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1호선 9개역 첫 개통, 바리캉에 밀린 머리는 ‘고속도로’라 불렀다

채민기 기자 2024. 3. 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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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43] 독자 보물로 본 1970년대

독자들의 보물에 새겨진 대한민국 현대사를 연대별로 돌아본다. 1970년대는 경제 발전이 본격화된 시기였다. 정부가 대기업·중화학 공업에 투자를 집중하는 가운데 중소기업들도 전문 분야를 개척하며 가세했다.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해 획득한 외화가 종잣돈이 됐다. 진학률이 높아지고 소년 잡지가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한편에서는 북한과의 대치 속에 안보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기도 했다.

◇'최빈국’ 벗어나 경제 발전 본격화

서울 서초구 독자 민창규(76)씨는 베트남전 참전 기장증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기억은 대한민국이 세계 최빈국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민씨는 1970년 맹호부대 제20제대 소속으로 부산항을 출발해 일주일 만에 꾸이년에 상륙했다. 부대로 이동하는 길에 아이들에게 전투식량과 초콜릿을 던져줬다고 한다. “6·25 때 유엔군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던 일을 우리가 하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민씨는 “베트남에서 병장 월급으로 54달러를 받아 70~80%를 용산 상업은행에 예치하고 귀국 후에 찾았다”면서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종잣돈이었다”라고 했다. 1970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80달러였다.

섬유·가발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 위주였던 1960년대를 지나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했다. 2021년에 나온 IBK기업은행 60년사는 당시 한국 경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경제는 1970년대 두 차례 석유파동으로 인한 석유 공급 부족과 원자재 가격 폭등을 겪었다. (중략) 정부가 수출산업과 중화학공업에 집중 투자했기에 중소기업은 계열화·전문화로 존립 기반을 살려야 했다.” 경기 김포시 독자 김정열(73)씨에게 1975년 의료기기 제조 업체를 창업하면서 중소기업은행(현 IBK기업은행) 용산 지점에서 개설한 예금통장은 기업가로서 품었던 초심(初心)의 상징이다. 계좌 번호란에 2933이라는 숫자가 손글씨로 적혀 있다. 김씨는 “이른 나이에 사업을 시작해 어려울 때마다 이 통장을 떠올리며 이겨냈다”면서 “통장을 개설한 10월 10일을 회사 창립 기념일로 정했다”고 말했다.

그래픽=백형선

◇높아진 진학률… 소년 잡지 전성시대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학령기를 넘어서기 시작하고 중·고등학교 평준화가 실시되면서 진학률이 높아졌다. 인천광역시 독자 문봉권씨가 휴대전화에 저장해 둔 부산공고 2학년 시절 사진은 1974년 당시 학교의 풍경을 보여준다. 문씨는 “등굣길 교문에서 ‘바리캉’으로 머리카락을 깎이고 나서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사진 속 문씨와 친구들은 머리를 깎이고도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

성인 남녀의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경찰이 경범죄로 단속하던 시절, 학생들의 머리 모양도 엄격한 규제의 대상이 됐다. 남학생들의 머리를 일직선으로 밀어버리는 것을 ‘고속도로’라고 불렀다. ‘국토의 대동맥’ ‘단군 이래 최대의 역사’라 했던 경부고속도로(1970년 7월 7일 개통)가 한국인의 언어 생활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두발 규제는 학생들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에 따라 2010년대 들어 대부분 학교에서 폐지됐다.

볼거리와 놀거리가 변변치 않았던 시절 어린이들은 소년 잡지를 읽으며 교양을 쌓았다. 스포츠, 방학 생활 안내, 미스터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잡지만큼이나 어린이들은 별책부록에도 열광했다. 경남 통영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던 독자 김양자(59·충남 천안시)씨의 5학년 시절은 소년중앙 1977년 2월호 부록이었던 일기장에 기록돼 있다. “그때 시골에서 어린이 잡지를 볼 수 있는 친구는 한 반에 한 명 정도여서 늘 부러웠는데, 그해 고모가 잡지를 선물로 주셨어요. 1년간 일기를 잘 썼다고 6학년에 올라가 전교생이 참석한 아침 조회에서 상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기쁨이 무엇인지는 고통을 견뎌 온 사람들만이 알고 있다”를 비롯해 일기장에 인쇄된 ‘이달의 말씀’에서 당시 어린이 잡지의 계몽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서울 양천구 독자 권기대(70)씨는 대학교 2학년이었던 1973년 가을 코리아헤럴드 주최 영어 웅변 대회에 참가했다. 1차 원고 심사에 합격하면 2차 웅변 대회 참가 자격이 주어졌다. 권씨는 “2차 대회에 나가보니 20~30명쯤 되는 참가자 대부분이 외국인을 한 명씩 데려와서 발음이나 제스처를 연습하고 있었다”고 했다. 국내에 외국인이 많지 않았던 그때도 ‘원어민 강사’가 있었다. 이후 영어 열풍과 함께 외국인 강사가 급증하고, 그중 일부가 범죄를 일으키는 등 문제가 되기도 했다. 영어 학습 방법이 다양해진 최근에는 외국인 강사도 줄어드는 추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회화 강사 비자(E-2)를 보유한 외국인은 2010년 2만2800명에서 2021년 1만3196명으로 줄었다.

권씨는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생각조차 못하고” 혼자 쌓은 영어 실력은 그가 평생 미국·홍콩 등지에서 일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됐다. 그가 간직하고 있는 트로피는 그때 이미 ‘국제화’가 시작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北 도발로 전쟁 위기 고조되기도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했다. 6·25 이후 급증한 인구를 실어나를 새 교통수단이자 근대화된 서울의 상징이었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서울 양천구 독자 백성수(69)씨는 친구들과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 ‘시승’을 했다. 그때 사용했던 승차권에 ‘지하철 개통 기념’이라는 문구와 함께 서울역-청량리 구간 9개 역의 이름이 표기돼 있다. 서울 도심을 지나는 1호선은 ‘종로선’으로도 불렸다. 조선일보는 ‘시민들의 지하 행차’라는 제목으로 객차 내부 사진을 전하며 “차량 내부 천장에서 8개의 선풍기가 시원한 바람을 안겨주지만 일반 열차와 달리 화장실이 없다”고 소개했다.

같은 날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논산 육군훈련소에 갓 입소했던 독자 황기홍(71·충남 천안시)씨는 “육영수 여사 피습 직후 특전사에 차출됐다”고 했다. 복무 중이었던 1976년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일어났다. “실탄을 지급받고 사흘 동안 군화도 벗지 못한 채 비상대기를 했습니다. 연병장에 트럭을 대 놓고 이제 곧 전쟁하러 간다고들 했지요.” 이 사건은 건국 이후 처음으로 데프콘(방어준비태세)이 평시의 4단계에서 3단계로 상향된 사례이자, 전쟁 직전의 상태를 의미하는 데프콘2가 발령된 유일한 사례다.

황씨는 “6·25 참전 유공자인 아버지와 해군으로 근무한 아들까지 3대가 현역 복무를 마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낙하산을 메고 강하하는 특전사 시절 사진을 보내왔다. 군대 생활의 추억이자 당시 최고조에 달했던 안보 위기를 기억하게 하는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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