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만 덩그러니… 가구·인쇄·웨딩 ‘특화거리’가 죽어간다

강다은 기자 2024. 3. 5. 03: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손님 줄고 재개발에 ‘사라질 위기’
적막한 아현동 가구거리 지난달 29일 오후 방문한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가구거리는 방문객이 거의 없어 적막했다.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을 한곳에서 둘러보고,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이점으로 한때 신혼부부의 ‘필수 쇼핑 코스’였던 가구거리는 최근 온라인 쇼핑몰에 손님을 빼앗기면서 활력을 잃었다./장련성 기자

지난달 27일 오후 5시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가구거리. 중심 골목 양쪽으로 침대와 옷장, 의자, 싱크대 등을 파는 가구 매장 50여 곳이 몰려 있지만, 이 중 14곳은 비어 있거나 문을 닫은 상태였다. 간판에 불을 켜고 영업 중인 매장 중에 손님이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직원 없이 ‘무료로 구경하세요’ ‘파격 세일’ 같은 입간판만 세워둔 매장도 있었고, 불은 켜져 있지만 문을 잠근 ‘개점휴업’ 상태인 매장도 많았다. 사무용 가구를 판매하는 이모(65)씨는 “가구 파는 곳은 매장 면적이 넓어서 임대료와 전기세도 많이 드는데 경기가 안 좋으니 가구를 바꾸려는 수요가 거의 끊겼다”며 “손님이 오면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마진 안 남기고 싸게 넘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가구거리, 웨딩거리, 수제화거리 등 특정 업종 매장을 밀집해 모아놓은 서울 시내 특화거리가 활력을 잃고 있다. 1900년대 중·후반 조성되기 시작한 특화거리는 소비자 입장에선 여러 매장을 들러 가격을 비교할 수 있고, 판매자 입장에서도 물류 서비스 등을 공유하며 집적 효과를 누리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가격 비교는 물론 배송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온라인 쇼핑몰이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급격히 확산하면서 특화거리에서 발품을 파는 소비자들이 급감했다. 이런 가운데 주택 재개발 사업 추진과 상권 변화 등의 이유로 서울 도심에서 장기간 명맥을 이어온 특화거리가 아예 소멸할 위기에 처한 곳도 생겨나고 있다.

그래픽=김하경

◇활력 잃은 특화거리

영세 인쇄업체 4000여 곳이 밀집한 서울 중구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 인쇄거리는 서울시가 추진하는 세운지구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재개발 이후 기존 인쇄업체를 위한 공공임대 사업장을 새로 짓는다고 하지만, 상인들이 요구하는 수요의 25% 수준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영세 인쇄업체들은 “인쇄거리가 사라지고, 인쇄업 종사자들의 생존권을 빼앗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지난달 21일엔 일대 인쇄업체 상인 100여 명이 서울 중구청과 서울시청 앞에서 ‘인쇄인 생존권 수호를 위한 총궐기대회’를 열기도 했다. 을지로에서 50년째 인쇄업을 하는 조모(70)씨는 “불황에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다음 달 15억원짜리 기계를 새로 들이기로 했는데 걱정이 태산”이라며 “인쇄 일감은 계속 줄어드는데, 재개발로 뿔뿔이 흩어지면 폐업하는 곳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상권이 바뀌면서 특화거리라는 이름이 무색해진 곳도 많다. 1970년대 조성된 서울 성동구 성수동 수제화거리에 있던 피혁·신발 공장 중 상당수가 최근 몇 년 사이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엔 카페나 음식점, 팝업스토어가 들어섰다. 서울 서대문구 지하철 2호선 아현역 근처 ‘웨딩거리’는 한때 100여 곳에 달하던 웨딩드레스 매장이 2000년대 들면서 서서히 줄기 시작해 현재는 20여 곳으로 급감했다. 웨딩 관련 업체들이 강남구 청담동, 논현동 일대에 밀집하면서 경쟁력을 잃은 데다가 아파트 재개발 사업이 촉발한 상권 변화를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거나 이전한 업체가 늘었기 때문이다.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신동 완구거리에서 약 300m를 걷는 동안 마주친 사람은 매장 직원을 포함해 10여 명에 불과했다. 소재규 한국완구협동조합 이사장은 “저출생으로 아이를 키우는 집이 줄었고, 호기심에 완구거리를 방문한 사람도 구경만 하고 지갑을 열지는 않는다”며 “많은 소비자가 쿠팡이나 알리익스프레스 같은 곳이 훨씬 저렴하다고 생각하니 기존 완구점들은 뾰족한 대책이 없다”고 했다.

그래픽=김하경

◇”특화거리 자체 경쟁력 갖추게 해야”

서울 구로구 기계공구상가 등 건재한 특화거리도 많다. 차남수 소상공인연합회 정책홍보본부장은 “가격이 싸거나, 고품질이거나, 특수한 물건을 파는 것 같은 자체 경쟁력을 갖추면 살아남을 수 있다”며 “웨딩거리 옆에 한복거리, 메이크업 거리를 만드는 것처럼 특정 업종과 연관된 전·후방 사업체를 모아서 키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영세 상인 입장에선 특화거리에 입점한 것 자체가 마케팅 수단이 되기 때문에 특색 있는 지역을 경쟁력을 갖추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와 지자체가 협업해 특화 거리를 일종의 도심 관광명소처럼 만들어 고객 유치와 관련 산업 육성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