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공군, ‘실미도 공작원’에 인권침해 사과 대신 재차 ‘범죄자 낙인’

고경태 기자 2024. 3. 1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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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집행 임성빈씨 유족이 제기한
상소권회복 청구 받아들여졌지만
공군 “명백한 유죄, 상고 기각해달라”
대법원에 의견서 제출 뒤늦게 밝혀져
실미도 사건으로 마지막에 살아남았으나 공작원 동료 3명과 함께 사형당한 고 임성빈씨. 1947년생인 임씨는 “6개월 훈련이 끝나면 소위로 임관시켜주고 임무를 마치고 오면 원하는 곳에 배속시켜주거나 미군부대에 취직시켜준다”는 꼬임에 속아 실미도에 왔다. 군 당국 자료의 특기 및 중요경력란에는 “당수(5급), 행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8남매의 장남이었는데, 아버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호주머니에 이 사진을 넣고 다녔다고 한다. 유족 임충빈 제공

사형이 집행된 실미도 부대 공작원에 대한 유족의 상소권회복 청구가 받아들여져 실제 실미도 부대원의 재판이 대법원에서 50여년 만에 진행 중인 가운데, 공군 검사가 실미도 부대원들에 대한 국가의 인권 침해를 인정하면서도 ‘탈출 과정에서의 정당방위였다’는 유족 주장에 대한 법리적 반박없이 상고를 기각해 달라는 의견서를 대법원에 낸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인권 침해에 대해) 국가가 유족에 사과하라’고 권고했음에도 권고는 이행하지 않은채 ‘범죄자 낙인’을 씌워 유족에게 재차 상처를 준다는 비판이 나온다. 52년 전 오늘은(1972년 3월10일) 실미도 공작원 4명의 사형이 집행된 날이다.

10일 한겨레가 확인한 지난해 12월22일 대법원에 제출된 ‘고 임성빈씨의 초병살해죄 사건 관련 군 검사 의견서’를 보면, 공군 검찰단 고등검찰부는 “(실미도 부대원들에게) 비인격적인 대우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판단된다. 이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이념대립의 시대였고, 시대 상황이 급변하던 시대였다”며 “이 사건으로 인해 돌아가신 많은 희생자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형사법상 피고인에게 죄책이 인정됨은 명확하다”고 주장했다.

실미도 공작원에 대한 부당하고 비인간적 대우에 대해 전반적으로 인정하며 이들이 서울로 이동하는 과정에서의 교전은 군인 또는 경찰 측이 먼저 사격하여 응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했고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신빙성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기간요원 18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총상을 입힌 공소사실이 가려질 수 없다는 취지다.

이에 앞서 지난해 9월5일 서울고등법원 제8형사부(재판장 김재호)는 고 임성빈씨의 1971년 공군고등군법회의 초병살해사건 판결에 관하여 동생 임충빈(65)씨의 상소권 회복 청구를 인용해 받아들인 바 있다. 재판부는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 공군 관계자들이 피고인을 회유하여 상고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점을 인정했다. 다만 사형이 집행된 또 다른 공작원 고 김창구씨에 대한 조카 백영철씨의 상소권 회복 청구는 법령에 규정된 상소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71년 실미도 사건 진압장면. 당시 실미도 공작원들은 부당하고 비인간적 대우에 불만을 품고 기간병들을 살해한 뒤 서울로 진입하려고 하다 24명 중 20명이 사망했고, 나머지 4명은 사형 집행돼 암매장됐다. 72보도사진연감

‘실미도 사건’이란 인천 중구 무의동의 실미도 부대(공군 제2325부대 제209 파견대)에서 3년4개월 동안 훈련을 받아오던 공작원 24명이 1971년 8월23일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해 서울로 진입하다 군·경과 교전 끝에 경찰 2명, 민간인 6명, 공작원 20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병력 31명의 청와대 습격미수 사건 이후 그해 4월1일 북한침투작전을 목표로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와 공군이 창설했다. 임성빈씨를 비롯한 생존 공작원 4명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72년 3월10일 사형이 집행됐다.

