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질하면 빨간 글씨가…독립운동 ‘비밀 잉크’ 편지 첫 단어는 綱要

한겨레 2024. 3. 6.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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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기록관 보관된 ‘이순희’의 편지
일제강점기 비밀교신 기술적 과정 생생히 보여주는 사료
편지 행간에 비밀 잉크로 적어넣은 깨알 같은 글씨 첫 부분을 확대한 사진. 임경석 제공

오래된 편지 한 장에 눈길이 간다. 국한문 혼용체로 쓰인 손편지다. 끝이 뭉툭한 붓으로 반듯하게 또박또박 쓴 글씨가 알아보기 쉽고, 행간이 넓어서 시원한 느낌을 준다. 가로로 긴 종이에 세로로 내려썼다. 1929년 7월2일에 쓴 편지이니, 근 100년이 다 된 셈이다. 어떤 내용인지 첫 두 문장을 읽어보자.

요사이 일기(日氣) 매우 덥사온데, 아주버님 기체(氣體) 안녕하옵시며 아주머님 기력(氣力)도 강녕(康寧)하옵시며 가내 제절(諸節)들도 다 무고하옵시며, 금년 농사는 어찌 되는가요. 이곳은 아버님도 안녕하시며 어머님도 강녕하시며 왼 집안이 다 무고하오며, 금년 농사는 아직까지는 비도 많이 오고 한데다가, 지심도 잘 매고 해서 농사가 잘될 것 같습니다.1

평범한 안부 편지다. 이순희라는 젊은 여성이 3촌이나 5촌쯤 되는 친척 아저씨 이안태씨 댁에 보낸, 따스한 배려와 관심이 담긴 문안 편지다. 더운 여름 날씨에 건강이 어떠한지, 농사 작황은 어떤지 묻고 있다. 글쓴이의 살림 형편도 적었다. 온 가족이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고, 농사일도 순조롭다는 소식이다. 이상할 게 없다. 북간도나 연해주 한인 농촌 사회에서 빈번하게 오가는 편지 유형으로 보인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이 평범한 편지가 보관된 곳이 예사롭지 않다. 이 편지는 모스크바 도심에 소재한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기록관(РГАСПИ)의 한 서고에서 발견됐다. 그 서고에는 조선공산당이 지부로 가입했던 국제공산당(코민테른) 옛 문서들이 보존돼 있다. 도대체 이순희의 평범한 안부 편지를 왜 코민테른기록관에서 보관할까? 코민테른 조선지부 서류철(ф.495 оп.135 д.162) 속에서 오랫동안 보관된 데는 뭔가 곡절이 있을 것만 같다. 평범한 안부 인사 배후에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지나 않을까. 대관절 이 편지는 누가 무슨 목적으로 누구에게 보냈을까?

붓으로 옅게 발라주면…

그랬다. 이 편지는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니었다. 이면에 비밀을 담은 위장된 편지였다. 편지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행간에 뭔가 희미하게 쓰여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옅은 색깔의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희미하게나마 눈에 띈다. 행간마다 한 칸에 1∼3줄씩 적혀 있다. 비밀 메시지였다.

애초에 행간의 글씨는 투명 잉크로 쓰였을 것이다. 비밀을 유지하려면 말이다. 설혹 배달 도중 일본 경찰이나 밀정에게 압수됐다고 하자. 그럴 때도 내용을 들키지 않아야 했다. 그를 위해서 자연광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수한 잉크가 사용됐으리라. 산성 용액을 섞어서 제작한 비밀 잉크를 사용했다면 판독 조처를 했을 때 붉은빛 글자를 읽게 될 것이고, 염기성 용액을 섞었다면 푸른빛 글자를 읽을 터였다. ‘이순희의 안부 편지’는 전자에 속했다. 행간의 깨알 같은 글씨는 연하게나마 붉은 색깔을 띠고 있다.

판독 조처는 사전에 약속됐을 것이다. 편지를 주고받는 쌍방 사이에 말이다. 편지지에 열을 가하는 방법이었을까?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지만 이 편지는 그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을리거나 불에 쬔 듯한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편지지 표면이 깨끗했다. 그로 미뤄보면 뭔가 다른 방법이 사용됐다. 아마도 판독용 용액을 붓으로 옅게 발라주는 방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전달하려 했던 편지 내용은 어떤 것일까. 확대경을 들이대보자. 근 100년이나 세월이 흘렀지만, 흐릿하게나마 판독이 가능하다. 국한문 혼용체의 펜글씨였다. 첫 자리에 쓰인 글자는 ‘강요’(綱要)였다. 가장 중요한 요점이라는 뜻이다. 글의 제목에 해당했다. 그다음으로 행을 바꾸어 이어지는 문장은 “지금까지의 조선 공산주의 운동은…”이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그러면 그렇지. 예상이 맞았다. 이 편지는 1929년 7월 즈음의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 한 모퉁이를 반영하는 역사적 문서였다.

