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거리엔 아직 70세 전태일이 있다

특별취재팀 2024. 3. 7. 03:3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태일 재단-조선일보
창간 104주년 공동 기획
‘12대88의 사회를 넘자’
[3] 기초 산업 노동자들의 소외
지난달 15일 서울 광진구의 한 구두 공장에서 만난 구두공 송모(75)씨의 손. 그는 약 50년간 서울 곳곳의 구두 공장에서 일했다. 곡선으로 휜 구두 밑부분에 단단한 가죽을 정확하게 본드로 붙이는 작업 등을 오래 하다 보니 손이 거칠어진 것은 물론, 곳곳이 벗겨지거나 관절도 휘었다고 했다. 구두공들은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 사람도 없어 구두 장인들이 사라질 판”이라고 말한다. /장련성 기자

열여섯 살 때부터 서울 중구 평화시장에서 일한 재단사였던 전태일(1948~1970)은 늘 주변을 살피는 청년이었다. 먼지가 풀풀 나는 어두운 공장에서 하루 14~16시간씩 일하다 피가 섞인 기침을 하는 여공들을 마음 아파 했다. 1970년 11월 자기 목숨을 던지면서 “근로자도 인간이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를 외친 이유다.

가파른 산업화가 진행되던 이 시기 전후 서울 곳곳에는 크고 작은 봉제·제화 공장 등 이른바 ‘도심 제조업’이 본격화했다. 우리 경제를 일으키는 데 큰 몫을 했던 기초 산업들이다. 당시 노동 현장에 뛰어든 전태일의 ‘후예’ 중 일부는 40년 안팎의 경력이 쌓인 장인(匠人)이 되어 지금도 서울 곳곳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전국 봉제·제화 산업 종사자는 약 5만4000명이다. 전태일 열사 시절과 비교해 이들이 일하는 환경은 나아졌을지 몰라도, 산업이 쇠락해가면서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기술 계승도 불투명하다. 올해로 42년째 서울에서 가죽 구두를 만들고 있는 신모(61)씨는 “이대로라면 다들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면서 “젊은 사람들이라도 들어오면 기술을 전수할 텐데 모든 게 사라질까 아쉽다”고 했다.

전태일재단은 이런 기초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지원해 그들의 기술을 시대 변화에 맞게 발전시킬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정부, 지자체, 기업 노사가 합심한다면 세계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밀라노 등은 이미 장인들의 기술로 세계적인 명품 산업을 일궈냈다. 미국·일본에서도 정부나 지자체가 자국 산업과 노동자들을 키우기 위해 특화 거리를 만들거나 옷에 ‘일본 안에서 봉제한 제품’이란 표시를 하는 등 수년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달 15일 서울 광진구 한 구두 공장에서 만난 신씨는 올해로 42년째 서울에서 가죽 구두를 만들고 있다. 1982년 19세에 전남 고흥에서 상경해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이 일을 해서 지방에 살던 가족들 다 서울로 데려오고 자식 둘을 대학까지 보냈으니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벌이를 묻자, 낯빛이 어두워졌다. 최근엔 일감이 크게 줄면서 작년에 연 3000만원쯤 됐던 수입이 올해는 2000만원을 간신히 넘길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지난달 15일 서울 한 구두 공장에서 구두공 송모(75)씨가 본드로 구두 밑창을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송씨는 올해로 50년째 이 일을 해왔다. /장련성 기자

그는 백화점에 입점한 대형 구두 브랜드에서 구두 틀에 가죽을 붙이고 외형을 만드는 작업을 하청받은 회사에 고용돼 일하고 있다. 미싱을 돌려가며 작업을 마친 구두 1족(足)당 7000~8000원씩 받는 게 그의 수입이다. 하지만 지난 1월 200만원밖에 벌지 못했다. 구두공들은 경기 침체 여파로 비용을 아끼려는 대형 구두 브랜드 기업들이 중국·베트남 등에 해외 생산을 더 많이 맡긴 여파라고 했다.

그가 일을 시작한 1980년대 초반은 본격적으로 구두 업계 호황기가 시작될 때였다고 한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일본 등 제화 산업이 성숙한 나라에서도 한국 구두 장인들의 솜씨를 알아보고 수제화 작업을 맡겼다. 신씨도 친구 손에 끌려 상경한 1982년 서울에서 처음 일을 배웠다. 서른 살 무렵인 1990년대 초에는 한국과 일본의 구두 공장을 오가면서 일을 하는 실력이 됐다. 신씨는 “당시 이브생로랑, 프라다 같은 아주 비싼 구두도 다 내 손으로 만들어봤다”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제화 산업은 번성했다고 한다. 그 무렵 신씨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기 시작했는데, “월평균 500만원 이상을 벌기도 해 대기업 사무직이 부럽지 않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때 모은 밑천으로 내 집 마련에도 성공했고 아들딸도 훌륭하게 키워 대학에 보냈다.

그러나 최근 10년은 내리막이었다. 최근 신씨의 동료 중 많은 사람이 공장을 떠나 물류센터나 건설 현장으로 갔다. 신씨는 개인 사업자로 등록돼 있어 국민연금도 없는 처지라 노후가 걱정이다.

성수동 등에서 만난 여러 구두 장인은 제화공이 떠나고 구두 공장이 망하면 결국 국내 대기업과 소비자도 피해를 본다고 주장한다. 로퍼나 드레스화 같은 정장화 갑피는 운동화와 달리 기계로 대체하지 못해 아직도 사람이 수작업으로 해야 한다. 구두 기술을 갖춘 사람이 여전히 필요하다.

구두에 ‘원산지 표기’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많다. 이들은 해외에서 들어온 수제화에 성분 검사를 따로 하지 않다보니 합성 수지에 소가죽을 조금 섞은 뒤 ‘소가죽 수제화’로 소개해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신씨는 “일부 홈쇼핑에서 소가죽 신발이라고 해서 파는 걸 보면 소가죽이 아닌 경우도 있다”며 “정부가 이런 과장 광고를 규제해줘야 우리가 만드는 신발이 차별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12대88 사회

12대88은 국내 전체 임금 근로자의 12%인 대기업 정규직(260만명)과 나머지 88%인 중소기업, 비정규직 근로자(1936만명)로 나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상징한다.

☞기초노동

전태일재단은 “한국 사회 발전의 원동력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하청 같은 영세 기업과, 봉제·제화 등 도심 제조업까지 장시간 저임금 노동자의 노력도 컸다”며 “우리 사회의 기초를 지탱한 이런 일자리를 열악한 일자리가 아닌 ‘기초 노동’이라고 부르자”고 했다.

〈특별취재팀〉

▷팀장=정한국 산업부 차장대우

조유미·김윤주 사회정책부 기자

김민기 스포츠부 기자

한예나 경제부 기자, 양승수 사회부 기자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