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23] 알고도 물어봐야 하는 괴로움

이응준 시인·소설가 2024. 3. 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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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년 절친인 형님이 있다. 다양한 장르들을 섭렵하는 예술가인데, 세속인보다는 도사(道士)에 가까운 위인이다. 그의 계획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죽음이 임박하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홀로 곡기를 끊고 절명(絕命)하겠다는 것. 그가 오지(奧地) 여행 중 동굴을 발견하면 유심히 봐두는 이유다. 둘째, 한국인이 없는 외국의 어딘가로 이민하겠다는 것. 혼자 죽는 거야 그때 가서 그러면 될 일이지만, 두 번째 계획은 여러 사정상 이미 오랫동안 미뤄진 터라 환갑이 넘었는데도 여태 포기하지 않는 까닭을 물으니 대답이 이렇다. “이놈의 나라는 맥락이 없어. 앞뒤가 안 맞는 게 너무 많아.” 그럼 다른 나라에서는 안 그럴 거 같냐고 또 묻자 우스갯소리 같은 정답이 종지부를 찍는다. “걔들이 뭔 말을 하는지 내가 못 알아먹을 거니까 상관없어.”

1959년 11월 15일 독일사회민주당(SPD)은 ‘고데스베르크 강령(Godesberg Programm)’을 채택함으로써 계급투쟁, 산업국유화, 계획경제 등의 공산주의적 개념들과 결별하고 ‘실용주의적 국민 정당’으로 변신한다. 물론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단서가 있지만, 자유공화 법치국가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입장을 분명히 했다. 명칭만 ‘사민주의’ 정당일 뿐 ‘사회주의(완전한 공산주의 직전 단계)’의 본색을 못 벗어나고 있던 독일사회민주당의 이런 혁신을 주도한 인물은 1961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세울 적에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선 빌리 브란트였다.

고데스베르크 강령 채택 뒤 독일사민당은 1961년 연방 하원 선거에서 득표율이 10% 가까이 상승했고, 1969년 집권에 성공한다. 자유민주 대한민국은 사민주의까지를 체제에 수용하지만, 솔직히 나는 사회주의자와도 친구로 지낼 수 있다. 단, 조건이 있다. ‘진짜’ 사회주의자여야 한다. 이 사회에서 패션이거나 타락한 ‘가짜’ 사회주의자 말고는 본 적이 없어서다. 나는 묻고 싶다. 사민주의자라면서, 사회주의자라면서, 왜 극악무도한 파시스트 김씨왕조(金氏王朝)에 대해 투쟁하지 않는가?

제1당인 거대 야당에 묻고 싶다. ‘자유민주적 좌파 정당’이 왜, “북한이 해방전쟁을 일으키면 이에 동조해야 한다”는 유의 말을 버젓이 하는 고정간첩 수준의 집단을 전국구,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만드는 숙주가 되려 하는가? 독일이나 미국이었으면 선거는커녕 반역죄에 처해졌을 것이다. ‘원리(原理)대로라면’ 북한 사이비 종교 독재 정권과 가장 치열하게 싸워야 할 자유민주적 좌파 정당이 오히려 그 악의 종노릇 하는 꼴이 맥락이 없고 앞뒤가 안 맞기로는 역대급이지만, 나는 누구처럼 먼 나라로 떠나 귀를 지워버릴 계획이 없고, 무엇보다, 저들이 왜 저러는지 알면서도 그 이유를 일부러 물어봐야 하는 이 괴로움을 피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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