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짜리 장편 『문신』 윤흥길 “시신으로라도 돌아오겠다는 민족의 귀소본능 형상화”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4. 3. 6.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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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부병자자(赴兵刺字)의 풍습이 있다고? 부병자자는 전쟁에 나가기 전에 남자들이 자신의 몸에 식별이 가능한 문신을 새기는 풍습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있었고, 한국전쟁 때에도 있었다. 죽어서 시신으로라도 고향에 돌아와 묻히고 싶다는 염원으로⋯. 오래 전, 소설가 윤흥길은 이규태의 책 『한국인의 의식 구조』를 읽다가 부병자자라는 말을 처음 접하게 됐다. 부병자자라.

그러고 보니, 언뜻 기억나는 이미지가 있었다. 어렸을 적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서 청년들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몸에 문신을 새겼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형들은 며칠 동안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고 동네를 시끄럽게 하다가 군대에 갔다. 이들이 서럽게 불렀던 노래 「밟아도 아리랑」도 함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밟아도 밟아도 죽지만 말아라/ 또다시 꽃피는 봄이 오리라, 로 바꿔 불렀던 그 노래⋯.

“처음에는 부병자자라는 말을 몰랐습니다. 이규태 책을 읽어나가면서 부병자자를 만나게 됐고, 제가 어렸을 때 6·25 때 동네 청년들이 하던 문신 풍습과 연결이 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형들이 왜 저럴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나중에 부병자자의 일환이라는 걸 알게 됐지요. 전쟁터에서 죽더라도 자신의 문신을 보고 시신을 수습해 고향 선산에 묻어주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것이죠. 귀소본능 의지가 담긴 부병자자와 「밟아도 아리랑」이 가장 중요한 모티프가 됐습니다.”

“윤 작가, 큰 작품을 써야 돼요.” 평소 존경해왔던 『토지』의 작가 고 박경리 선생은 생전 그를 만날 때마다 당부했다. 큰 작품이라, 큰 작품⋯. 그는 『토지』 같은 대하소설을 생각하고 3부작 대하소설을 구상했다. 제1부는 이번에 완간한 『문신』이었고, 2부는 1995년 출간된 작품 『낫』이었으며, 3부로 사할린 현지 강제 징용자 이야기를. 구상도, 집필도 너무 어려웠다. 왜 큰 작품을 쓰라고 했는지 궁금해 나중에 슬쩍 물어보았더니, 박 선생의 대답은 이랬다. “큰 작품은 긴 작품이 아니고, 인생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통찰력으로 진실을 바라보는 작품이지.”

박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돌린 그는, 취재가 어려웠던 사할린 부문을 포기하는 등 계획을 축소했다. 그럼에도 간난신고의 연속이었다. 연재하던 잡지가 두 차례나 폐간되었고, 스스로 한동안 집필을 중단하기도 했으며, 막판엔 건강까지 나빠져 쉬었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 사이 25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원로 소설가 윤흥길이 가상의 공간 산서면을 배경으로 대지주 최명배 가족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제 강점기를 살아내는 이야기를 담은 5권짜리 장편소설 『문신』(문학동네)을 들고 돌아왔다. 첫 집필부터 탈고까지 25년이 걸렸고, 5권 원고는 200자 원고자 6500매가 넘었으며, 출간 도서 기준으로도 2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

“얼음 조각을 쪼아 만든 듯 별들만이 뾰족뾰족 섬뜩하게 빛나는 밤이었다. 헐벗은 숲을 연방 닦달질하는 심통 사나운 바람에 실려 맞은편짝 홀머리산의 밤부엉새 울음만이 곧장 골짜기 건너뛰고 들판 가로질러 한달음에 달려오고 있었다.”(제1권, 9쪽)

인간 세상에 대한 악의가 담긴 부엉새 울음으로 이야기를 열어가는 작품은 일제 강점기 말기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 군상을 품고 있다. 조상의 신위를 끔찍이 여기면서도 앞장서서 친일 행보를 이어가는 아버지 최명배, 속정이 깊고 신망이 두터운 그의 아내 관촌댁, 폐결핵에 걸려 세상에 냉소를 품고 사는 장남 부용, 산서 제일의 수재이자 사회주의에 경도된 동생 귀용, 흔들림 없는 기독 신앙으로 아버지에 맞서 집안을 지탱하는 신여성 누나 순금⋯.

