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오렌지 없는 오렌지주스 나올까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24. 3. 6.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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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감귤의 가격이 급등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고기반찬이 없으면 밥을 못 먹겠다는 얘기를 들으면 이해가 안 가지만 한편으로는 입맛 취향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필 역시 매 끼니 과일을 먹지 않으면 무척이나 아쉽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최근 수개월 사이 식비가 부쩍 늘었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과일값이 급등해서다. 제철 과일인 사과와 귤이 그렇고 수입 과일인 키위와 바나나도 거의 두 배 수준이다. 특히 귤은 끝물에 다가가서 그런지 점점 오르는 것 같다. 이건 아니다 싶어 며칠 전 오렌지를 둘러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렌지 역시 5개 1만 원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주위를 둘러보다 결국 6개 1만 원인 천혜향을 샀다.

최근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실린 한 논문을 읽다가 터무니없는 오렌지 가격이 수입업자의 농간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오렌지의 주산지인 미국 캘리포니아에 십여 년 전부터 치명적인 병이 퍼져 과수원이 초토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말 중국에서 처음 발견된 감귤녹화병은 남중국과 동남아시아의 풍토병으로 자리잡았다. 2005년 미국 플로리다에 상륙해 2012년 캘리포니아까지 퍼지며 사실상 단일 작물로 재배하는 오렌지 농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감귤녹화병에 걸린 귤의 모습이다. 위키피디아 제공

● 감귤녹화병으로 과수원 절반 갈아엎어

한자 黃龍病(황룡병)의 중국어 발음인 후앙롱빙(Huanglongbing, 줄여서 HLB)으로 불리는 감귤녹화병(citrus greening disease)이 상륙하면서 캘리포니아의 감귤류(90%가 오렌지) 생산량이 급감해 2022-23시즌에는 병이 돌기 이전과 비교해 수확량이 10%에 불과해 90년 만에 최악의 흉년이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박테리아가 병원체인 감귤녹화병을 물리칠 마땅한 대응책이 없다고 한다. 그 결과 병 상륙 이래 캘리포니아 오렌지 과수원의 절반을 갈아엎은 상태다. 

이는 19세기 프랑스 포도밭을 휩쓴 필록세라(포도뿌리혹벌레)나 20세기 중반 중남미 바나나 농장을 초토화시킨 파나마병이 연상되는 대재앙이다. 포도의 경우 저항성이 있는 미국 자생 포도나무를 대목으로 쓰는 접붙이기를 통해 필록세라를 극복했다. 바나나는 파나마병 곰팡이에 취약한 품종인 그로미셸을 다 뽑아버리고 저항성이 있는 품종인 캐번디시로 바꿔치기해 위기를 벗어났다. 

그렇다면 감귤류는 어떨까. 감귤류에 따라 감귤녹화병의 심각성이 다른데 특히 오렌지가 취약하다. 세계 감귤류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오렌지는 맛과 향이 뛰어나기 때문에 생과뿐 아니라 주스로도 최적이다. 미국 오렌지 농업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다행히 오렌지 최대 생산국은 브라질은 병이 상륙했을 때 선제 조치를 잘해 병이 퍼지는 걸 막았다. 하지만 언제 뚫릴지 모르기 때문에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게다가 오렌지는 유전자 다양성이 부족해 저항성이 있는 숨어있는 품종을 찾을 희망도 없다. 참고로 오렌지(엄밀히 말하면 스위트오렌지)는 만다린(순종 귤)과 포멜라 사이에서 나온 잡종 식물체를 기반으로 돌연변이체를 선별해 새 품종을 얻었기 때문에 품종 사이에 게놈이 거의 같다.

