다짐할 수 있게 최고의 퀄리티로 찍는다(웃음).”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을까.

“그래서 법무부와 검찰청 지원을 받아 아이들을 계속해서 팔로(follow)한다. 이제 1년밖에 안 돼 유의미한 통계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재범률을 낮추는 데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최소 10년은 진행할 생각이다.”

-제주소년원은 ‘손 심엉 올레(손 잡고 올레)’라는 프로그램도 진행하더라.

“이원석 검찰총장이 제주지검장 하실 때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소년보호위원들과 아이들이 1대1로 손 잡고 올레길을 걸으며 대화하는 시간이다. 나도 참여해봤는데 아이들이 거침없이 속이야기를 털어놓더라(웃음).”

-소년원 안에도 올레길이 생긴다던데.

“소년원에 1만3000여 평 곶자왈숲이 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법무부와 협약해 숲의 원형을 해치지 않으면서 아이들이 마음 공부, 생태 탐구를 할 수 있도록 길을 내고 있다.” 제주소년원 정윤 교장은 “1.5㎞ 길이로 1시간 내 걸을 수 있는 길”이라며 “빠르면 6월 전에 개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진작가 양종훈이 촬영한 '블랙마더' 김혜심 교무. 스와질랜드에서 에이즈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원불교 김혜심 교무가 2017년 한 에이즈 환자를 방문해 위로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히말라야까지

-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가 됐나.

“대학 시절 로버트 카파의 전쟁 사진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루이스 하인의 영향도 컸다. 공장과 광산에서 일하는 아동노동의 가혹한 현실을 사진으로 폭로해 미국의 아동노동법을 통과시킨 사람이다. 사진 한 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20년 전 아프리카 에이즈 환자들을 찍은 사진은 유엔에서도 화제였다.

“스와질랜드(에스와티니)는 국민의 70% 이상이 에이즈 환자인데, 내가 속한 NGO로부터 현장 사진을 찍어달라는 의뢰가 왔다. 가족은 만류했지만, 내 모토가 ‘남들이 안 찍는 걸 찍는다’여서 바로 날아갔다(웃음).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치고 사진집을 만들어 보고서를 냈다. 유엔은 스와질랜드 지원을 중단할 계획이었는데 내 사진집에 담긴 그곳의 실상을 보고 다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위험하진 않았나.

“에이즈 환자들의 마음을 얻는 게 가장 힘들었다. 그들이 외지인을 시험하는 방법은 자기가 만든 음식을 먹느냐 안 먹느냐다. 쇠난로에 물과 밀가루만으로 구운 맛없는 빵을 건네주는데, 한 개를 얼른 받아 먹고 하나 더 달라고 했더니 마음을 열더라(웃음). 덕분에 에이즈로 죽은 13세 소년의 처참한 모습과 장례식까지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최근엔 ‘블랙마더’로 불리는 에이즈 환자들의 대모(代母) 김혜심 교무를 촬영한 사진집을 출간해 화제가 됐다.

“스와질랜드에서 처음 뵈었다. 에이즈 환자를 맨몸으로 안고 돌보는 교무님을 보고 에이즈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자신을 드러내길 원치 않는 분이라 첫 사진을 찍고 17년 만에야 사진집이 나왔다.”

-엄홍길 대장과는 히말라야에 두 번이나 다녀왔더라.

“산을 좋아한다. 물론 영하 20도 칼바람이 얼굴을 통해 심장까지 전해오면 정말 고통스럽다. 두 발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협곡을 오를 땐 정말 아찔하다. 하지만 히말라야 정상에 서면 모든 번뇌와 욕심이 부질없고 가엽게 여겨진다. 꼭 부처가 된 느낌이다(웃음).”

-2007년에 찍은 ‘히말라야 가는 길’ 연작이 인상 깊었다.

“저 멀리 햇살이 내리쬐는 눈밭이 보이는데 그곳에 닿으려면 어둡고 응달진 눈길을 4시간 이상 걸어야 했다. 너무 춥고 힘들어 그냥 죽어버리면 좋겠다 싶을 때 셔터를 눌렀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니 방금 전의 고통과 두려움은 깨끗이 잊히더라. 딱 인생 같았다.”

