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위기' 닥친 지방에… 빅5 병원·명문대 있었다면?

2024. 3. 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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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수도권은 국토 면적의 12%에 불과하지만 인구의 50.5%와 100대 기업 본사의 86%가 밀집돼 있으며, 이번에 확정된 22대 국회의원 선거구도 254개 지역구 전체 의석 중 서울·경기·인천의 수도권이 122석을 차지해 48%를 점유하고 있다. '국가 예산 배분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다'라는 말처럼 국가 예산은 기본적으로 다수의 유권자가 있고 목소리가 큰 곳에 많이 배분된다.

이렇듯 기업이 몰려 있고 일자리가 많은 수도권에 대한 국가의 투자는 큰 저항감 없이 지속됐다. 1989년 수도권 집값 안정과 주택난 해결을 위해 시작됐던 1기 신도시는 3기까지 확장돼 120만호라는 거대한 주거단지를 만들었고, 용인과 평택 등의 반도체 클러스터는 600조원이 넘는 국가 재정과 민간 자본이 투자되는 상황이다. 해방 후 70년이 넘었고 지방자치도 서른이 넘었지만, 대한민국의 수도권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면서 몸집을 키워 가는 거대한 블랙홀이 되었다.

정부가 운영 중인 제도들도 수도권 집중을 가속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예비타당성조사'다. 예타는 총사업비 500억원 이상이면서 국가 재정 지원 규모가 300억원이 넘는 대규모 신규 사업에 대한 사전 타당성 검증, 평가 절차다. 국가 재정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 도입된 제도지만,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비수도권 발전을 가로막는 허들이 되고 있다. 얼마 전 이슈가 된 달빛내륙철도처럼 지역 사회간접자본(SOC)들은 대부분 경제성이 나오지 않아 예타를 통과할 수 없고 사업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장기적으로 국토를 촘촘하게 개발해 지방으로 기업들이 내려오고 일자리를 만들어 청년들이 꿈을 펼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SOC지만, 실제 투자로 이어지는 것은 극소수다. 이렇다 보니 수도권은 더욱 살찌게 되고 지방은 더욱 말라 가는 불균형의 흐름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수도권에는 인재와 기업이 넘쳐나기 때문에 기업들은 규모의 경제가 가져다주는 긍정적 외부 효과를 누리기 위해 수도권에 계속해서 투자하고 있지만, 비수도권에 대한 투자는 고려의 대상도 아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2023년 조사에 의하면 수도권 소재 기업 10곳 중 6곳은 비수도권으로의 이전·증설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철저하게 외면받고 있다. 인재가 없어 외면받고, 좋은 대학이 없어 외면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벌어진 격차를 인정하고 비수도권 투자의 판을 바꾸는 작업이 우선돼야 한다.

수도권에 집중된 소위 빅5라 불리는 병원들이 영남권·호남권·충청권·강원권 등 지방의 각 권역에 분산돼 대한민국 어디서나 주거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높은 의료복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서울대로 대표되는 명문 대학들이 지방에서 성장하며 인재를 배출하고 주요 대기업이 각 권역의 특색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분산돼 있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땠을까?

경북 포항 영일만산업단지와 블루밸리산업단지가 '배터리 리사이클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됐다. 사진은 영일만항 전경. 포항시

지방에도 양질의 의료 서비스가 가능했을 것이고, 지방에서 태어난 청년들에게는 고향에서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대학은 천편일률적인 종합대학의 모습이 아닌 전문성이 각기 다른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며, 기업들도 지역에 둥지를 틀고 대학과 힘을 합쳐 혁신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생태계를 만들었을 것이다.

필자는 '비수도권에서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믿고 있다. 2009년 착공해 2016년에 개통된 총연장 107.6㎞의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는 당시에는 경제성 부족이라는 비판이 심했지만, 낙후된 경북 동부 내륙지역의 접근성을 향상시켜 영덕을 1000만 관광도시로 만들었다.

수도권에 건설되는 GTX 같은 급행철도들은 역세권을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을 상승시키고 비수도권 청년들을 빨아들이지만 비수도권의 SOC 투자는 장기적으로 기업과 일자리를 분산시켜 지역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굳이 대규모 SOC가 될 필요도 없다. 민간기업들이 인재를 구하기 쉽게 하기 위해 대학에 투자하고 인재들이 머무를 수 있는 정주 여건에 투자해야 하며, 병원과 문화시설 등에 투자하고 새로운 투자 수요를 자극할 수 있는 인센티브 체계에 대한 깊은 고민들이 있어야 한다.

고민에 대한 해답은 비수도권에 대한 민간 투자 촉진 정책이다. 지난해 정부는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민간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마중물' 역할을 하는 지역 활성화 펀드를 만들었다.