어느 날, 귀용은 급진적 사회주의 단체를 이끄는 사촌형 배낙철과 함께 아버지 사랑채에 침입해 재산을 강탈해 사라지고, 강제징용 바람이 산서에 몰아닥치면서 최명배 일가는 물론 산서 전체에 거센 소용돌이가 밀어닥치는데.

“찔리는 사람과 찌르는 사람이 함께 울었다. 속치마 하얀 바탕은 점점 빨갛게 변색하기 시작했다. 한 땀씩 바느질할 적마다 순금은 마음속으로 기도의 말을 꼬박꼬박 붙이곤 했다. 신춘복씨 몸에 기도가 새겨지는 중이었다. 돗바늘 가늘 길 따라 비원과 소망의 기도 소리가 차례로 그의 몸속에 흘러들고 있었다. 우람차고 튼실한 그의 몸 자체가 장문의 절절한 기도문이자 거대한 기도의 탑이 되어가고 있었다.”(제5권, 178쪽)

작품은 야만의 일제 강점기를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통과해 나간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서 시대를 초월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풍자와 해학으로 담아냈다. 이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이루는 귀소본능의 실체를 형상화하려고 시도했다.

서사를 따라 유장한 시대의 풍경과 다양한 인물을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진진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판소리 율조와 리듬감을 문장에서 즐기는 것도 감칠맛 난다. ‘노총 지르다’ ‘허우단심’ ‘문칮문칮’ 같은 풍부한 한국어와 다채로운 욕, 사투리를 마치 문신을 새기듯 새겨간 그의 장인정신이 아련하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같다. 최명배의 말을 보라.

“애시당초 이 세상에 태어날 적부터 지놈들 스사로 짊어지고 나온 팔자소관인 것을 낸들 어쩌란 말인고. 그 누구를 탓허고 마잘 것도 없는 일이여. 그게 다 지놈들 잘못 만난 죄란 말이여. 못난 조상 만난 죄로 후손들이 그러코롬 뜨거운 업보를 치르는 게여.”(1권, 63쪽)

작가가 스스로 “토속 정서를 풍성하게 나타내기 위해 문장도 판소리 율조를 흉내 내게 됐고, 이를 위해서 어순을 바꾸고 조사와 토씨를 많이 생략했다”며 “독자 편에서 가독성을 겨냥한 이전 작품과 달리, 특색을 많이 살리면서 조금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 이유다.

원로 작가 윤흥길은 왜 5권짜리 대하소설 같은 장편소설을 써야 했을까. 그가 소설에서 그린 일제 강점기와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풍경일까. 작가적 여로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윤 작가를 지난 27일 기자간담회와 추가 전화 통화로 만났다. 일문일답 중에는 출판사의 「가이드북」에 담긴 질의응답도 일부 포함돼 있다.

―대하소설 같은, 다섯 권짜리 장편소설을 펴냈는데.

“원래는 열권이 넘는 분량으로 쓰려고 했다. 장편소설 3부작을 기획했는데, 역량 부족과 현실적 제약으로 현재의 분량이 됐다. 많이 축소됐다. 일제 말기 한국인들이 겪은 일들은, 여건만 맞는다면 수십 수백 권을 써도 다 못 쓸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끔 내가 이 정도밖에 못쓰나, 하는 자괴감이 들 때까지 있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쓰려고 노력했다.(특히 2018년 3권까지 쓴 뒤 이제야 완간하게 됐는데) 두 권 쓰는 데 5년 걸려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서 고생을 많이 했다. 심혈관 질환을 비롯해 세 번 정도 심하게 앓았다. 아파서 치료받고 고생하는 것은 괜찮았지만, 그것 때문에 작품이 늦어지는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쓰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무엇이었는가.

“자료를 다양하게 준비해 시작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전라도 사투리나 토착 정서를 재현해내는 작업이 가장 힘들었다. 소설 공간을 가상공간으로 설정했는데, 가상공간을 설정하다보니 사투리도 애매해 졌다. 사투리라는 것은 적당히 냄새를 풍기는 정도로 그쳐야지, 너무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구하다 보면 가독성의 문제도 생겨나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농도를 조절하려고 신경 썼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산서면인데.

