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격하게 공감했다, 뉴질랜드 대표 와인 ‘클라우디 베이’

한은형 소설가 2024. 3.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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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어제까지도 나는 알바트로스가 전설 속의 새인 줄 알았다. 유니콘이나 파랑새 같은 건 아니더라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새라고 여겨왔다. 멸종해서 이름만 남은 도도새처럼 말이다. 커다란 날개를 가진 비극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새가 알바트로스라며 보들레르가 동명의 제목의 시를 써서 그럴 것이다.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를 구름의 왕자라고 했다. 당연히 나는 현실 속에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구름의 왕자니까!

그런데 뉴질랜드 여행기를 보는데 떼로 널브러져 있는 새 사진이 있는 게 아닌가? 갈매기의 한 종류인가 싶었는데 알바트로스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표준 표기로는 ‘앨버트로스’) 얼마나 굼뜬지 아이들에게도 잡힐 정도로 ‘바보 새’라고 한다. 그래서 멸종 위기라는 이야기를 보는데 한숨이 나왔다. 가련한 구름의 왕자랄까. 뱃사람들이 알바트로스를 잡는 장난을 친다는 이야기를 보들레르의 시에서 보고 그들은 역시 노련(?)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와인 클라우디 베이. /클라우디베이 엑스

덩치도 크고 날개도 커서 땅에서는 유난히 뒤뚱거리는 이 새는 하늘에서는 다른 존재가 된다. 폭풍이 밀려오면 몸을 피하는 다른 새들과 달리 알바트로스는 폭풍 속으로 날아오른다. 6일 동안 한 번의 날갯짓도 없이 날 수 있다고 한다. 활공(滑空)이다. 활공! 빈 공간으로 미끄러진다는, 극적이고도 신비로운 이 단어의 뜻만 알았지 이렇게 적어보는 건 처음이다. 날갯짓을 하지 않고 그저 활짝 펼친 날개만으로 6일 동안 바람을 타는 것이다. 활공이라고 적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바람이 부는데 6일 내내 활공이라니. 이렇게 이 새는 두 달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돈다.

뉴질랜드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실제는 아니고 가상 여행이었다. 아는 분이 여러 병의 뉴질랜드 와인을 꺼내며 말씀하셨던 것이다. 자, 오늘은 뉴질랜드로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라고. 그때만 해도 나는 뉴질랜드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남반구니까 북반구가 여름이면 겨울이겠지 정도와 커피를 롱블랙과 숏블랙으로 먹는 나라라는 정도.

아는 분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성립이 되지 않는 이야기니 그분 이야기를 잠시 하겠다. 그분을 S라고 하자. S는 와인 애호가로 스스로를 ‘중증’이라고 칭하시는 분이다.(참고로 직업은 의사) 늘 낚시 가방처럼 생긴 거대한 가방에 S는 6병 정도의 와인을 들고 등장하신다. 나는 어쩌다 끼어서 그분과 와인 모임을 하고 있는데, 이름조차 없는 이 모임에 딱 하나 규칙이 있다. ‘와인은 모두 S가’라는 것이다. 이야기한 적은 없고 저절로 알게 되었다. 어쩌다 다른 분이 와인을 가져온 적이 있는데 반기지 않는 S를 보며 난 확실히 알았다. S가 예술가라는 것을. 와인들 사이의 질서와 순서, 리듬과 강약을 고려해 S가 구성한 플로우가 깨지는 걸 나도 못 보겠어서 절대 와인을 가져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우리는 돌아가며 밥값과 콜키지 비용을 내며 이렇게 황송한 와인 투어를 하고 있다. 인솔자가 운전도 하고 와인도 주고 설명도 해주는 그런 투어를.

갑자기 뉴질랜드 와인 투어를 하게 된 데는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자, 남섬으로 갑니다.”라며 S가 처음으로 꺼낸 첫 번째 술은 우리 모두가 너무 잘 아는 와인이었다. 클라우디 베이(Cloudy Bay). 뉴질랜드의 소비뇽 블랑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대표적인 술이 클라우디 베이라는 걸 이제는 알지만 예전에도(와인을 잘 모를 때도) 클라우디 베이는 맛있는 화이트 와인의 대명사였다. 클라우디 베이를 마시며 연애했다. 클라우디 베이를 마시며 소개팅을 했다. 클라우디 베이를 사 들고 집에 온 분도 여럿이다. 그래서 클라우디 베이를 보자마자 만감이 교차했다. 좋아해서 많이 마셨고, 그래서 더 이상 마시지 않는 이 와인을 여기에서 보다니.

첫 번째 여행지는 남섬의 북동쪽 말버러(Marlborough)라고 S는 인도했다. 말버러의 클라우디 베이가 그날의 첫 번째 와인이 된 것은 소비뇽 블랑하면 클라우디 베이, 클라우디 베이하면 소비뇽 블랑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지금의 소비뇽 블랑을 있게 한 데가 말버러라고 하며 S는 클라우디 베이에서 나는 이 냄새가 무엇 같냐고 우리에게 퀴즈를 냈다. 시큼하고 산뜻해 침샘이 자극되는 그 냄새를 맡고 나는 ‘레몬’이라고 했다. 100%의 레몬은 아니라서 ‘아니면 신맛이 나는 베리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기다림에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아 S가 말할 수밖에 없었다. “패션프루트.” 아! 모두가 격하게 공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클라우디 베이는 패션프루트’라는 게 각인될 정도로.

말버러 와이너리에 갔을 때 계절이 환상적이었다며, S는 시계초 꽃이 만발했고 패션프루트가 탐스럽게 열린 풍경에 대해 묘사했다. 자기도 모르게 패션프루트 열매를 따 먹었는데 몸서리 처질 정도의 맛이었다고도. 그러고서 클라우디 베이를 시음하는데 패션프루트일 수밖에 없는 냄새에 놀랐다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내가 그 자리에서 패션프루트를 따 먹고 클라우디 베이를 마신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한 번도 패션프루트 생과를 먹어본 적도 없고 먹을 생각도 해보지 못했는데 이상하게도.

두 번째로는 북섬으로 올라갔다. 북섬의 남동쪽 해안에 접한 호크스베이(HAWKE’S BAY)로 가며 제임스 쿡 선장이 그의 남태평양 탐험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에드워드 호크 제독의 이름을 따서 이렇게 붙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호크스베이의 와인은 테 마타 콜레인(Te Mata, Coleraine)이었다. 보르도 스타일로 양조한다는 이 와인을 마실 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호크스베이를 부르던 마오이어를 따서 ‘테 마타’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고는 다시 남섬으로 내려가 센트럴 오타고로 갔다. 말버러가 소비뇽 블랑의 산지이듯 센트럴 오타고는 좋은 피노누아를 만드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리뽄(RIPPON)의 피노누아를 마셨고, 그후로도 그날의 여행은 계속되었는데…

가장 강렬하게 남은 이 날의 와인은 클라우디 베이였다. 클라우디 베이인지 클라우드 베이인지 영원히 나를 헷갈리게 할 이 와인,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하던 이 와인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한 날이어서 그랬겠지. 그래서 남반구의 온후한 공기를 느끼며 뉴질랜드를 걷고 또 걷고 싶다고 생각한 날(오늘이었음) 클라우디 베이를 사 왔다. 뉴질랜드 여행서에서 클라우디 베이 병에 있는 산이 리치먼드 산맥임을 알게 되자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내 옆에는 클라우디 베이가 있고, 그러므로 나는 뉴질랜드에 있다. 구름의 왕자가 되어 날개만 편 채로 구름 낀 리치먼드 산맥을 나는 기분이랄까. 목하 활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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