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두 글자… 선거철마다 ‘희망 고문’ [심층기획-22대 총선 공약 점검 ② 부동산정책 공약 남발]

채명준 2024. 3. 5.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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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재건축 규제 해제 ‘봇물’… 선거 뒤 흐지부지되기도
1·10대책 이후 후속 대책 ‘제자리’
21대 국회 처리 불발 땐 자동 폐기
통과돼도 사업 불가능해질 수도
“예산 부족한 정부, 민자 중심 추진”
전문가 “결국 국민들이 감당” 경고
‘선심 공약’ 검증 강화 필요 목소리
“재개발·재건축을 추진하려면 안전진단부터 받고 그 위험성을 인정받아야 사업을 시작할 수 있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이 위험해지기를 바라는 그런 웃지 못할 상황이 일어난다.”

지난해 12월 서울 중랑구 중화2동 ‘모아타운’ 현장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한 말이다. 이 발언 이후 윤석열정부 부동산·국토정책이 봇물 터지듯 발표됐다.

재개발·재건축 ‘안전진단 면제’, 비수도권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GB)·군사시설보호구역 규제 해제 등의 개발정책이다. 공교롭게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4월10일, 4·10총선)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몰린 이런 정책 발표가 유권자 ‘표심’을 노린 것 아니냐는 반발이 야당을 중심으로 제기됐다.

지난 2023년 12월 21일 윤석열 대통령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왼쪽 두 번째)이 서울 중랑구 모아타운 사업지를 방문해 오세훈 서울시장(오른쪽)의 사업 설명을 듣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주민 간담회에서 “재개발·재건축 착수 기준을 (위험성에서) 노후성으로 완전히 바꿔야 할 것 같다”며 규제 완화를 시사했다. 이재문 기자
하지만 정치적 이익을 따지는 데엔 야당도 뒤지지 않는 모습이다. 더불어민주당은 투기 수요를 이유로 완강히 반대해 왔던 ‘주택법 개정안’에 전격 찬성표를 던지며 정부·여당발(發) 부동산 정책 대결에 가세했다. 윤석열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1기 신도시 재건축에 대한 찬성 방침도 지역구 야당 의원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사실이다.

문제는 총선 뒤다. 개발 공약 상당수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 확보 방안이나 법률적 뒷받침이 담보되지 않은 ‘설익은’ 정책들이라 자칫 선거 뒤 흐지부지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윤 대통령의 두 번째 민생토론회 ‘국민이 바라는 주택’ 직후 국토교통부가 내놓은 ‘1·10 부동산 대책’이 그런 경우 중 하나다. 대책의 핵심은 30년 이상 된 아파트에 대한 안전진단을 면제해 주는 이른바 ‘재건축 패스트트랙’ 제도의 도입이다.

현재는 안전진단에서 ‘D’등급 이하를 받고 행정관청의 승인까지 받아야 재건축추진위원회를 설립할 수 있으나, 이를 생략하고 재건축추진위 설립을 먼저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재건축 사업기간이 3년가량 단축될 전망이다.

수도권 1기 신도시(경기 분당, 일산, 평촌, 중동, 산본) 재건축 방안도 이날 발표됐다. 2027년 착공해 2030년 재입주를 시작하는 타임라인이 제시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 10일 준공된 지 33년 된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의 백송마을 5단지를 방문해 아파트 지하주차장을 살펴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노후화로 인한 생활 불편이 심각한 수준”이라며 30년 이상 노후화된 주택에 대한 재개발·재건축 규제 해소를 약속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대책 후속 법안처리는 언제?

1·10대책은 발표 이후 후속 대책의 4일 현재 진도율이 ‘제로’(0)다. 정부가 2월 중 관련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지만 그러지 못해서다.

안전진단 없이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선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시정비법) 개정이 선행돼야 하는 등 지난달 나온 1·10대책의 79개 세부 과제 중 관련 법을 개정하거나 시행령을 고쳐야 하는 과제가 총 46개에 달한다. 

국토부는 이달 안에 도시정비법 개정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국회와 최대한 협의를 하겠다는 입장이지만, 4·10총선을 한 달여 남긴 국회에서 이 법안이 처리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서울 양천구 목동 일대 아파트 모습. 연합뉴스
법안이 통과되지 않은 채 5월30일 정기국회가 마무리되면 법안은 자동 폐기된다. 이 경우 정부는 다음 국회에서 다시 법안을 발의해 통과시켜야만 한다.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문제는 또 있다. 재개발·재건축 패스트트랙을 통해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추진위를 설립했지만 이후에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못할 경우 돈과 시간만 허비하고 막상 사업 시행이 불가능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아울러 여기저기서 조합이 우후죽순 발생함으로 인해 조합장 및 조합원 임금 등 쓸데없는 비용이 증가할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1기 신도시 재건축 사업에 뛰어들 건설사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에 기인한 불확실성 확산으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현실에서 높은 공사비 등을 감당하며 수익성이 낮은 재건축 사업에 매달릴 조합도 없다는 게 업계의 판단이다.