공군 검사의 의견서에 대해 고 임성빈씨의 유족 임충빈씨를 대리하는 변호인 중 한 명인 신윤경 변호사(동화 법무법인)는 9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법리적인 주장은 전혀 없고, 그냥 도주 과정에서 사람이 죽었으니까 유죄라는 식이다. 그런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단초를 제공한 것이 국가이고, 돌아가신 공작원들보다 국가의 책임이 더 큰 게 아니냐. 유족들에게도 엄청나게 상처를 주는 말”이라고 했다. 유족 임충빈씨는 “너무 너무 억울하다. 국가가 원망스러워 도저히 용서를 못할 것 같다”고 했다.

변호인들은 지난해 11월에 낸 상고 이유서에서 “정당방위의 경우 긴급피난과 달리 공격 방위도 허용되므로 피고인 등이 적극적 공격의 형태로 방위행위를 한 것은 정당방위의 성립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며 “당시 피고인 등이 처한 상태는 언제든 훈련 중 기간병들에게 작은 꼬투리를 잡혀 살해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구 형법 제21조 제3항의 ‘기타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었다 볼 수 있고, 기간병들의 학대행위로 인한 공포·경악·흥분 및 당황으로 인하여 초병살해 후 탈출이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사형집행당한 실미도 부대 공작원 고 임성빈씨의 유언서. “너무나도 억울하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웠다”고 했다. 임충빈 제공

또한 “대한민국은 피고인을 포함한 공작원 24인을 실미도에 가둔 다음 피해자인 공군 기간병들을 이용하여 실미도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상습적인 구타와 폭행 폭언, 훈련을 빙자한 가혹 행위, 음식물 등 생활필수품의 부실한 공급, 살인 및 시체훼손 강요 등 가혹 행위를 하는 중감금죄의 범죄행위를 했다”고 밝혔다.

국방부 과거사위의 실미도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를 보면, 실미도 부대의 지옥 같은 풍경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실미도에서 공작원들은 일체 외출이나 면회, 서신 연락 등이 금지됐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총을 든 기간병이 따라와 감시할 정도로 혹독하게 통제당했다. 제한된 시간에 장애물을 통과하지 못하면 참호 입구에 대고 기관총 발사, 구보 시 발뒤꿈치 조준 사격 등 가혹한 훈련으로 인하여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 중무장한 상태로 수영훈련을 하던 중 공작원 1명이 힘에 겨워 물에서 나오려 하자 교관(기간병)이 때려죽이겠다고 고함쳐 익사하기도 했다.

음식이 부실해 배가 고픈 공작원들은 기간병들의 빨래를 해주고 빵과 라면을 얻어먹었고 나중에는 기간병들이 키우던 개나 돼지의 밥을 훔쳐먹거나 살아있는 뱀을 날것으로 잡아먹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에 따르면, 고 임성빈씨는 사형당하기 전 1심 법정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찮은 일을 가지고 같이 생활하고 정든 동료들을 우리들 손으로 때려죽이도록 만들고 그것도 부족하여 죽은 동료들을 디젤 기름에 튀겨 바다에 띄우도록 만든 기간요원들의 잔악한 비인간성에 몸서리쳤고, 기약 없이 반복되는 고된 일과를 하다 보면 우리도 언젠가는 저런 말로를 겪어야 한다는 데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공작원 4명의 사형 집행은 가족에게 통지되지 않았으며, 사형이 집행된 이후 공작원 4명의 주검 역시 가족에게 인도되지 않은 채 암매장됐다. 진실화해위는 2022년 11월 실미도 부대 공작원의 모집과정에서 발생한 국가의 기망행위 및 사형을 선고받은 공작원 4명에 대한 ‘대법원 상고 포기 회유’가 이뤄진 사건에 대하여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인권침해”라는 결정을 내리고 국가에 사과 및 화해를 이루는 조치를 권고한 바 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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