따라서 전혀 다른 접근법으로 문제해결에 나서고 있는데 감귤녹화병 저항성이 큰 감귤류인 탱자를 도입해 잡종을 만드는 육종이다. 우리나라 남부 지방에서도 자라는 탱자는 독특한 향이 꽤 매력적이지만(열매를 실내에 둬 천연 방향제로 쓴다) 맛이 쓰고 시어 먹을 수 있는 과일은 아니다. 따라서 탱자와 감귤류 품종을 교배해 얻은 잡종 1세대 역시 맛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반복해 감귤류와 교배하면서 감귤녹화병 저항성이 있는 자손을 선별하면 맛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실제 이렇게 해서 운 좋게 얻은 품종인 선드래곤(US SunDragon)은 순한 오렌지로 느껴지는 향과 맛을 지니고 있어 최근 오렌지를 대신해 심는 과수원이 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탱자를 기반으로 한 감귤류 육종이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선드래곤을 뛰어넘는 품종을 찾으려면 엄청난 행운이 따르지 않는 한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만다린 재배 품종과 감귤녹화병에 저항성이 큰 탱자와 사이에서 육종으로 얻은 잡종 품종인 선드래곤(사진)은 특이하게도 오렌지와 비슷한 향기를 지니고 있다. 최근 오렌지 대안으로 선드래곤을 심는 농가가 늘고 있다. Georgia Grown Citrus 제공

● 오렌지 향기 유전자 찾아

미국 플로리다대 연구자들은 감귤류 향기를 분석해 육종 기간을 줄일 수 있는 기법을 개발했다. 이들은 선드래곤이 오렌지와 향이 꽤 비슷하다는데 착안해 오렌지와 만다린, 탱자, 탱자 잡종(선드래곤이 여기 속한다) 등 179개 식물체에 열린 열매를 따서 향기 프로파일을 분석했다. 

그 결과 오렌지와 만다린, 탱자는 각각 한 그룹으로 묶였지만, 탱자 잡종은 식물체에 따라 향기 프로파일이 제각각이었고 선드래곤과 아직 상업화되지 않은 품종인 FF11061은 오렌지 범위에 들어가 있었다. 이는 사람의 후각 평가와 일치하는 결과다.

연구자들은 만다린과 비교해 오렌지 향기의 특성을 부여하는 분자 26개를 찾았고 이 가운데 7가지 에스터 분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흥미롭게도 감귤녹화병에 걸린 오렌지의 열매는 오렌지 느낌의 향이 약한데 분석 결과 에스터 농도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향기 프로파일 그래프로 가로축은 오렌지 향 점수, 세로축은 만다린(귤) 향 점수다. 감귤녹화병 저항성이 큰 감귤류인 탱자를 기반으로 육종한 잡종(Poncirus hybrid)은 향기 특성이 다양한데(분홍색), 그 가운데 한 품종인 썬드래곤(US SunDragon, 연두색)은 오렌지(주황색)와 가깝다. 최근 오렌지 향 정체성을 부여하는 유전자가 밝혀짐에 따라 오렌지 대안을 찾는 육종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제공

연구자들은 만다린과 오렌지 게놈을 비교해 오렌지가 에스터를 많이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유전자를 찾았다. 알코올 아실트랜스퍼레이즈(AAT)라는 효소로 알코올과 카복실산 사이에 에스터화 반응을 촉매한다. 감귤류 10종의 AAT 효소를 비교한 결과 오렌지와 포멜라만이 305번째 위치에 아미노산 타이로신이 끼어들어 활성이 커진 유전형으로 밝혀졌다. 이 유전형의 기원은 포멜라라는 뜻이다. 

보통 과실수의 육종은 잡종 식물체를 키워 열린 열매로 평가한 뒤 식물체를 선별해 다시 교배를 해 자손을 얻고 평가하는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하므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번 연구로 오렌지 향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유전자를 알게 됨에 따라 교배로 얻은 씨앗을 많이 뿌려 어린 식물체 상태에서 DNA 검사로 ‘될 놈’을 선별하면 육종에 걸리는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논문에 따르면 현재 미국 법은 오렌지 이외의 감귤류 과즙을 10% 넘게 섞으면 ‘오렌지 주스’라고 표시할 수 없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과일주스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향기 프로파일이라며 이 규정을 완화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처럼 대규모로 오렌지 나무만 심는 단일농법은 감귤녹화병 같은 병이 돌면 치명상을 입는데, 경직된 법규가 대안 선택을 망설이게 하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오렌지 과즙이 없는 오렌지 주스가 나오지 않을까. 