“산서면이라는 가상공간을 만들었다. 모델이 되는 곳은 전남 구례군 산동면이다. 산동면의 5만 분의 1 축적 지도를 놓고 지명을 조합해 만들었다. 동네 이름도 실제 동네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만들기도 했다.(왜 가상공간을 설정한 것인지) 윌리엄 포크너는 거의 모든 소설에서 가상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설로 썼다. 미국 남부사회가 보수적이고 창작 행위에 간섭이 심한 사회였기에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 가상공간을 만들었다. 우리나라도 허구의 창작 행위에 대한 이해가 아직은 좀 부족한 편이어서 소설 내용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경우가 많다. 연재소설 때문에 신문사에 쳐들어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기도 했고, 버스 여차장의 행동을 소설로 쓴 작가는 버스운수노조 사람들에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며, 특정 성씨를 건드리면 해당 성씨 사람들이 시비를 걸기도 했다. 시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가 가상공간을 설정하는 것이다.”

―작품 속 신춘복이라는 캐릭터의 의미와 역할은.

“제 단편 작품에는 덩치가 크지만 머리는 조금 모자라고 심성은 굉장히 착한 인물이 주변 인물로 가끔 등장해 왔다. 이번 작품에서 신춘복은 주인공처럼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 어렸을 때 제가 접했던 아기장수 설화의 영향이나 잔상이 남아 있어서 덩치가 크고 힘 좋고 무식하고 순진한 인물 형태로 드러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왜 작품 속 악인들은 정말 나쁜 악인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작품에는 나쁜 놈들이 많이 나온다. 악인들인데, 소설을 읽고 나면 별로 악인같이 느껴지지 않는 모습을 독자들이 가끔 발견하는 것 같다. 악행을 분명히 그려놨는데 왜 악하게 보이지 않는가 하면, 아마 해학성 때문일 것이다. 해학적 수법, 해학적 문장으로 인물의 행동이나 마음을 다루다 보니 해학의 옷이 입혀져 그런 것 같다. 해학의 힘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 마당극이나 탈춤에도 해학과 풍자가 많이 들어가는데, 주로 양반을 욕하고 고발하고 심지어 나랏님까지도 넌지시 욕하는 내용이다. 이것이 분노를 촉발시키는 게 아니라 웃음을 유발하는데, 그것은 해학성 때문이다. 해학성을 많이 살린 작품, 예를 들어서 『완장』 같은 경우 주인공이 분명 못된 인간이지만 읽고 나면 어쩐지 동정이 가고 연민이 가고 재미있는 인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해학의 힘, 해학의 효과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에는 다양하고 구수한 욕들이 많이 나오는데.

“어렸을 때 이웃집 아주머니가 욕쟁이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온갖 욕을 개발해 구사했는데, 아주머니가 하는 욕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름대로 욕도 좀 개발하고 남녀 인물에 따라서 욕도 분류를 했다. 모르는 독자들은 제가 굉장한 욕쟁이고 거친 사람이고 알 수도 있겠지만, 저는 욕을 참 못한다(웃음).”

―왜 일제 강점기를 이야기한 것인가. 모두에서 불친절하고 싶었다고 했다.

“한 나라 한 사회의 문학적 경향이 패션화하는 것에 반대한다. 어느 해 여름 길거리에 나갔더니 대다수 여성들이 새카만 복장을 하고 있더라. 깜짝 놀라서 물었더니, 요즘 까만 패션이 유행한다고 말하더라. 만약 문학적 경향이 한여름에 검정 옷 일색 같은 현상이 된다면, 이것은 나라의 불행이다. 문학 작가의 성향이나 문학관이 다르다면, 백인백색의 소설이 나와야 된다. 어떤 대세를 이루는 흐름이 한 나라의 문학 풍토를 석권하는 것은 잘못이다. 각양각색의 문학 작품이 골고루 나오고 골고루 읽힐 때 그 나라의 문학이 풍요해지고 수확 역시 크게 거둘 수 있다. 현재 한국 소설들은 거대담론 대신 미세담론 쪽으로 많이 흐르면서 파편화된 개인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이제 나이든 노작가에 해당하는 나라도 큰 문제를 크게 다루는 작품을 써서 한국문학의 다양성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저는 젊은 후배 작가들한테 이렇게 써야 된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문학적 경향과 다른 것을 보여줄 나이가 됐다고 생각을 하기에, 후배들은 이렇게 쓰지만, 저는 이렇게 쓰지 않고 저렇게 쓴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일부러 불친절을 띈 것 같다.”

