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늘 새싹 솟으니 고라니 ‘횡재’…보이는 것마다 봄이다

한겨레 2024. 3. 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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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생물학자 이강운의 ‘24절기 생물 노트’
경칩(驚蟄), 산·들·물 보이는 것마다 봄이 깃들다
경칩은 개구리라는 특정한 생물이 아니라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땅속에서 깨어나고 초목의 싹이 돋기 시작하는 시기를 말한다. 사진은 큰산개구리.

에너지가 조금씩 땅속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올라오더니 얼었던 땅을 녹이고 산마늘이 빛을 향해 새싹을 쑥 밀어 올렸다. 그러나 미처 잎을 다 펴기도 전에 그동안 굶주렸던 고라니가 산마늘 새싹을 모두 잘라먹었다. 그동안 두꺼운 눈에 뿌리나 마른 풀까지 묻혀버려 먹을 것이 없던 절박한 상황에서 제법 두툼하게 올라와 먹을만한 산마늘 새싹은 그야말로 횡재! 산마늘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배고픔을 잊기에는 제격이다.

산마늘의 다른 이름인 명이(命荑)나물은 식량이 부족했던 보릿고개 시기에 이 나물로 생명을 이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산마늘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구황식물일 뿐 아니라 알싸한 마늘 향 덕분에 요즘은 쌈 채소나 샐러드 장아찌 등 기호식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게다가 혈관 속 콜레스테롤 수치를 떨어뜨리고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는 효과도 밝혀졌으니 의약원료로 가치도 증명한 셈이다. 식용으로, 약용으로 사람들에게 활용되는 식물이면서 굶주린 산속 고라니나 야생동물의 목숨을 이어주는 선한 식량이다.

산마늘.
고라니에게 새싹을 잘린 산마늘.

입춘, 우수를 지나 오늘(5일)은 경칩. 겨울잠을 자던 생물이 그해의 요란한 첫 번째 번개 천둥소리에 감전된 듯 깜짝 놀라 칩거하던 땅에서 나오는 날이다. 흔히들 경칩을 개구리가 입 떨어진 날이라 하지만 개구리의 생태와는 사뭇 차이가 난다. 물속이나 산에서 월동하던 큰산개구리나 북방산개구리는 우수 전후로 겨울잠에서 이미 깨어났고, 보통 개구리로 불리는 참개구리는 4월에서 5월 초에 땅속 월동지로부터 겨울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므로 경칩은 개구리라는 특정한 생물이 아니라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땅속에서 깨어나고 초목의 싹이 돋기 시작하는 시기를 말한다.

참개구리.

경칩 즈음은 계절이 바뀌며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커 사람들도 건강을 챙겨야 하겠지만 월동하던 다른 생물에게도 위험한 시기이다. 봄이라고 겨울잠에서 깨었다가 ‘꽃샘추위’라는 변덕스러운 날씨에 자칫 낭패를 볼 수 있는 계절이다. 나올지 말지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꽃샘추위는 일시적으로 기온이 낮아지는 기상 현상이지만 영하 10℃ 이하의 강한 추위가 계속되면 단지 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아니라 월동에서 깨어난 모든 생물의 목숨을 위협하는 살생의 추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온도가 오르내리며 추웠다 따뜻했다 널을 뛰지만, 기온은 날마다 오르며 마침내 봄으로 향하고 있다. 아직 가지뿐이지만 이제 막 꽃봉오리가 터지려는 생강나무가 가장 일찍 봄을 맞이한다. 생강나무는 생강과는 전혀 다른 계통의 식물이지만 줄기나 잎에 상처를 내면 진한 향을 발산하는데 그 냄새가 마치 생강 같아서 얻게 된 이름이다. 한반도 자생식물로 '봄의 전령사' 역할을 한다.

생강나무 꽃봉오리.

생강의 매운맛이나 쓴맛, 떫은맛을 싫어할 것 같지만 어린 생강나무 잎의 강한 맛을 즐기는 놈들도 의외로 많다. 흰띠왕가지나방이나 녹색집명나방, 넓은띠큰가지나방 애벌레는 특별히 생강나무 잎만 먹는다. 개인적으로는 참 미안한 식물이다. 연구소에 방문하는 교육생들에게 생강나무로 불리는 까닭을 설명하기 위해 잎을 따 비비고, 줄기를 잘라 문질러서 생강 냄새를 맡게 해주어야 하니 늘 상처를 준다.

흰띠왕가지나방 애벌레.
넓은띠큰가지나방 애벌레.

앞은 남한강 원류의 청정한 계곡물이 흐르고 바람을 막는 산이 뒤를 지키는 배산임수에 연구소가 위치하고 있다. 최근 흥행 중인 영화 ‘파묘’에 등장하는 ‘풍수’는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 말로 바람과 물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여 지리적인 조건에 맞춰 해석한다. 27년 전 곤충에게 최적의 서식처를 물색하다가 물과 바람이 좋아 선택한 이곳은 곤충을 포함한 많은 생물들에게 과연 명당이다. 외부 세계와는 거의 단절된 너무 깊은 산속이라 사람에게는 고난의 땅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오후 2시, 따스한 햇살이 막 퍼지기 시작하면 산책을 나간다. 봄빛으로 북적대는 산과 들을 지나자 계곡이 봄을 알린다. 꽁꽁 얼었던 얼음이 녹아 얼음에 묻혔던 물소리가 점점 커지는 걸 보니 계곡에도 봄은 와 있다.

물살이 굽이도는 구간마다 돌이 쌓여 강물이 얕아진 여울(유속이 빠른 구간)과 웅덩이처럼 깊게 파인 소(유속이 느린 구간)가 번갈아 나타난다. 여울에선 많은 산소가 발생하고, 소에 이르면 물은 유속을 낮춰 침전물을 가라앉힌다. 소는 물을 정화시키기도 하지만 생물들의 귀중한 서식처가 된다. 족대질 한 번에 민물고기와 물속 곤충이 수두룩 올라온다.

좀잠자리 애벌레.
버들치.

계곡의 얼음이 녹고 비가 내려 물이 불기 시작하자 월동 중이던 좀잠자리 알이 깨어난다. 입에서 나오는 실로 물속 바닥에 있는 나뭇조각, 모래, 가지나 돌을 이용해 집을 만들어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날도래 애벌레와 돌 밑이나 나뭇잎 밑에서 사는 강도래 애벌레도 관찰했다. 강도래 애벌레는 날도래 애벌레나 하루살이 애벌레 등 작은 곤충을 먹고 산다.

굴뚝날도래 애벌레.
점등그물강도래 애벌레.
강하루살이 애벌레.

하루밖에 못 살 것 같은 하루살이 애벌레도 봄을 맞아 물속에서 한창 활동 중이다. 1급수 계곡에서 사는 작은 수서곤충과 이들을 잡아먹는 버들치까지, 모두 바삐 움직이고 있다.

따뜻한 봄볕과 부드러운 봄바람이 밀려와 산과 들, 물 어디에나 스며들고 있다. 보이는 것마다 봄이다.

글·사진 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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