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광장] 임진왜란과 군량미 - 군 급식 제도화 관심 필요

오호성 2024. 3. 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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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농업경제학자

임진왜란을 전쟁과 군수(軍需)의 측면에서 보면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대규모 국제전이었다. 당사국은 조선·명·일본의 3국이었지만  돈과 식량, 무기를 댄 다른 나라까지 포함하면 포르투갈·스페인·유구 기타 동남아의 여러 나라가 간접적으로 참가했다.

일본은 전쟁 기간 조총에 필요한 화약 원료인 초석과 탄환 제조에 소요되는 납을 포르투갈, 필리핀 등지에서 구입했다. 명나라도 참전 군인들에게 봉급으로 지급하는 은을 스페인을 통해 구했고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온 불랑기포를 사들여 평양성 전투에서 큰 효과를 보았다.

명과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시장제도가 발달해 은을 화폐로 사용했다. 이 두 나라에는 미곡시장·포목시장·무기시장 등 전문 시장이 있었고 상인들이 군복과 군화를 만들어 팔았다. 명과 일본은 군량과 무기 등의 상당량을 시장에서 조달했다. 조선에 파견된 명군과 일본군에는 종군 상인들이 있었다. 명의 종군 상인들은 요동에서 수백 마리의 당나귀를 세내어 부대에서 주지 않는 술과 고기, 군복과 기타 물품을 가져다 팔았다. 일본군에도 종군 상인이 따라다녔다. 울산성 전투 때 가등청정을 따라다니는 상인들이 군량이 떨어져 다 죽게 된 왜군들에게 쌀과 물을 비싸게 팔아 말썽이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 경제는 물물교환 단계에 있었다. 성종 원년 전라도에 흉년이 들자 농민들이 유무상통을 위해 처음 장시(場市)가 생겼다. 장시는 빠른 속도로 각지로 퍼졌으나 이것은 농본주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관에서 심하게 단속했다. 임진왜란 때에 장시가 있었으나 전쟁 중이라 활성화되지 못했다. 명과 일본과 달리 군량을 사들일 수 있는 미곡시장은 없었다.

조·명·일 3국은 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해 7년간 싸웠다. 전쟁은 조명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전투에서는 분명한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명과 일본은 각각 자국에서 많은 군량을 가져왔다. 명은 압록강변 의주에, 일본은 부산포와 낙동강 하구에 군량을 적치했다. 조선은 산과 하천이 많아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없었다. 조선은 예부터 무거운 물건은 수운과 해운을 통해 운반했다. 임진왜란기 명과 일본은 조선 백성을 시켜 등짐으로 군량을 운송했다. 일본은 점령지 행정을 통해 군량을 조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해로를 이용한 병참도 계획했으나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해 이것도 실패했다.

인력에 의한 군량 수송 속도는 느리고 중간의 손실도 컸다. 임진란 초기에는 혹한기 전투가 많았기에 군량의 수송이 더욱 느렸다. 또 부대의 이동 속도에 군량 보급이 따라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조선군·명군·왜군 모두 굶주림에 허덕여 ‘아사자’와 ‘동사자’가 속출했다. 왜군이 평양성과 함경도에서 패배한 원인은 군량 부족이었다.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후퇴한 왜군이 한양에 집결했다가 남해안으로 철수한 원인도 군량의 보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지고 난 후 평양으로 후퇴한 것도 군량의 지속적 보급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군도 정부에서 계속 대주는 군량이 없기에 양식이 떨어지면 도망병이 되거나 부대를 해산했다.

조선은 호조가 군량을 공급하는 공식기관이지만 명군을 위한 군량 확보와 수송에 온 역량을 집중해 아군을 보살필 겨를이 없었다. 당시 아군의 주력은 각 도의 관찰사 또는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가 이끄는 지방군이었다. 군량은 각 도의 관찰사가 책임지고 자기 도의 부대가 있는 곳으로 해당 도민을 동원해 등짐으로 보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자기 도의 부대가 주둔한 경상도 남해안 등의 먼 거리까지 수송은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임란 기간 중 일선의 조선 장병들에게 안정적으로 군량을 공급해 주는 곳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승패와 군량의 문제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우리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한다면 민족식량의 자급률과 군대급식의 제도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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