서아프리카에 자생하는 좁은잎커피나무(C. stenophylla)의 커피 향기 프로파일(분홍색)은 고급으로 평가되는 에티오피아산 아라비카의 향기 프로파일(빨간색)과 꽤 비슷하다. 반면 브라질산 아라비카(주황색)는 오히려 로부스타(파란색)에 더 가깝다. 향기 프로파일만으로는 좁은잎커피나무가 에티오피아 아라비카와 가까운 품종처럼 보인다. 네이처 식물 제공

● 100년 만에 부활 꿈꾸는 좁은잎커피나무

과일만큼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커피 원두 가격 역시 최근 1, 2년 사이 꽤 올랐다. 배경은 흉작으로 특히 최대 산지인 중남미에서 생산량이 크게 줄었다. 커피의 경우 병충해뿐 아니라 지구온난화와 가뭄, 홍수 같은 기후변화라는 구조적 문제 있어 앞으로가 더 문제다. 

커피나무는 향이 섬세한 아라비카와 거친 로부스타 두 종이 있는데, 둘은 가까운 사이다. 로부스타 커피나무와 또 다른 종의 커피나무(학명 코페아 유게니오이데스) 사이에서 아라비카 커피나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라비카는 로부스타와 유게니오이데스의 중간 특성을 보인다. 유게니오이데스 원두로 내린 커피는 맛과 향이 뛰어남에도 수확량이 너무 적어 한 그루에서 원두 320g을 얻는 게 고작이라 상업 작물이 되지 못했다.

오늘날 원두의 60%를 공급하는 아라비카는 생육 최적 온도가 18~22℃이다. 나머지를 차지하는 로부스타는 24~26℃로 더위에 좀 더 강하고 병해충 저항성도 높다. 지구온난화로 아라비카를 재배할 수 있는 면적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향이 거친 로부스타를 대신 심을 수는 없다.

그런데 아라비카 커피나무의 위기도 스위트오렌지처럼 다른 종임에도 향기 프로파일이 비슷한 커피나무가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바로 서아프리카에 자생하는 좁은잎커피나무다. 100여년 전 이 일대에서 재배하기도 했던 좁은잎커피나무는 아라비카가 널리 재배되면서 경쟁에서 밀려났고 지금은 야생화돼 자생하고 있다. 

지난 2021년 학술지 ‘네이처 식물’에는 좁은잎커피나무의 재발견에 대한 논문이 실렸다. 영국 왕립식물원 연구자들은 좁은잎커피나무 자생지의 평균 온도가 아라비카 자생지에 비해 6~7℃나 더 높다는 데 착안해 기후변화에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알아봤다. 

현지답사에서 찾은 좁은잎커피나무의 원두로 커피를 내려 시음한 결과 에티오피아산 아라비카 커피와 향기 프로파일과 선호도가 거의 비슷했다. 로부스타 커피에 비해서는 선호도가 월등히 높았다. 카페인 함량도 아라비카와 비슷했다(로부스타는 이들의 2배 수준). 반면 생육 최적 온도와 가뭄 및 병충해 저항성은 로부스타와 비슷하다. 좁은잎커피나무 또는 아라비카와의 육종으로 나온 신품종이 커피를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

탱자 유래 잡종인 선드레곤의 열매와 좁은잎커피나무 원두로 내린 커피의 향기가 과연 얼마나 오리지널과 비슷할지 무척 궁금하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10권), 《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가 있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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