사진작가 양종훈이 촬영한 제주시 한경면 용당리 해녀.

◇등에 관을 지고 사는 여인들

-제주 해녀 연작은 2000년에 시작했다.

“사라져가는 제주 해녀 공동체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시작한 작업이다. 세계 문화 유산인데도 정작 제주에선 해녀의 가치를 잘 모른다는 게 놀라웠다. 나폴레옹 주방장이 나폴레옹이 영웅인지 모른다더니, 제주에선 동네 심방도 알아주지 않는 게 해녀였다.”

-심방이 뭔가?

“제주 말로 무당이다. 해녀와 심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늘 등에 관을 지고 물속에 들어가는 여인들 아닌가.”

-해녀들은 사진을 찍으면 혼이 나간다고 여겨 촬영을 거부한다던데.

“그래서 내가 ‘명예 해녀’가 됐다(웃음). 제주 방언을 할 수 있는 데다 어촌계 들를 때 빵이라도 사들고 가고, 어디 아프다 하시면 병원으로 재깍 모셔다 드리니 이뻐하시더라. 이젠 날씨 좋을 때 어서 찍으라고 멋진 포즈도 취해주신다.”

-해녀의 안전을 위해 바닷속 폐그물도 제거하고 건강검진도 받을 수 있게 돕는다더라.

“해녀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문화 유산이다. 우리가 그에 상응한 대우를 안 해주는 것 같아 내가 직접 뛰고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진 교실도 진행하더라.

“사진 전공생과 일대일로 매칭해 사진을 가르친다. 그런데 거꾸로 우리가 배우는 게 더 많다. 우리는 사각 프레임 안에 모든 걸 집어넣으려고 하는데 그들은 ‘운동장’을 넓게 사용한다. 앵글 안에 새의 주둥이만 들어와 있기도 하고, 세종대왕 동상의 왼팔을 과감히 날리기도 한다(웃음). 보이지 않는 걸 상상하게 해주는 ‘뉴 비전’이다.”

-양종훈이 ‘영정 사진’의 원조라던데 사실인가?

“고향 어르신들 위해 1993년에 시작한 일이다. 나는 영정 사진 대신 ‘장수 사진’이라고 불렀다. 사진 찍고 더 오래 사시라고. 제주에서 3년 정도 했더니 전국으로 막 퍼져나가더라(웃음).”

-작년부터는 참전 용사들의 사진을 찍고 있다.

“제주 해병대 3·4기는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분들이다. 200여 분 살아 계신데, 태극기를 배경으로 군복을 멋지게 입혀드리고 사진을 찍어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른다. ‘내가 6·25에 참전하길 잘했다’ 하실 땐 눈물이 확 나더라. 그동안 얼마나 대접을 못 받으셨으면 사진 한 장에 이토록 기뻐하실까 싶어.”

-양종훈의 저돌적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올까.

“사람들과 부딪히며 울고웃는 현장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의 매력이다.”

-어쨌거나 돈 되는 사진은 하나도 없다.

“다큐멘터리 작가는 의사로 치면 외과 의사다. 돈은 못 벌지만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 내 가슴을 쿵쿵 뛰게 하는 사진을 찍고 싶다.”

한길정보통신학교라는 간판을 단 제주소년원에서 한달에 한번 아이들의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양종훈 상명대 교수. 그는 "가족사진을 찍고 나면 부모와 아이들의 표정이 확 달라진다"고 말했다. /고운호 기자

☞양종훈

1961년 제주 출생.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대에서 석사를, 호주왕립대학교에서 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와질랜드 에이즈 사진전’을 비롯해 ‘제주 해녀 사진 특별전’ ‘강산별곡전’ ‘히말라야로 가는 길’ 전을 열었고, ‘블랙마더 김혜심’ 등 여러 권의 사진집을 펴냈다. 한국사진학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상명대 디지털 이미지학과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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