한 대형건설사 관계자는 “5층짜리를 20∼30층으로 올리니까 사업성이 컸지만, 분당이나 일산의 경우 20층짜리에서 기껏해야 10층 더 올리는 것인데 사업성이 없다. 게다가 공사비도 너무 올라서 마진이 안 남는다”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 모습. 뉴시스
◆예산 부족한 정부…결국 국민 주머니 턴다

이후 2월21일 열린 민생토론회에서는 20년 만의 최대 규모 비수도권 GB 규제 혁신 카드가 나왔다. 5일 뒤 열린 토론회에서는 역대 최대 규모인 339㎢ 규모의 군사시설보호구역 해제안이 발표됐다.

또다시 야당은 총선용 선심성 정책이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이들 방안은 토지 용도가 변경되면서 해당 토지뿐 아니라 인근 토지 가격도 뛸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시장의 우려를 사고 있다. 특히 군사시설보호구역의 경우 서울 강남, 서초, 송파구 같은 인기 지역이 포함돼 규제 해제 시 그 파급효과가 어떤 파장을 낳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경제학)는 “이처럼 개발 호재가 여기저기 생기면 전국이 투기장이 될 것이며, 이미 관련 지역에서는 투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신 교수는 또 “특히 현재 정부는 지난해 세수결손에서 볼 수 있듯이 발표한 개발 정책들을 실행할 예산이 부족할 것”이라며 “결국 민간자본 투자 중심으로 개발이 흘러갈 것이고, 그로 인해 비싸진 인프라 사용료는 고스란히 이를 이용하는 사용자, 즉 국민이 떠안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해 한국의 세수 결손액은 56조원으로 역대 최대액 기록을 세웠다. 법인세와 소득세가 2023년도 예산에 비해 각각 23.4%, 12.2% 덜 걷혀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국토균형발전’인데 이는 최근 쏟아져 나온 군사보호시설구역 해제,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등 각종 개발 정책들과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며 “국가의 명운이 걸린 중장기적 계획이 총선용 선심성 공약 때문에 차질을 빚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지적했다.

권대중 서강대 교수(부동산학)는 “재개발·재건축이든 GTX든 다 좋은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이라며 “무작정 계획을 발표하고 실행으로 옮기지 않으면 국민들의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권 교수는 “이게 5년, 10년 걸리는 단기적인 계획이 아니라 기간 약속은 지킬 수 없다고 본다”면서도 “정부가 내놓은 정책 중 실효성 있는 정책은 추진하고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정책들은 정권 간 연속성을 갖고 시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야 선심공약…검증 강화해야

정부·여당의 선심행정을 견제하고 제지해야 할 야당의 행태도 미덥지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야당도 ‘총선용 표퓰리즘’ 행보 혐의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뜻이다.

지난달 27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1년 넘게 계류 중이던 분양가상한제 아파트에 대한 실거주 의무를 3년간 유예하는 주택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해당 법안은 실거주 의무가 시작되는 시점을 ‘최초 입주 가능일’에서 ‘최초 입주 후 3년 이내’로 완화하는 것이 골자다. 

정부는 지난해 1·3 부동산 대책에서 실거주 의무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었지만 야당의 반대에 가로막혀 왔다. 그러던 야당이 4·10총선을 석 달여 앞두고 돌연 해당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전세를 끼고 집을 매수하는 ‘갭투자’로 인해 투기 수요가 활개칠 수 있다는 것이 그동안 야당이 주택법 개정을 반대해왔던 이유다. 

하지만 갭투자 가능성은 이전보다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올해 들어 서울과 전국 주요 도시의 전셋값이 본격적으로 뜀박질을 시작하면서 매매가와 전세가의 차가 줄어들어 갭투자 여건이 좋아졌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 다시 ‘깡통주택’ 양산 우려가 팽배한 상황이다.

재개발·재건축을 놓고 당과 총선 출마 의원들 간의 불일치도 나타나고 있다. 성남분당을에서 공천을 받은 김병욱 민주당 의원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재건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라며 윤석열정부가 추진 중인 1기 신도시 재건축을 강하게 지지했다. 이는 1·10 부동산 대책 발표 직후 민주당이 “막무가내식 (재개발·재건축) 규제 완화는 집값을 띄울 뿐만 아니라 안전성을 최우선하는 도시정비법의 취지에도 위배된다”고 반대한 것과 배치되는 행보다. 이에 대해 김 의원은 “민주당이 지적한 것은 수년간 준비해서 신도시 등에 안전진단 면제를 하는 특별법을 만들었는데 특별법이 발효되는 4월이 되기도 전에 전국 모든 아파트의 안전진단을 면제하겠다는 대통령의 무책임한 태도”라고 설명했다.

엉터리 공약이 선거철만 되면 반복되는 고질병을 고쳐야 한다는 지적은 수없이 제기됐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이참에 공약이력제 등 주요 정책·대책의 실효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정치권에서 생각하는 공약은 ‘선물보따리’이고 유권자 입장에서는 ‘비용청구서’”라며 이러한 공약 남발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공약이력제와 선거공약 발표 숙성·검증 강화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이 사무총장은 “해당 공약을 누가 발표했는지를 명시하게 되면 급조된 선거공약 태스크포스(TF)에서 마구잡이로 공약을 발표하는 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보통 선거 60일 전후로 선거공약 TF를 조성하는데 이렇게 급조된 곳에서 정상적인 공약이 나오길 바라는 것은 무리”라며 “미국이나 일본처럼 선거 2년여 전부터 당내에서 공약을 검증하고 일정 시점을 정해 공약집을 발간하도록 해 언론의 검증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채명준 기자 MIJustic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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