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진계 대가 구본창 40년 작업의 빛과 그늘

노형석 기자 2024. 3. 5.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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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구본창 회고전 현장
구본창 작가가 1995~96년 작업한 대작인 ‘태초에 10-3’가 1층 전시장 한가운데 공간에 내걸려있다. 바느질해 기워 붙인 인화지에 손과 발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만드는 사진(메이킹포토)’에 집중적으로 몰입하던 40대 장년 시절의 활력을 드러낸다. 노형석 기자

30년 넘게 사진판의 정점에서 군림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일감은 널려 있었다. 작가가 주시하는 대상들은 세간의 관심을 모으는 작품과 트렌드의 주인공이 되었다.

한국 사진계에서 작가 구본창(71)씨의 존재는 가히 군주에 비유할 수 있다. 1980~85년 독일 함부르크 조형예술대에서 독일의 즉물∙주관주의 사진과 표현주의 미술을 섭렵하고 귀국한 뒤로 구 작가는 한국의 현대사진사를 열어 젖힌 총아가 되었다. 1988년 작가이자 기획자로 참여해 당시 실세 미술관이던 워커힐미술관의 중역과 담판하면서 만들어낸 ‘사진 새시좌(視座)’전은 그의 출세작으로 30년 넘게 권위를 굳히는 기틀을 닦았다. 필름을 긁거나 콜라주하면서 판화·회화의 기법을 끌어들인 유학파 중심 작가 8명의 ‘만드는 사진’(making photo)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면서 한국 사진계를 본격적으로 현대미술의 본류에 합류시키는 계기를 구축했다.

전시장 1층 안쪽 공간의 슬라이드룸. 1979~85년 유럽에서 자신의 이방인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에 몰두하던 청년시절의 작가 모습들을 보여준다. 노형석 기자

리얼리즘 다큐 사진과 사진관 살롱의 예술 사진으로 각개 분립하던 국내 사진판에 피사체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물성의 표현에 주력하는 이른바 사물에 바탕한 오브제 미학으로 작가주의 사진의 새 바람을 일으킨 주역이 바로 그였다. 이후 사진계의 담론과 트렌드를 이끄는 주도권은 기존 리얼리즘 다큐 기록사진을 찍던 국내파 작가들로부터 구 작가로 넘어간다. 그는 이후 서울예대, 경일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국 휴스턴 포토페스토의 한국사진가 기획전(2000), 대구사진비엔날레 2회 총감독을 역임하는 등 기획자와 행정가로 사진판을 종횡무진했다. 1980년대 그의 이름을 한국 사진계에 먼저 각인시킨 ‘긴 오후의 미행’을 비롯해 ‘시선’ ‘아, 대한민국’ ‘태초에’ ‘숨’ ‘시간의 자리’ ‘백자’ 등을 거쳐 최근 신라 금관이 줄줄이 등장하는 ‘황금’ 까지 무려 50개를 넘는 사진 연작들까지 쏟아내는 초인적인 생산력을 보여주었다.

1층 전시장 들머리에서 만나게 되는 그의 성장기 수집 포스터와 습작품들. 내걸린 로트렉의 포스터와 클림트의 그림 이미지들은 모두 구 작가가 도판을 보고 옮겨 그린 것들이라고 한다. 노형석 기자

지난해 12월부터 서울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1, 2층에서 열리고 있는 작가의 회고전인 ‘구본창의 항해’(이달 10일까지)에서 그가 여지껏 쏟아낸 거의 모든 작업적 생산물과 수집품들을 만나게 된다. 국내 사진가로는 역대 최대 규모인 작품 500여점과 관련 자료 600여점을 망라한 전시규모를 통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방대한 컬렉션과 아카이브를 구축한 그의 작가적 역량을 드러내는 자리다.

이 미술관에서도 2층까지 모두 한 작가의 컬렉션으로 전시를 채운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탐식가로서 취향과 성실하고 꾸준한 작업 이력이 뒷받침된 독보적인 사진 아카이브 컬렉션을 보여준다. 학창시절의 드로잉 사진 습작과 각종 이미지 수집물들을 필두로, 독일 유학 과정, 80년대 중반 귀국 뒤 ‘한국현대사진의 새시좌’라는 기획전을 꾸리면서 2000년대까지 국내 사진계에 새로운 자극과 흐름을 일으킨 여러 문제작들을 망라한다. 이후 부친의 죽음을 계기로 회벽 공간, 탈, 백자 등의 사물 자체와의 물성적 교감에 주목한 근작 등 다채로운 작가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다.

1층 전시장 들머리에서 만나게 되는 그의 성장기 수집 포스터와 습작품들부터 혀를 내두르게 된다. 내걸린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포스터와 클림트의 그림 이미지들은 모두 구 작가가 도판을 보고 옮겨 그린 것들이며, 작가가 초창기 국외 여행을 할 때부터 수집한 기내식의 설탕 봉지와 나무 부재의 부스러기까지 수집한 것들이 차분하게 쟁여져 있다.

2층 전시장 말미에는 ‘황금’ 연작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신라 금관 사진들이 등장한다. 왼쪽부터 천마총, 금령총, 금관총 금관이다. 여느 문화재 사진가의 작업들과 달리 황금이란 소재의 물성을 고려해 배경도 황금색으로 갈무리해놓고 작업을 진행했다. 노형석 기자

그의 정물작업과 주관주의적인 연출사진에 큰 영향을 미친 80년대 초반의 독일 작업들도 유럽 각지의 도시를 방랑하는 그의 모습을 찍은 유럽 연작과 여러 디자인 작업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한국에 귀국해 88년 올림픽 전후 불온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부실한 틈새가 보이는 서울의 분위기를 담아낸 ‘긴 오후의 미행’ ‘시선’ 연작들은 그 시절 시대정신이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포착한 일상의 풍경들과 절실하고 적실하게 어울린 역작들이다.

90년대 중반부의 ‘태초에’ 연작들은 바느질해 기워붙인 인화지에 손과 발, 활개를 편 남성 누드의 상반신 등을 포착한 작품으로 ‘만드는 사진(메이킹포토)’에 집중적으로 몰입하던 40대 장년 시절의 활력을 드러낸다.

전시 자체는 80년대부터 2000년대의 백자, 황금, 익명자 연작까지 작가의 시기별 주요 작품들을 모은 개인전들이 군집된 형식을 취한다. 초창기부터 말미 80년대 오브제 탐색으로 돌아간 작업까지 한 작가의 개인적인 일생이 그대로 컬렉션과 아카이브로 집약된, 아카이브 측면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꼼꼼하게 기획된 전시회라고 할 수 있다.

2층 전시장 들머리 공간에 나온 백자연작들의 일부인 ‘백자 OSK 22-2’(2005).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소장된 조선시대의 백자 각병과 편병을 직접 찍었다. 백자로 대표되는 그의 도자기 연작들은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찍듯이 도자 기물의 물성과 내력에 대한 사전 연구와 교감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 특징이다. 노형석 기자

하지만 한국 사진가들이 작업한 거의 모든 것을 건드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보이듯이, 다방면에서 한국 사진의 지형을 형성하고 현대사진사의 역사를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하게 파악되지만, 정작 그만이 추구하고 성취했던 특징적인 자기 언어가 무엇인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의 형식주의 사진은 서구의 잔영에서 온전히 벗어나 자기 세계를 획득했다고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을까. 서랍장을 잘 정리한 듯한 그의 아카이브들은 역동성과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기보다 이제 70대 초반인 작가가 거장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강박적인 규모로 강조하려 한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지금 구본창 사진 컬렉션이 지닌 결정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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