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미 끝나면 피 철철?…고슴도치는 어떻게 사랑을 나누나 [생색(生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3. 1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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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색-23] 살을 에는 추위에도, 서로에게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서였습니다. 신의 저주인지, 축복인지. 그들의 몸은 온통 가시로 덮여 있습니다.

적에게 맞설 때는 든든한 방패지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일 때는 칼을 겨누는 꼴이 되고 말았지요. 고슴도치의 이야기입니다.

고슴도치. [사진출처=Martina Vasquez]
요즘 서점가에서 뜨거운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를 인간에 빗대기도 했습니다. “서로의 온기가 필요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로 인해 상처가 될까 거리를 두는 상황”을 ‘고슴도치의 딜레마’라고 이름지었던 것이지요. 인간 역시 서로를 요구하면서도, 또한 독립적이고 싶은 욕구를 동시에 지닌 모순적 존재라는 설명입니다.

위대한 철학자도 때론 틀리는 게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사랑하는 이에게 결코 거리를 두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설명하지 못한 고슴도치의 사랑법을 오늘 소개합니다.

1911년 묘사된 고슴도치.
고슴도치, 사랑할 때 가시는 어떻게 해?
고슴도치는 생물학계의 오랜 미스터리였습니다. 가시가 돋친 몸뚱어리가 사랑을 나누기엔 적합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교미하더라도 서로 피 칠갑이 될 게 자명해 보였습니다. 과거 생물학자들은 고슴도치가 가시가 없는 배를 맞대고 성교할 것이라고 상상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동물은 배를 맞대고 교미하지 못합니다. 신체 구조상 그럴 수 없기 때문이지요. 도대체 이들은 날카로운 가시를 두고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 것일까요. 속된 말로 ‘손만 잡고 잤더니, 새끼가 생겼다’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걸까요.

밤송이 모양으로 방어모드에 나선 고슴도치. [사진출처=Panelxf]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사랑할 때만큼은 고슴도치는 부드러운 ‘남자’입니다.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는 건 언제나 적대감을 드러내야 하는 순간이지요. 천적이 나타나거나, 몸을 숨겨야 하는 필요성이 있을 때만 가시를 곧추세우는 것이지요.

친구와 우정을 나눌 때, 가족과 함께일 때는 당연히 가시를 납작하게 만듭니다. 행여나 소중한 사람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고슴도치는 다른 동물들과도 꽤 잘 지내는 편이다. [사진출처=Janusz Jakubowski]
고슴도치, 로맨틱, 성공적
사랑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컷 고슴도치는 우선 암컷을 발견할 때, ‘플러팅’을 시작합니다.

휘파람을 불거나,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암컷의 주의를 끄는 것이지요. 암컷이 관심을 보이면, 그때부터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섭니다.

원을 그리면서 암컷에게 교미를 허락해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마치 클럽에서 마음에 드는 여성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남성처럼요.

“우리 거리두기 딱히 안하는 편이에요.” [사진출처=IV Korneev]
자 이제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습니다. 암컷은 수컷이 마음에 드는 눈치입니다. 어느샌가 올곧게 솟아있던 가시가 납작해집니다. 교미를 허락한다는 사인입니다. 수컷 고슴도치는 기회를 놓칠세라 암컷의 등에 올라타 교미를 시작합니다. 날카로운 가시도 사랑을 나눌 때 만큼은 부드러운 털과 같습니다.
“자기야 삐쳤어?” 사랑을 나눌 준비를 하는 고슴도치 커플. [사진출처=Visem]
쾌락은 이내 끝이 납니다. 3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그리고 암컷의 배는 시간이 갈수록 부풀어 오르지요. 임신한 것입니다. 40일 정도지나니 다섯마리의 새끼를 낳았습니다. 새끼들의 가시는 아직 부드럽기에 어미도 크게 다칠 일이 없습니다.

세상에 나온 지 몇 시간 지나면 가시들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한 마리의 ‘고슴도치’로서 제 몫을 한다는 신호입니다.

고슴도치 가시도 원래는 털이었다네
고슴도치의 가시는 원래 털이었습니다. 가시가 있기 전까지 그들은 방어 수단이 별로 없었지요. 빠르지도 않은 데다가, 생김새도 귀엽기 짝이 없습니다. 포식자들로서는 ‘심심풀이 땅콩’처럼 먹이 삼기에 딱 좋았지요.
기원전 1900년께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된 고슴도치 조각상. [사진출처=Gary Todd]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부드러운 털을 가진 개체들은 모두 죽고, 가시가 돋친 이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무려 1500만년 동안이나 그들의 몸을 지켰습니다. 현대 인류가 처음 등장한 시기인 30만년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고슴도치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가시가 돋친 생명체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겐 한없이 너그러워질 수 있음을. 짜증이 솟구치고, 화가 나는 일이 많을 때라도, 사랑하는 이에게만큼은 미소를 지어보시기를. 1500만년을 살아온 ‘선배’ 고슴도치가 ‘후배’인 우리에게 건네는 생존의 열쇠입니다.

서로를 보듬는 고슴도치 가족. [사진출처=Pittigrilli]
<세줄요약>

ㅇ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가 가시 때문에 서로 가까이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ㅇ하지만 고슴도치는 교미할 때 가시를 바짝 낮춰 상대방이 다치지 않도록 한다.

ㅇ1500만년동안 고슴도치는 적에게는 가시를, 연인에겐 사랑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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