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재즈’ 전설, 돌아보면 언제나 그가 있었다

한겨레 2024. 3. 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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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한국 재즈의 대부’ 이판근 선생을 기리며
한국 재즈 1세대 이론가 이판근 선생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 장면. 남무성 평론가 제공

“2010년 9월, 이판근의 연구실은 철거되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뜬 한줄 자막이다. 한국 재즈 1세대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브라보! 재즈 라이프’(2010)는 강제 철거 직전에 놓인 이판근의 집(연구실)에서 시작한다. 뉴타운 개발로 사라져 간 서울 은평구의 기자촌, 모두 떠나고 폐허가 되다시피 한 그곳에 홀로 남은 이판근 선생은 전기난로 하나로 겨울을 버티고 있었다.

색소폰·기타 연주자이자 작·편곡자
민요x재즈 연구한 화성이론의 대가
33년간 이정식·윤희정 등 3천명 교습
김광민 “버클리보다 더 쉽게 가르쳐”
조윤성 “새 사운드 향한 굉장한 출발”

2010년 철거 위기 ‘재즈의 산실’ 담은
다큐 본 뒤 “좀 더 일찍 만들지 그랬어”

이판근은 한국 재즈의 대부로 통하는 인물로, 연주자이자 작·편곡자이며 화성 이론의 대가다. 1934년생으로 중학생 시절부터 레코드판을 듣고 악보로 옮겨 그리는 일에 빠져들었고, 마산상고 밴드부에서 알토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배웠다. 서울대 상대에 진학하고 나서는 미8군 밤무대 연주 아르바이트를 했다. 처음에는 색소폰을 연주하다 나중에 베이스 기타로 바꿨다. 연구와 이론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게 된 건 1985년부터다. 특히 우리 민요와 재즈를 접목하는 연구로 탄생한 이판근 편곡의 ‘밀양아리랑’은 한국 재즈 1세대 공연 때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레퍼토리다.

한국 재즈 1세대 이론가 이판근 선생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 장면. 남무성 평론가 제공

이판근 가족의 생활 공간이자 연구실이었던 은평구 진관외동의 2층 집은 상가가 다닥다닥 이어져 있는 좁은 건물이었다. 1층에서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가 문방구를 했고, 선생은 2층에서 개인교습을 했다. 1977년부터 2010년 철거될 때까지 33년을 살았는데, 그의 집에서 잠깐이나마 배운 음악인들이 3천명에 달한다.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 재즈 가수 윤희정을 비롯해 사랑과 평화, 봄여름가을겨울, 빛과 소금, 박학기, 심수봉, 인순이, 윤수일 등 대중가수를 망라한다. 기자촌 낡은 상가 건물에 유명 가수와 연예인들이 과외 수업을 받으러 들락거렸으니 그 자체로 전설적이다.

미국 버클리 음대 유학파이자 동덕여대 실용음악과 교수인 김광민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분이 그 시절에 그걸 어떻게 가르쳤는지 모르겠어요. 버클리 미국 책보다 이판근 선생이 정리한 걸 보는 게 더 쉬워요. 어마어마한 사람이고 정말 훌륭한 분이에요.” 재즈 피아니스트 조윤성은 꼬맹이 시절 드러머였던 아버지(조상국) 손에 이끌려 선생에게 재즈를 배웠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뭔가 새로운 사운드(재즈)를 향한 굉장한 출발선이 되었어요.”

양동문 작가가 그린 이판근 선생 그림. 양동문 작가 제공

내가 선생을 실제로 뵌 건 고등학생 때였다. 기자촌 재즈 학당에 배우러 다니던 친구가 있어 함께 연주자 이판근의 공연을 보러 갔다. 고등학생 출입금지인 클럽 무대였지만 제자였던 친구 덕분에 귀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선생이 연주를 접고 연구만 하려던 시기여서 그 이후로 다시 연주를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브라보! 재즈 라이프’의 감독으로 기자촌을 찾아갔을 때 선생의 딸 이민영(피아니스트)이 아버지 연구실을 보존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서울시와 은평구청을 상대로 재판이 이어졌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저 당장의 현실과 이판근의 음악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브라보! 재즈 라이프’가 2010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본선작으로 선정되자 선생은 한국 재즈 1세대 동료들과 함께 제천까지 내려와 회식 자리를 가졌다. 한국 재즈 1세대 밴드가 영화제 개막식 무대에서 당당하게 공연을 펼치고 난 뒤였다. 소주잔과 막걸릿잔이 돌던 중 갑자기 선생이 내게 버럭 화를 냈다. “이런 걸 좀 더 일찍 만들지 그랬어!” “네?” 내가 얼어붙은 표정을 하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행복한 밤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 시사회에 참석한 이판근 선생(오른쪽에서 두번째)과 남무성 감독(왼쪽에서 두번째). 남무성 평론가 제공

제천의 밤 이후 영화 일반 상영을 위해 막바지 작업을 하던 중 이판근 연구실이 철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자촌을 떠난 이판근과 이민영 부녀는 경기 고양 일산의 작은 아파트로 들어갔다. 한국 재즈의 산실이었던 기자촌의 전설이 그렇게 사라져 갔다.

그리고 14년이 흐른 지난 3일 선생의 부고장을 받았다. 향년 90. 그 순간 머릿속에 거대한 굉음 같은 소리를 느꼈다. 이판근의 죽음은 치열했던 우리 대중음악사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장면이다. 그는 이 세상이 필요로 했던 이론가였다. 그의 정신과 에너지가 전부 소진된 지금, 한국 재즈계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남무성/‘브라보! 재즈 라이프’ 감독·재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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