―한민족 정서로 귀소본능을 꼽았는데.

“귀소본능은 저 개인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귀소 본능이 살아 있고, 고향에 찾아가고 죽어서 고향 땅에 묻히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 지금도 설과 추석 양대 명절 때면 집을 떠나 살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오기 위해서 전쟁을 벌인다. 자그마치 2000만 명 가까이 된다는 통계도 있다. 중국도 춘절 때 민족의 대이동을 하지만, 인구 비례로 따진다면 한국이 더한 편이다. 한국인들 심성 속에는 지금도 고향을 향한 귀소본능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 민족의 특색 중 하나를 이룬다. 아마 유목 민족의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유목민들은 생활 근거지를 옮길 때마다 항상 고향을 생각한다. 고향이나 출생지에서 멀어질수록 고향을 생각하는 것이 더 강해진다. 단군신화를 비롯해 서자신화 말자신화가 동아시아에 많은데, 본토나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변방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서자를 설정한다든지 말자를 설정하는 것 같다. 단군신화의 경우 단군 아버지는 환웅인데, 환웅은 천제 환인의 서자다. 우리는 말하자면 서손인 셈이다. 말자신화, 서자신화를 가진 민족일수록 귀소본능이 강하다.”

사범학교 시절, 학생 윤흥길은 학교 공부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스스로 원한 진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경상고 출신이었던 아버지는 여의치 않은 가정 형편을 감안해 졸업하면 곧바로 취업할 수 있는 고교에 진학하길 희망했다. 아버지의 실직과 잦은 이사, 판잣집 생활을 경험한 그는 전주사범학교에서 진학했다.

대신 날마다 운동을 했다. 다양한 책을 읽었다. 많은 책을 읽었다는 점에서 다독이었고,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었다는 점에서 잡독이었다. 물론 그가 제일 많이 읽는 책은 소설이었다. 심지어 수업시간에 교과서 안쪽에 소설책을 감추고 읽다가 들켜서 혼나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 낱말 공부에도 취미를 붙였다. 사전을 끼고 살았다. 집에서는 큰 사전을, 외출할 때에는 뒷주머니에 포켓사전을. 사전 속에서 대여섯 개씩 눈에 들어오는 단어를 공부하고 익혀나갔다.

“윤 선생님, 이것 한 번 읽어보세요.” 당직을 맞교대하게 된 동료 여교사는 그에게 『서울신문』 신년호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신문에는 거액의 상금이 걸렸던 장편소설상 당선작 기사가 한 면 전체에 걸쳐 게재돼 있었다. “아마 뭔가 느끼는 게 있을 거예요.”

1966년 새해 첫날, 숙직을 마친 초등교사 윤흥길은 업무를 맞교대하게 된 여교사로부터 건네받은 신문을 읽었다. 이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서 소설 작법서, 문장법을 다룬 책, 문예사조사, 문학 이론서 등 5권을 샀다. 그날 이후, 그는 책을 읽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가 윤흥길의 원점이었다.

1942년 정읍에서 태어나서 익산에서 자란 윤흥길은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다. 소설집 『황혼의 집』,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 『꿈꾸는 자의 나성』, 『쌀』, 『소라단 가는 길』 등을, 장편소설 『완장』, 『묵시의 바다』, 『에미』, 『옛날의 금잔디』, 『산에는 눈 들에는 비』, 『백치의 달』, 『낫』,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문신』 등을 발표했다.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요산문학상, 21세기문학상, 대산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박경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1995년부터 2008년까지 한서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작품 세계를 설명한다면.

