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와 손 잡은 대한민국은 사과해야 합니다”

고경태 기자 2024. 3. 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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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숙·형제육아원·형제복지원 등
6살부터 10여년을 수용시설 전전
40년 만에 국가책임 묻는 김종선씨
김종선씨가 영화숙·재생원 인권침해 피해자로서 직권조사 중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로부터 받은 본인의 원아대장 중 일부. 김종선 제공

“아야, 아야.”

일곱 살 종선(옛 이름 창일)은 엄살을 피웠다. 덩치 큰 외국인 신부의 무릎 위에 꼼짝없이 눕혀졌다. 신부는 자신의 슬리퍼를 벗어 종선의 발바닥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놈, 다시 그러면 안 돼.”

이제 환갑이 넘은 김종선(63)씨는 그때를 천국으로 기억한다. 집이 아니었지만 풍족하게 먹었고 학교를 다녔다. 멜로디언과 아코디언도 배웠다. 가혹한 매질도 없었다. 엄마 역할을 해준 수녀들은 인자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말썽을 피우기 일쑤였다. 욕을 하거나 수녀들에게 대들거나 규칙을 위반하면 신부의 방으로 끌려갔다. 신부는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해준 뒤 우악스러운 손으로 잡아놓고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것은 ‘사랑의 매’라고 불렸다. 신부의 이름은 소 알로이시오였다.

5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종선씨는 부산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던 소년의 집 시절을 이야기했다. 재단법인 마리아수녀회 대표였던 소 알로이시오 신부(1930~1992, 한국명 소재건, 미국명 알로이시오 슈월츠)는 부산 서구 장림동에 있는 부랑인 수용시설 영화숙·재생원 옆에 구호병원을 운영하면서 이 시설의 영화숙 원장이었던 이순영씨를 아동학대 혐의로 고발하고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 인물이다. 결국 영화숙·재생원은 1976년 1월 인가가 취소되는데, 그 이전부터 이곳의 아동 일부가 조금씩 부산시 서구 암남동 산7번지 소년의 집으로 전원되었다. 김종선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천국은 잠깐이었다. 김종선씨는 지옥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소년의 집 이전에 1967년부터 1년간 머물렀던 영화숙·재생원과 소년의 집을 나왔다가 붙들려 들어간 형제육아원과 형제복지원, 그리고 감옥에서 받은 ‘삼청 교육’(재소자 순화교육)까지 10년 이상을 지옥의 한가운데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숙, 형제육아원, 형제복지원은 1960~70년대 대표적인 부랑아 강제수용 시설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이곳에서 구타·강제노역 등 인권침해가 만연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6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겪은 그 지옥에서의 일들은 평생 그의 숨통을 조여왔고 끝내 고혈압과 신장 질환을 불러왔다.

김종선씨의 고향은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이다. 부모가 일찍 이혼하는 등 가정환경이 평탄치 않았다. 6살에 무조건 시외버스를 타고 가출했다가 서울의 파출소로 잡혀갔다. 서울 시립아동보호소로 보내졌는데, 그다음으로 넘겨진 곳이 머나먼 부산의 영화숙이었다. 당시 영화숙은 재생원과 함께 부산 서구 장림동에 있었다. 매일 물구나무서는 기합과 ‘빠따’를 맞고 강냉이죽 따위를 먹으며 굶주림에 시달린 기억만 선명하다.

1968년경 소년의 집으로 전원된 일은 행운이었으나 3년 만에 그곳을 탈출하는 어이없는 사건이 생겼다. 운동장에서 바닥 평탄작업을 할 때 쓰는 롤러를 장난삼아 밀다가 롤러가 철조망을 뚫고 도로 쪽으로 떨어졌고, 10살 종선은 혹시라도 도로를 지나는 사람이 다치지 않았을까 겁을 먹었다. 혼날 일이 두려웠다. 그날로 소년의 집을 나와 충무동 거리에서 부랑아 친구들과 어울리며 1년을 보냈다.

그 뒤 국제시장 인근에서 갑자기 단속반에 잡혀 트럭에 태워진 뒤 부산 진구 용당동 형제육아원으로 끌려간 것은 1972년경의 일이다. 박인근이 형제복지원을 세우기 전 1960년대에 운영하던 아동 수용시설이 바로 형제육아원이었다.

“형제육아원은 앞이 바다였고, 뒤가 산이었어요. 어떻게 도망갈 수가 없었어요. 희망반 장군반 두 개 반에 60~70명 됐어요. 먹은 거라고는 쑥·냉이·소금·보리밥·수제비 밖에 기억이 안 나요. 배고팠어요. 매일 낚싯줄 만드는 일을 했고 툭하면 맞았어요. 낮에 물 내려가는 배수관에 가서 숨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어두컴컴해지면 도망가려고 했죠. 그러면 ‘사또’라는 이름의 규율반장이 대여섯살 아이들을 시켜 좁은 배수관 통에 들어가 뒤지게 했어요. 그렇게 숨은 아이들을 찾아내면 반 죽였어요. 곡괭이로 10대 애들의 몸을 아무 데나 사정없이 패는 거예요. 귀가 나간 애도 있고요.”

