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알고리즘으로 태어난 철쭉

신형철 기자 2024. 3. 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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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무언가에 홀린 듯 집 테라스에 철쭉을 심었다.

화분을 늘어놓고 모종삽으로 흙을 퍼 담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산 철쭉 10그루를 하나하나씩 꼼꼼히 나눠 심었다.

봄이 되면 옥상은 만발한 철쭉으로 화사해질 것이고, 사람과 기사에 지친 나는 퇴근 뒤 철쭉과 정다운 시간을 보낼 테지.

철쭉을 심기 시작할 때쯤 아이유 신곡으로 시작한 유튜브 뮤직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테라스 화단이 마무리될 때쯤엔 '자전거탄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을 재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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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 통일외교팀 기자

지난주 무언가에 홀린 듯 집 테라스에 철쭉을 심었다. 화분을 늘어놓고 모종삽으로 흙을 퍼 담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산 철쭉 10그루를 하나하나씩 꼼꼼히 나눠 심었다. 꽃샘추위로 기온은 영하까지 떨어졌지만 철쭉을 너무 열심히 심은 탓인지 볼에는 땀이 흘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봄이 되면 옥상은 만발한 철쭉으로 화사해질 것이고, 사람과 기사에 지친 나는 퇴근 뒤 철쭉과 정다운 시간을 보낼 테지. 그 아름다운 시간을 생각하니 벌써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그런데 나는 왜 난데없이 철쭉을 샀을까. 나는 평소 철쭉 팬이었던가.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파트 단지 화단에 늘어 심어져 있는 철쭉을 보며 감탄했던 기억은 없다. 오히려 그저 그런 꽃이라 취급하며 지나쳤다. 때론 벌들을 불러들이는 철쭉을 보며 욕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 농구를 할 때 마땅히 둘 곳 없는 가방을 숨겨놓는 비밀창고 역할로 썼던 기억은 있다.

아니 애초에 나는 나무를 심길 원했던가. 평생 아파트에서 살았던 내가 그럴 리가 있을까. 그러다 문득 유튜브 시청 기록을 보다가 철쭉을 사게 된 경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알고리즘의 바다를 헤매던 나는, 어느 날 ‘겨울에 더 예쁜 추천 나무 5가지’라는 영상을 봤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튜브가 나에게 그 영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추천해준 듯하다.

그리고 나는 ‘테라스 노지월동 나무’라는 키워드를 쿠팡에서 검색했다. 나의 요구에 온라인 쇼핑몰은 남천나무, 백당나무, 능소화나무 따위를 소개해줬다. 이는 판매자들이 입력해놓은 제품 키워드와 내가 입력한 키워드를 비교해 최적의 검색 결과를 표출해주는 에스이오(SEO) 시스템에 따른 결과값이었다.

그렇게 나는 온라인 쇼핑몰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고 남천나무를 샀다. 그런데 남천나무를 심다 보니 화분이 남는다. 화분을 비워둘 수도 있지만 왠지 아쉽다. 남천나무가 외로워 보이고 친구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다른 나무 몇그루를 더 사서 심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렇게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들어 구글에 ‘베란다에서 소소하게 심을 수 있는 나무’를 검색했다. 구글이 골라준 블로그에 들어갔는데, 글을 읽기도 전 구글 애드센스 광고 배너에 철쭉이 추천으로 뜬다. 풍성하게 핀 꽃이 왠지 내 시선을 끌었다. 그대로 광고를 클릭해 철쭉을 구매했다.

그리고 나는 철쭉을 심었다. 철쭉을 심기 시작할 때쯤 아이유 신곡으로 시작한 유튜브 뮤직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테라스 화단이 마무리될 때쯤엔 ‘자전거탄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을 재생하고 있었다. 멋지고 아름다운 하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맥주 한잔하며 화단을 조성하기로 한 나의 훌륭한 선택을 칭찬한다.

그런데 이렇게 가꿔진 화단을 보면서 문뜩 의문이 든다. 이 화단은 나의 자유의지로 만든 것인가. 화단을 가꾸자는 생각은 유튜브의 생각일까 나의 생각일까. 나는 들어본 적도 없던 남천남무를 정말로 원했을까. 남천나무의 친구로 철쭉을 끼워 넣은 결단은 애드센스 광고의 노출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철쭉 화단이 완성되는 순간 흘러나온 자전거탄풍경의 노래는 나의 선곡일까 유튜브 뮤직의 취향일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유의지로 이 글을 읽고 있는가.

newir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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