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미의감성엽서] 바튼 아카데미

2024. 3. 5.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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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비가 몽우처럼 내리는 오후.

친구 셋이서 영화를 보러 갔다.

늘 혼자 다니던 영화관을 친구들과 함께 간다는 게 살랑살랑 설레고, 기분 좋았다.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고,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도심의 어스름을 건너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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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비가 몽우처럼 내리는 오후. 친구 셋이서 영화를 보러 갔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바튼 아카데미’. 늘 혼자 다니던 영화관을 친구들과 함께 간다는 게 살랑살랑 설레고, 기분 좋았다.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고,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도심의 어스름을 건너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영화 속에도 함박눈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1970년대. 눈 덮인 명문 사립고등학교 바튼 아카데미가 동화 속 그림처럼 화면을 채우고, 그곳에서 크리스마스 방학을 맞은 십대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싱그럽고, 귀엽고, 반항적이고, 호기심 가득한 십대들이 눈을 반짝이며 하나둘 부모님을 따라 집으로, 휴가지로 떠나고…. 재혼한 엄마의 신혼여행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혼자 학교에 남게 된 문제아, 앵그스 털리(도미닉 세사). 그리고 학생들에게 점수 안 주기로 악명 높은 고지식한 역사 선생님, 폴 허넘(폴 지아마티). 베트남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학교 식당 주방장 아줌마, 메리(더바인 조이 랜돌프). 이렇게 너무나 다른 우울한 사람들 셋이 예기치 않게 방학 동안 학교에 남게 되었다. 영화는 이들이 동고동락 중 티격태격, 옥신각신, 우왕좌왕, 토닥토닥, 버럭버럭, 콩닥콩닥하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여는 과정을 그린 코믹 휴먼 드라마다.
세대를 초월해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 안에 말 못할 ‘깊은 신음(트라우마)’ 같은 게 있는데 그걸 누군가가 아주 잘 터트려주면 그 순간, 자신과 타인에게서 무한정 자유로워진다는 걸, 인간관계 풀기에 강한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너무나도 잘 아는 듯 보였다. 후반부로 갈수록 세 사람의 고질적 우울증이 조금씩 걷히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주체가 되어 꼼짝 않던 자신의 인생을 움직여 나가는 걸 보면.
하여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유쾌했다. 핑퐁 경기하듯 주인공 세 명이 주고받는 대사도 너무 재미있고, 표정, 제스처도 적나라하면서도 우아하고, 문제아 털리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 자꾸 귀를 기울이게 했다. 영화음악 선정도 좋고, 진짜 1970년대에 찍은 영화로 착각될 만큼 오래된 그림엽서 같은 영상미도 좋았다. 마지막 부분에서 학생을 위해 해임까지 불사한 폴 선생이 교장실에 있던 아주 비싼 루이 13세 코냑을 훔쳐 한 모금 마시고는 신나게 뱉어내는 장면은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압권이었다. 더바인 조이 랜돌프와 도미닉 세사의 연기도 정말 고급스럽고 우아했지만, 폴 지아마티라는 이 배우, 알렉산더 페인 감독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을까? 싶을 정도로 스크린 안을 짜릿짜릿, 펄펄 날아다녔다. 역시 서로 궁합이 잘 맞는 감독과 배우라는 게 있구나, 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영화 줄거리는 단순한, 뻔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영화를 풀어가는 남다른 방식(로드 무비식)과 세 배우의 멋진 앙상블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내게는 만점인 영화였다. 게다가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 멋진 친구 둘과 함께 즐겁게 영화를 보았으니!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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