이순희의 안부 편지 첫머리. 행간에 붉은빛 글씨가 흐릿하게 비친다. 임경석 제공

1929년 비밀리에 모인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

붉은빛의 깨알 글자를 읽어보자. ‘강요’라는 제목의 이 글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 관해 말하고 있다. 과거 사회주의 운동은 성과도 있고 약점도 있었는데, 본질적으로는 공산당 건설의 전 단계 준비 과정이었다고 한다. 내부 약점이란 분파 투쟁의 전통, 대중 사업 미흡, 조직의 느슨함 세 가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현 단계 임무는 이 약점을 극복한 새로운 공산당을 재건설하는 데 있었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라고 한다. 이 단체는 공산당 재건설을 실현하는 유일한 출발점이고, 그 임무는 사회주의 운동의 중앙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비밀 편지의 실제 작성자는 누구인가? 이제 분명해졌다. 바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라는 단체였다. ‘재건설’이란 표현에 눈길이 간다. 이 표현의 특이성 때문에 외부 인사들은 이들을 가리켜 재건설회 혹은 재건설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본 경찰의 정보 기록을 보면, 이 단체는 1929년 3월 중국 길림성 돈화현성 교외에 비밀리에 집결한 10여 명의 유력한 사회주의자가 결성했다.2 이 단체의 목적은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공산당 재건을 준비하는 데 있었다.

설립 당시 3인 집행부(김철수, 김영식, 김규열)가 선출됐는데, 그중 책임비서로는 김철수(36)가 뽑혔다.3 1921년 상해파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1926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1927~1928년 국제공산당 파견 대표 등을 역임한, 그 유명한 김철수였다. 집행부 3인 위원은 외견상 기존에 존재했던 각 공산그룹을 고루 반영하고 있음을 본다. 김철수는 상해당, 김규열은 고려공산동맹, 김영식은 레닌주의동맹이라고 불리는 공산그룹에 속했던 사회주의자였다. 재건설회가 분파 단체가 아니라 기존 모든 공산그룹을 망라하는 통합 단체임을 과시하기 위한 인선이었다.

이순희 안부 편지의 발송자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 책임비서 김철수, 30살 즈음. 임경석 제공

‘조선통’ 핀란드 사람 오토 쿠시넨에게 보낸 편지

그렇다면 이 편지를 받아보는 수령자는 누구인가? 그 해답은 수개월 전에 있었던 국제공산당의 조선 문제 결정을 되돌아보면 알 수 있다. 국제공산당은 1928년 12월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현존하는 두 개의 조선공산당 어느 편에도 조선지부 대표권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국제당 동방부의 지휘하에 새로운 조선지부를 재건하겠다는 결정이었다.4 공산당 재건운동을 국제당이 직접 지휘한다는 대목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재건설회’는 이 결정을 수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따라서 조선공산당 재건설을 과제로 하는 자신의 활동상을 국제당 동방부에 충실히 보고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순희의 안부 편지는 바로 그 증거였다.

말하자면 이 편지의 수령자는 국제공산당 동방부였고, 그 책임자는 핀란드 사람 오토 쿠시넨(48)이었다. 1918년 핀란드공산당 창설자, 1920년 이후 국제공산당 집행위 간부로 활동해온 저명한 이였다. 특히 그는 1921년부터 1928년까지 여덟 차례 채택된 조선 문제 결정 과정에 단 한 번만 제외하고는 줄곧 위원으로서 참여한 조선통이었다. 왜 코민테른기록관 수장고에 이순희의 안부 편지가 보관돼 있는지, 그 이유도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히 밝혀졌다.

이순희 안부 편지의 사료적 가치는 높다.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 참가자들이 사용한 비밀 교신의 기술적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해독할 수 없었던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 강요’의 미판독 부분(제5항)을 온전히 읽어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제5항은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는 ○○○○○○○○○○○○○○○○ ○○○○(복자-원문) 이상의 임무를 수행함”5이라는 불완전한 형태로만 알려져왔다. 그런데 이순희 편지에 기재된 비밀 메시지에는 복자 부분이 드러나 있다. “최단기 내에 조선공산당열성자대회를 소집하여”라는 20개 글자가 그것이다. 열성자대회를 소집한다는 정보는 비밀사항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순희 안부 편지의 수령자 국제공산당 동방부장 오토 쿠시넨. 임경석 제공

비밀 메시지 속에는 ‘열성자대회 소집규정’도 기재돼 있었다. 거기에는 ‘열성자’ 여부를 판정하는 구체적 기준이 제시됐고, 또 대회 소집 방법과 기술 문제 등에 관해서는 재건설회에 일임한다고 적혀 있다. 재건설회가 열성자대회 소집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실감이 난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 전환기를 보여주는 편지

이순희의 편지를 하마터면 흘려보낼 뻔했다. 친척 아주버니 댁의 안부를 묻는 평범한 편지라고 끝까지 오인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 편지는 평범하지 않았다. 그것은 1929년 공산당 재건운동의 개막이라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전환기 양상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주 1. 李順姬, ‘李安太 씨 아즈바님 보시오’ , (1929 년 ) 7 월 2 일 , 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162 л .23

주 2. 京畿道, ‘京高秘第 7062 號 , 共産黨朝鮮國內工作委員會事件檢擧 ニ關スル件’, 1931년 7월21일, <現代史資料> 29, 321 쪽 .

주 3. Президиум подгот . комисии по возсозд . ККП Ким - Черсу , Ким - Гюер , Ким - Енсик (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 간부회 김철수 , 김규열 , 김영식 ), Доклад ответственному лицу восточного отдела Коминтерна тов . Куусинену ( 국제당동방부 책임자 쿠시넨 동무 앞 보고 ), 1929년 7월9일, 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162 л .33

주 4. Постановление ИККИ о внутрипартийном положении Корейской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 조선공산당 당내 상황에 관한 국제당집행부 결정 ), 1928년 12월10일, РГАСПИ ф .495 оп .3 д .71 л .150

주 5. ‘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 綱要’, 1-2 쪽 , 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162 л .22 об .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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