1975년경, 형제육아원에서 2년 만에 탈출해 충무동으로 가 ‘모라이’를 하며 보냈다. 모라이란 항구에 배가 들어올 때 ‘바께쓰’(양동이)를 들고 올라가 밥을 구걸하는 행위였다. 넝마주이 친구들이 기거하는 숙소에서 지내다가 다시 1년 만에 단속반에 붙들려 이번에는 형제복지원으로 갔다.

형제복지원에서는 매일 산에 올라가 돌을 깨고 마사토를 마대에 남아 100번씩 나르는 중노동을 했다. 마대자루를 한 번씩 나를 때마다 조장이 종이에 바를 정(正)의 작대기 하나씩을 기재했다. 100번 나르면 새마을 담배 서너 개비를 줬다. 정량을 못 채우면 ‘곡괭이 빠따’가 돌아왔다. 그런 아이들의 노역 속에서 형제복지원의 건물들이 하나둘 올라갔다. 저녁 점검이 끝나면 노래자랑을 했는데 1등은 새마을 담배 10개비, 2등은 5개비, 3등은 세 개비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비참하고 또 비참했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이었다. 밑에서 자꾸만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랐다.

1979년 겨울의 어느 날 산 입구 쪽에서 용접 작업을 나갔다가 두 명의 조장이 싸우는 틈을 타 형제복지원을 도망쳤다. 뒤에서 쫓아올까 봐 무서워 충무동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숨이 터지도록 달렸다. 충무동의 철물점에서 두 달 일하고 번 돈으로 차비를 마련해 포천 고향 집을 찾아갔으나 몸을 기댈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동안 새엄마가 낳은 동생이 세 명이나 되었다. 방황은 계속됐다. 1980년, 서울에 와 철물점 일을 하다가 뜻하지 않게 주먹 싸움을 하게 되었고 감옥에 갔다.

그냥 감옥이 아니었다. 김씨는 “감옥에서 삼청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종선씨는 “매일 6시간씩 밖에 나가 피티체조를 했고 2시간은 정신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성동구치소와 영등포교도소에서 각각 8주씩 그런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1980년 9월22일부터 1987년까지 4주 단위로 시행된 ‘재소자 순화교육’을 말한다.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백서를 보면, 사회정화 차원에서 25개 교도시설에서 사회정화를 위한 순화교육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삼청교육과 판박이였다. 삼청교육은 ‘계엄포고 13호’라는 근거라도 있었으나, 재소자 순화교육은 그조차 없었다.

김씨는 감옥에서 나와 정신을 차리고 한문·영어 등을 독학으로 공부하며 세상에 대해 깨쳐나갔다. 1984년 결혼도 하고 서울에서 자리 잡으며 안정을 찾았다. 김씨는 20대 초반까지 겪었던 그 악몽에 대해 입을 닫고 살아왔다. 잊으려 했다. 가족에게는 “어린 시절 잠깐 고아원에 있었다”는 식으로만 얘기했다. 과거 수용시설에 대한 여러 언론의 고발보도와 함께 국가폭력의 책임을 줄기차게 따지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때의 일들을 다시 복기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가을에야 처음으로 부인에게 형제복지원 등 수용시설에 있었노라고 고백했다. 놀란 눈으로 듣던 부인은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흘렸다.

“지금도 ‘선도’ 완장 찬 사람들에게 쫓기는 꿈을 꿔요. 뒤에 천막이 처진 트럭을 보면 지금도 놀랍니다.” 그는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해 선도적으로 싸운 사람들에게 빚진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궁색한 변명이지만 다들 생계에 정신이 없었잖아요. 이제는 저도 힘을 보태고 싶어요.” 김씨는 지난해 10월 진실화해위를 방문해 조사관에게 영화숙에서 겪은 피해 사실에 대해 진술했다. 지난해 말부턴 형제복지원 피해자들과 교류하고 있는데, 그 중엔 형제육아원과 영화숙·재생원 피해자도 있다고 한다.

“흡혈귀들이었어요. 흡혈귀.” 김종선씨는 수용시설을 세운 자들과 국가가 손을 잡고 아이들의 피를 빨아먹었다고 말했다. “우리 핑계를 대고 국가로부터 받은 보조금은 다 자기들 주머니로 챙기고요. 죽도로 때리고 굶기고 죽이고…. 인생에 갈림길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길은 아예 있어서는 안 되는 길이었어요. 다시는 이런 시설이 없어야 합니다. 흡혈귀들의 손을 잡아준 대한민국은 어서 사과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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