당시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5년간 정부의 지역 투자가 2018년 239조원에서 2022년 330조원으로 대폭 상승했지만 실제 지역 활성화 효과는 미약했다고 지적하며, 이는 지역 간 형평에 초점을 맞춘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과 지방정부의 열악한 재정 상황으로 대부분 사업이 단발성에 그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맞는 지적이다. 중앙정부는 톱다운식으로 사용처가 정해진 꼬리표 달린 예산을 지방에 투자하고 지방정부는 매칭 자금을 댄다고 허리가 휘어지며, 도지사가 실제 자율성을 가지고 집행할 수 있는 예산은 1000억원 남짓이다.

10년간 연간 1조원씩 비수도권에 투자하는 지방소멸대응기금 사업도 107개에 달하는 시군에 배분되다 보니 558개나 되는 사업에 평균 18억원 정도씩 배분돼 실제 현장에서 지역 소멸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경북만 해도 매년 울릉도 인구와 맞먹는 9000여 명의 청년이 이탈하는 상황을 막기에는 부족하다.

목표는 분명하다. 정부의 재정은 철저하게 마중물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총사업비의 20% 정도만 정부와 지방정부의 재정을 투입하고 나머지 80%는 민간자금으로 채워 레버리지 효과를 극대화시켜야 한다. 민간 투자 활성화를 위한 자금들은 지역에 서비스 산업이 꽃필 수 있는 인프라스트럭처 공급에 집중돼야 한다.

그동안 투자 유치 활동을 하면서 제조업에 국한됐던 것이 사실이다. 투자촉진보조금 같은 인센티브에 의존했던 경향이 컸고, 민간의 제조업 투자 외에 서비스업 투자를 유인할 마땅한 정책 수단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병원과 같이 지역에 수요가 부족하고 상상할 수 없었던 인프라도 제대로 기획만 한다면 가능하다는, 수도권의 빅5 병원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최근 세브란스병원에 구축된 중입자치료기 같은 거대 의료장비를 갖춘 민관 합작 의료원도 구상 중이다. 교통이 편리한 KTX역 인근에 대형병원과 초거대 의료기기 그리고 치료 후 자연을 벗 삼아 회복할 수 있는 회복병원까지 함께 패키지로 기획한다면 수도권으로 원정 진료를 가지 않고 지역에서 고품질의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우리 지역으로 원정 진료를 오는 미래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호텔과 리조트 같은 관광 인프라도 마찬가지다. 2022년 울진 산불 피해 지역을 둘러보며 다시 수십 년이 걸리는 조림 사업을 하느니 바다와 산이 조화돼 경치가 좋은 곳에 호텔과 리조트를 유치하자는 발상으로 리조트 업계 관계자를 초청해 보여주기까지 했지만, 교통 불편 등 사업성이 부족할 것이라는 이유로 투자를 보류했다.

이렇게 투자 수익성이 조금 부족한 경우도 공공이 마중물을 제공해주고 직원 휴양시설 등으로 일정 부분을 사용하는 수요자로서 역할을 해준다면 사업성을 보완할 수 있으며, 교통이 불편한 지역도 명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정책수단은 공직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문법을 바꾼다. 또한 이를 통해 다양한 가능성이 생기고 여러 가지 상상을 할 수 있다. 올해 업무보고를 진행하면서 민간 투자 활성화 펀드 사업을 위해 전 직원의 아이디어를 모으는 발표회를 열었다. 56개의 아이디어가 모였고 금융 전문가들과 3시간 가까이 토론도 진행했다.

영남권의 물류허브가 될 수 있는 대규모 유통물류센터, 산업단지에 부족한 전력 문제를 해결할 수소연료전지 발전 사업, 그리고 신재생에너지와 함께하는 스마트팜단지와 식품산업단지 등 새로운 가능성과 창의적인 생각이 발산되는 것을 경험했다. 경북도에 필요한 대표 과제는 대한민국 금융 1번지인 여의도에서 투자은행과 자산운용사들을 모아놓고 매칭데이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민간 투자 활성화를 위한 투자 펀드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공공은 민간이 더 쉽게 투자를 결정하고 수익을 낼 수 있도록 규제 완화를 동시에 추진하고, 인허가 절차를 원스톱으로 처리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 경북은 2019년 배터리 규제자유특구를 통해 황무지나 다름없던 포항의 블루밸리 국가산단을 배터리 기업으로 꽉 채운 경험을 지니고 있다.

이번 지역 활성화 펀드도 경북이 제대로 된 성공 사례를 만들어 제도 안착에 기여하고 20년 넘게 해결하지 못했던 지역 투자 사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확실히 이끌어낼 것이다. '대한민국이 초일류 국가로 가는 새로운 길은 이제 수도권 집중의 물길을 바꾸고 사람이 떠나고 일자리가 없어지는 지방에 다시 사람과 일자리를 모으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문제는 두려움 그 자체다. '지방에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은 전염병처럼 퍼져 우리 지방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빼앗아 간다. 민간과 공공이 힘을 합쳐 지방 투자의 성공 사례를 만들고 대한민국 절반에 가까운 비수도권 국민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미래 세대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제대로 심어주는 것이 정치와 행정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철우 경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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