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조의 여왕? 정치 동업자! [편집인의 원픽]

2024. 3. 10.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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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깔린 많은 종이들 가운데 하나를 탁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일. 흔히 언론의 역할로 불리는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의제 설정)이 그와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 중에 뉴스 소비자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뭘까. 고민과 취재를 거쳐 우리가 내놓는 기사(어젠다)는 독자에 말을 거는 일이다. 뉴스 수명이 갈수록 빨라지는 요즘,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세계일보만의 기사를 소개한다.
 
2011년 3월4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회혼식에서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부인 손명순 여사에게 입맞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여년전 김영삼(YS) 전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 인터뷰 요청을 한 적이 있다. 워낙 언론 노출을 피해오긴 했지만 청와대를 떠난 이후라서 좀 더 자유로운 면담이 가능하지않을까 싶어서였다. “일체 인터뷰는 안하십니다. 청와대 계실때나 나와서나 외부에 드러나시는 거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비서의 답변이었다. 그는 “(집에 있던)소나타 차도 없애고, 이대 약학과 동창들과 가끔 만나셨는데 최근에는 주말마다 손주들 만나고 좋아하시는 꽃 관리하시는 게 전부”라고 했다. 다른 영부인들에 비해 손 여사는 ‘조용한 내조’의 대명사격이었다. 손 여사의 본래 성격 때문일수도, ‘경상도 남편’인 김 전 대통령의 영향 탓일 수도 있다. 

손 여사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정치와 무관한 정치인 부인은 없다. 그래서 정치인 남편 성공의 절반 이상 지분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년 전 서거한 YS의 정치 역정에도 손 여사의 역할이 작지않았다. 지난 7일 별세한 손 여사에 윤석열 대통령은 “손 여사께서는 신문 독자투고란까지 챙겨 읽으시며 김영삼 대통령님께 민심을 전하셨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정치적 동반자의 역할을 해주셨다”고 애도했다. ‘정치9단 만든 ‘그림자 내조 9단’...YS 곁으로’(3월8일자·유태영·이현미·윤솔기자) 기사는 정치 거물 YS에 가려졌지만 60여년 정치 인생을 감내한 손 여사의 애환이 담겼다. YS는 지난 2011년 결혼 60주년을 맞는 회혼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의 아내 손명순은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남편인 저를 높여줬습니다. 아내는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이 김영삼의 오늘이 있음은 제 아내 손명순의 한결같은 사랑과 내조 덕택이었다는 것을 여기서 고백합니다.” 

1998년7월31일 청와대에서 열렸던 전직 대통령 초청 만찬장에서 자리를 함께한 전·현직 대통령 부인들. 왼쪽부터 손명순·이순자·이희호·김옥숙 여사. 중앙포토
◆‘영광, 수난 함께 한 그림자 내조’

1929년 1월(양력)생인 손 여사는 이화여대 약학과 3학년 재학 중 서울대 철학과 3학년이었던 YS를 만나 결혼했다. YS는 당시 장택상 국회부의장 비서관으로 정계에 막 입문한 때였다. 손 여사는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자택을 찾아온 이들을 위해 하루 100인분이 넘는 식사를 손수 마련해 대접했는데 정치인, 기자들 중에 ‘상도동 시래깃국’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8일 손 여사 빈소를 찾은 이낙연 새로운미래 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기자 시절 아침에 상도동에 가면 사랑방에서 많은 사람이 아침밥을 먹곤 했다. 그때 거의 매일 아침에 나왔던 것이 멸치를 듬뿍 넣은 시래깃국이었다. 여사님의 따듯함을 아직도 저는 잊지 못한다”고 했다.  

YS의 정치적 고비마다 손 여사의 ‘그림자 내조’는 돋보였다. YS가 1983년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항의로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했을 때 단식투쟁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외신 기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1990년 3당 합당 당시 ‘죽어도 안 따라간다’며 버틴 최형우 의원을 설득해 민주자유당에 합류하게 만든 것도 고인이었다고 한다. 1992년 대선후보 경선 때는 수박 한 덩어리를 들고 민정계 인사들 집을 찾아다니며 남편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런 면에서 ‘조용한 내조’ 평을 들은 손 여사는 YS의 든든한 정치 동업자였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2022년 5월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와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영부인 스타일도, 역할도 제각각

대통령 부인은 ‘선출되지않은 권력’으로 그 영향력이 작지 않다. 각자 스타일에 따라 관심 분야도 달랐고, 대외 이미지도 달랐다. 손 여사처럼 ‘조용한 내조형’이 있는가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처럼 ‘정치적 동지’로 평가받는 이도 있었다. 전현직 대통령 부인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고 육영수 여사다. 사회봉사활동, 소외된 국민들을 돌보는 데 관심을 쏟았던 이력과 총탄에 맞아 숨진 비운에 대한 안타까움이 긍정적 여론으로 나타난 것으로 풀이된다. 

함성득 경기대 정치대학원장은 ‘영부인론’이란 제목의 책에서 미국의 퍼스트레이디와 한국 대통령 부인들을 유형별로 분석했다. 책에 따르면 손 여사는 최규하 전 대통령 부인 홍기 여사와 함께 ‘전통적 내조형’ 이었고 육 여사와 이순자 여사, 미국의 낸시 레이건 여사는 ‘활동적 내조형’ 이다. 여성계 지도자로 활동한 이희호 여사는 ‘연결망으로서의 참여형’으로 평가됐다.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는 두 사람 이름을 나란히 새긴 문패로 유명했는데 여성 정책과 여성계 인사들에 대한 의견도 공유했다. 

김건희 여사(왼쪽)가 2022년 6월1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를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대통령 부인은 역할에 대한 법적 근거 없이 모호한 지위 때문에 구설에 오르기 쉽다. 이명박 전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는 한식 세계화 사업에 관심을 쏟았지만 해외 식당 개업이 무산되면서 예산만 축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는 옷값, 외유 관광 논란에 휩싸였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논란도 현재 진행형이다. 여사의 공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제2부속실을 두고 일정, 메시지 관리를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통령 부인은 선거 과정, 국정 운영 과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치 동업자’로 불리는 이유다. 과거에 비해 보다 적극적인 역할, 전문성을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영부인상은 여전히 ‘소외된 계층을 돌보는 따듯한 모성의 이미지’에 머물러있는 듯하다. 대통령 부인은 물론 유력 정치인 아내들이 사실상 ‘전략 참모’ 역할을 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내조의 여왕’으로 불리길 바라는 것도 이런 여론을 의식한 탓일 것이다. 

황정미 편집인

<관련기사>
 
정치 9단 만든 ‘내조 9단’… 손명순 여사, YS 곁으로 [고인을 기리며]
https://www.segye.com/newsView/20240307519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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