“평론가들은 제 작품 세계를 초기에는 분단 문제를 다룬 소설에서 시작해, 중기에는 개발 시대 산업화 문제를 주로 다루는 소설을 거쳐서, 후기에는 민족 정체성과 관련된 소설을 쓴다고 분석하지만, 저는 그런 구분을 하지 않고 일관되게 창작해 왔다. 사회적 자아를 눈뜨기 시작하던 아홉 살 무렵, 충격적인 6·25전쟁을 겪었다. 이때 돌아가신 친인척도 있고, 피해를 겪은 분도 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트라우마로 남았다. 저는 6·25를 떠나서 소설을 쓰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초기부터 쭉 써왔다. 산업화 문제를 다루는 소설도 6·25로 인한 분단의 비극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어서 써왔다. 지금은 문학으로 통일에 기여하기 위해서 남북으로 갈라지고 나누어지기 전에 우리 민족이 공유했던 정신이나 정서, 관습 등 민족 정체성을 다루는 소설을 쓰고 있다. 저의 창작은 모두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소설이 읽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소설은 인간과 사유의 문제이다. 젊었을 때부터 무슨 이야기를 써야 되는가, 어떤 문제를 다뤄야 되는가를 많이 생각했다. 당시는 인간을 중시하는 순수 문학과 사회를 중시하는 참여문학간 대립이 심각했다. 저는 어느 하나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비유적으로 물과 물고기의 관계로 생각했다. 인간이 물고기이고 사회가 물이라면, 물고기 없는 물도 의미가 없고 물이 없는 물고기 역시 죽을 수밖에 없다. 물 같은 사회와 물고기 같은 인간이 문학 속에서 같은 비중으로 다뤄져야 옳다. 긴 생명력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독자들의 평가를 받아왔다고 생각한다.”

―소설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는 독자들에게 아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독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책을 많이 팔려고 애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모든 작품의 바탕에 사랑을 까는 것이다. 저는 기독교인이고, 기독교의 가장 큰 교리나 가르침이 사랑이다. 모든 작품에 드러나진 않지만, 작품의 바탕에 사랑을 까는 작업은 큰 원칙 중 하나다.(문학 이외에 집필에 영향을 준 것이 있는지) 예술 하는 사람 중 상당수가 다른 분야를 생각하거나 취미 활동을 하는 것 같다. 제 주변에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미술을 좋아하는 분도 있었다. 저는 그런 걸 할 줄 모른다. 다만, 운동을 좋아했고 많이 했다. 어렸을 때부터 다져온 운동과 체력 덕분에 나이 들어서도 계속 집필을 할 수가 있었다. 나이 들어서도 한 자리에 앉아서 장시간 버티면서 소설을 쓰는 원동력이 됐다. 동료 선후배들을 보면 나이 들어 체력이 떨어져서 일찌감치 포기하더라. 제자나 후배들에게 얘기를 한다. 시인은 괜찮지만, 소설가는 꼭 열심히 운동하라고. 체력을 기르고 근육도 키우라고.(무슨 운동을 하는가) 어렸을 때부터 기계 체조를 해왔다. 서울에 살 때 한 번은 아이들과 함께 대모산에 올랐다가 어린 시절 운동을 잘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평행봉에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왼쪽 어깨에서 힘이 쑥 빠지면서 평행봉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떨어지는 순간, 아주 길게 느껴졌고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길게 울리더라. 허리를 다쳐 고생을 했다.”

몇 페이지, 아니 겨우 몇 문장을 읽는 동안에도 몇 번은 놀라고 또 몇 번은 감탄한다. 그 사이 또 몇 번은 스마트폰에서 낱말이나 속담을 찾고. 소란이 걷힌 주말, 그의 장편소설 『문신』 한 권을 집어 들고 읽다가 어떤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 올라온다. 이 대작을 쓰기 위해서 그가 오랜 시간 쏟았을 땀이, 그의 마음이.

그러다가 “지금 다시 새롭게 쓸 장편을 위해서 자료를 모으고 구상 중”이라고 밝힌 기자간담회 모습이 다시 되짚어진다. 약간 붉은 얼굴이었지만, 그는 그날 무척이나 차분했었지. 맞아, 그의 이야기 한 대목도....

“한 번은 담배를 끊으라고 해서 한 삼 년 금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금연하는 동안 소설을 한 편도 쓰지 못했습니다. 써지지가 않더군요.” 순금이처럼 사시나무로 떨진 않지만, 어느 순간 몸 어딘가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아려오기 시작한다. 갈급하게 휴대전화의 통화 버튼을 누른다. 번져가는 송신음과 함께 그의 이야기도 점점 커져온다. “소설을 쓰지 못하니까 너무나 재미없는 세상이 돼 사는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그때 느꼈지요. 저라는 사람은 소설을 써야만, 창작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연명이 가능한 사람이구나, 라고.”

글·사진=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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