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타 히스토리 ①] 고장난 차, 창업자는 직접 찾아가 사과했다

2024. 3. 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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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일본, 미국 자동차를 쏙 빼닮은 최초의 자동차가 공장을 빠져 나왔다. AA로 명명된 최초의 토요타였다. 엔진은 쉐보레의 6기통 OHV 엔진을 분해한 후 역설계한 '리버스 엔지니어링' 제품이었고 외형과 전반적인 설계 구조는 크라이슬러 에어플로우를 쏙 빼닮아 있었다.


 하지만 AA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미국과 일본의 도로 환경을 파악하지 못한 패착이 컸다. 포장 도로 비중이 높은 미국 실정에 맞게 설계된 자동차가 당시로선 노면 환경이 좋지 않던 일본에서 제대로 구동될 리가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G1 트럭도 마찬가지였다. 포드 트럭을 상당 부분 모사했고 부족한 기술력과 맞지 않는 도로 환경 때문에 고장이 잦았다. 이 때 마다 트럭이 고장났다는 보고를 받으면 구매자에게 직접 찾아가 사과하고 문제점을 낱낱이 분석하는 남자가 있었다. 창업자 토요다 기이치로였다. 

 ▲신념과 집착이 만든 토요타
 토요다 기이치로가 연 토요타자동차의 시작은 한 소년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이치로의 아버지 토요다 사키치다. 목수 집안의 장남이었던 그는 가업을 물려받는 일본의 오랜 전통을 거부하고 다른 길을 택한다. 여기엔 그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토요다 G1 방직기와 특허도면

 소년 사키치의 어머니는 밤 늦게까지 베틀을 돌리며 옷감을 짰다. 어머니가 고생하는 걸 본 그는 보다 쓰기 편한 방직기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렇게 밤낮으로 직접 설계도를 그려가며 시행착오를 거듭했고 1894년 23세의 나이에 한 손으로 작동할 수 있는 '토요다식 복제인력직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편리함은 물론이거니와 기존보다 50% 빠르게 직물을 만들 수 있었다. 

 사키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기존 제품의 개선에 개선을 거듭했고 불편한 점이 발견되면 끊임없이 연구해 새로운 방직기를 발명했다. 실제로 그가 1894년부터 1914년까지 개발한 직기만 6개에 달했고 1924년에는 지금의 토요타를 있게 한 'G형 자동직기' 개발에 성공한다. 

(왼쪽부터) 토요다 사키치와 그의 아들 토요다 기이치로

 G형 자동직기 제작에는 그의 아들이었던 토요다 기이치로도 크게 기여했다. 도쿄제국대학교(현 도쿄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기이치로는 아버지와 자동직기 양산을 위해 매달렸고, 이 과정에서 20여개의 특허를 출원한다. 그렇게 토요다 부자의 1926년 '토요다 자동직기 제작소'가 출범했다.

 ▲애국심으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다
 토요다 자동직기 제작소는 안정적인 사업을 영위한다. 기업이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신념을 인정받아 아버지 사키치는 창업 1년만에 히로히토 일왕과 독대까지 한다. 

 부자는 방직기 사업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에도 자동차에 주목했다. 포드와 GM이 1920년대 일본에 진출하며 도로를 뒤덮었기 때문이다. 1929년 미국에 방문한 기이치로도 미국의 자동차 열풍에 충격을 받는다. "수입차가 일본을 점령하게 둘 수 없다"며 자동차 사업을 결심한 순간이다. 


 1930년 일본으로 돌아온 기이치로는 아버지 사키치로부터 100만엔을 넘겨받는다. 오늘날로 환산하면 이는 100억원 이상. 방직기 제조 특허를 영국의 방직회사에 판 대가로 받은 돈이었다. 사키치는 기이치로에게 돈을 넘겨주며 몇 마디를 당부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난다. 

 "나는 평생 방직기를 개발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며 나라에 충성했다."
 "우리 시대엔 방직이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산업이었지만, 이제는 자동차의 시대다."
 "돈을 다 써도 좋으니 좋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으로 나라에 충성을 다해라."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가솔린 엔진 연구를 시작한 기이치로는 방직기 제작소의 일과가 끝나면 작은 창고에서 직원들과 부품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자동차에 대해 아는 게 없다보니 미국차를 사들여 모든 것을 분해하는 것 부터 시작했다. 

 순탄하지는 않았다. 방직기 부품 제조 노하우 덕분에 철 가공 기술은 충분했지만 자동차 부품을 만들고 엔진을 설계하는건 또 다른 문제였다. 가까스로 소형 엔진을 만들어냈지만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거푸집을 걷어내도 만족스러운 형태가 나오지 않았고, 완성됐다 싶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를 잡고나니 출력은 만족스럽지 못했고, 성능을 높이자니 엔진 블록이 깨지기 일쑤였다. 

 ▲"본질적으로 좋은 차가 아니라면 토요타는 의미 없다"
 오랜 산고 끝에 1935년 등장한 AA와 G1 트럭은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미국 자동차들에 비해 저렴했지만 고장이 잦았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토요타는 자동차도 자유롭게 생산하지 못하게 된다. 코로모시(현 토요타시)의 공장이 군수공장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생산되던 라인에서 전투기와 군용트럭이 만들어졌다. 이 때 크게 상심한 기이치로는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도쿄에서 은둔생활을 이어간다. 

 전쟁이 끝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일본 경제는 급격히 어려워졌고 미군정은 일본의 산업을 철저히 통제했다. 더이상 자산이라고 할 게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도 기이치로는 직원들을 해고할 수 없다며 버텼고 결국엔 임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스스로 회사를 떠난다. 

 이후 일본은행의 구제금융으로 회생한 토요타는 전문경영인 이시다 타이조가 맡게 된다. 그는 의리있는 사람이었다. 토요타를 궤도에 올린 후 기이치로에게 사장직을 넘긴 뒤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토요타는 한국전쟁 특수로 군용 트럭을 생산하며 다시 일어섰고, 타이조는 기이치로에게 복귀를 요청한다. 


 하지만 기이치로는 이를 거절했다. 실적을 올리기 위한 자동차가 아닌 본질적으로 좋은 차를 만들어야 한다며 버텼다. "제대로 된 승용차를 만들지 않는다면 토요타는 의미없다"며 지속적인 설득에도 복귀를 거절했다. 

 그는 토요타 임원들의 간곡한 설득에 복귀를 결심하지만 회사에 출근하지는 못했다. 복귀를 앞둔 몇달 전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그렇게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좋은 차를 만들겠다는 기이치로의 도전은 끝났지만 토요타의 도전은 계속된다. [2부에서 계속]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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