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박사’ 된 77세 고무회사 사장님... “정신의 때 벗기려면 스승 만나아죠” [인터뷰]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3. 1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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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 장소성 연구’로 문학박사 취득 황재철 대표
‘윤동주 시의 장소성 연구’로 77세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은 황재철 동원특수화학 대표. [사진제공=한양대]
황재철 동원특수화학 대표(77)는 ‘업력 50년’ 외길의 장인이다. 1977년 만 30세에 직원 3명으로 출발한 고무제품 회사는 곧 50주년을 맞는다.

2024년은 회사 뿐만 아니라 황 대표에게 유독 특별한 해다. 곧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 그는 지난 2월 한양대학교 교정에서 20대 학생들과 함께 박사학위 졸업 가운을 입었다. 그가 쓴 논문 제목은 ‘윤동주 시의 장소성에 관한 연구’로 명예박사 학위가 아니라 일반 진짜 학위다. 황 대표는 이로써 한양대 역사상 최고령 박사학위 수여자가 됐다. ‘문학 박사’ 황 대표를 지난 7일 한양대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일흔 넘은 나이에 책가방 매고 학교 간 이유요? ‘삼불후(三不朽)’란 한 마디 때문이었습니다.”

황 대표와 윤동주 시인의 인연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등포구 양평동에서 직원 3명으로 시작한 작은 고무회사는 IMF 때도 흔들리긴커녕 흑자를 낼 만큼 탄탄하게 키웠다. 아내와 함께 손에 기름때 묻혀가며 두 아들 가르쳤고, 한양대·고려대·서울대 재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며 기부로도 이름을 알렸다.

그러던 중 황 대표는 중국의 한 고전에서 ‘삼불후’란 단어를 접했다. 그건 마치 어떤 계시같았다.

“삼불후란 ‘썩지 않는 세 가지’란 뜻이에요. 여기서 세 가지는 공(功), 덕(德), 말(言)인데 해석하면 업적을 남기고, 인격을 남기고, 글을 남기라는 의미입니다. 제 삶을 돌아보니 후일에도 썩지 않을(不朽) 글을 아직 남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적게 잡아도 아들뻘, 옛날로 치면 손자뻘인 20대 대학원생들과 똑같은 강의를 들었다. 첫 수업에서 ‘라캉’을 듣고 내심 절망했다. 하지만 그의 사전에 ‘결강’은 없었다. 회사 꾸리면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업에 참여했고, 매주 숙제로 주어지는 발표도 아무리 회사일이 바빠도 단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학기 초반엔 코로나19 탓에 비대면 수강이 가능했다는 점이었다.

시흥시 시화공단에서 왕십리 한양대까지 가는 길, 다시 학생이 되어보는 마음이 가뿐했다. 그렇게 황 대표는 ‘불후의 논문’을 써내려갔다.

“사실 이육사·윤동주 시인의 비교문학 연구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두 거인의 시를 비교하면 우위를 논하게 되면서 큰 실수를 하고 말 것이란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으로 연구주제를 좁혔고 윤동주의 시적 요람인 ‘북간도, 평양, 서울, 교토, 후쿠오카’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윤동주 시는 사라질 뻔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자신만의 풍화작용을 견뎌낸 작품들입니다. 그분의 시가 생명력이 아직도 견고한 건 그런 이유일 거예요.“

황 대표가 가장 아끼는 윤동주의 시는 1936년작 ‘비둘기’다.

‘안아보고 싶게 귀여운/ 산비둘기 일곱 마리’로 시작하는 시는 고향을 두고 온 윤동주의 체험이 녹아들어 있다. 경북 울진이 고향인 황 대표는 이 시를 읽으며 ‘논일하시고 밭일하시던’ 유년 시절의 부모님을 떠올린다. 책을 읽으면 시공간을 건너게 된다.

그래서 회사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구입해 ‘독락당(獨樂堂)’이라 이름 붙엿다. 조선 성리학자 이언적의 경주 고택에서 빌린 이름이다. 퇴근 후 서초동 집까지 가기 힘들 날엔 독락당에 머물며 책에 파묻혀 지낸다. “책을 읽는다는 건 작가와 대화를 하는 것”이라고 오래 믿었기 때문이다.

“평생 공장을 운영하면서 깨달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몸뚱아리의 때는 묻어도 되고 낡은 옷도 상관 없지만, 정신의 때는 절대 남겨선 안 된다.’ 살아보면 압니다. 정말로 소중히 가꿔야 할 건 몸이 아니라 정신의 때예요. 정신의 때는 자기 스스로 못 씻으니 스승을 만나야 하고요. 맑은 마음을 허락하는 영원한 스승은 책이 아닐까 싶어요. 책과 길동무가 돼야죠.”

오늘날 한국인이 타는 자동차 중에 황 대표 회사의 제품이 내장되지 않은 차는 없다.

자동차 실내에서 스위치를 누르면 전류와 연결되는데, 이 전류를 흐르게 할 때는 누전이 되지 않는 터치 키패드가 사용된다. 황 대표의 회사는 바로 이 키패드의 제작사다. 현대·기아차 등에 납품되는 이 회사의 제품 점유율은 국내 80%에 육박한다. 한때는 경쟁사가 없어 완전 독점이었다.

특히 황 대표는 은행 대출을 1원도 받지 않는다는 ‘무차입 경영’을 정도(正道)로 믿으며 살아왔고, 그 때문에 IMF도 무사히 지났고 당시 미국 이튼(EATON)사에 고무제품을 수출하며 환차익으로 엄청난 수익을 냈다. 현재 동원특수화학 매출은 ‘줄어서’ 연 200억원 수준이다.

50년 업력을 이어오다 보유했던 회사 2개는 매각했다. “더 물욕 부리지 말자”는 생각에서였다. 대신 큰 액수는 아니어도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도서구입비를 주며 살며 마음의 부자가 됐다. 그의 집무실 책상 뒤에는 A4용지로 뽑은 고아원, 어린이재단 후원 목록이 붙어 있다. ‘탈세로 나라 속이면 안 되고, 체불으로 직원들 힘들게 하면 안 된다’를 경영 원칙으로 삼아 왔다.

“기부금은 적어서 밝힐 액수도 못 되고, 사실 총 얼마인지 새보지도 않았어요. 꾸준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속이며 살지 말고 해코지하며 살지 말아야 해요. 그게 윤동주 시인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 아닙니까. 논문 쓰면서 배운 점은 바로 그거예요.”

황 대표가 이날 메고 온 백팩엔 사학자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이 담겨 있었다.

인터뷰 직후 ‘1947년생 백발의 학생’은 번쩍거리는 검은 세단은커녕 한껏 젊은 걸음으로 교정을 뚜벅뚜벅 가로질렀다. “학교에 올 땐 학생이니, 지하철과 버스를 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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