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박종복 SC제일은행장 | “45년 뱅커 외길, 어느새 최장수 은행장…必死則生 각오로 경영”

이창환 조선비즈 금융부장 2024. 3. 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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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복 SC제일은행장경희대 경제학, 전 SC제일은행 소매채널사업본부장·리테일금융총괄본부장(부행장) 사진 고운호 조선일보 기자

“6회 말 20 대 0으로 지고 있는 야구 경기에서 패전 처리 투수를 투입한 셈이었죠. 한데 이 투수가 승리 투수가 된 거예요. 1000명 가까운 직원을 구조조정하고 뼈를 깎는 노력을 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5년 뒤면 SC제일은행은 국내에서 일곱 번째 100년 기업이 됩니다.”

필사즉생(必死則生). 2015년 SC제일은행의 전 영업점 벽에는 이 문구가 쓰인 액자가 걸렸다. SC제일은행 최초의 한국인 은행장으로 선임된 박종복 SC제일은행장이 취임 직후 살기 위해선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는 의지를 전 임직원과 공유한 것이다. 당시 영국계 대형 은행 스탠다드차타드(SC)그룹은 제일은행을 인수하기 위해 4조4000억원을 투입했지만, 제일은행은 인수된 지 꼭 10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여전히 행장실 한쪽에 놓여있는 이 문구는 SC제일은행이 위기를 넘어 100년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됐다.

1979년 박 행장이 제일은행에 입행했을 당시 이 은행은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로 불리며 국내 금융권을 주름잡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경제 발전과 함께 성장한 5대 은행은 1997년 외환 위기로 대형 은행이 동반 부실화하면서 모두 간판을 내렸다. 제일은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일은행은 2000년 외국계 사모펀드에 매각된 후 2005년 SC그룹에 인수됐다. 이후 선임된 외국인 행장은 한국 금융시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실적은 곤두박질쳤고 2014년 연간 700억원이 넘는 순손실을 냈다. 2015년에는 대규모 희망퇴직 여파로 2858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박 행장 취임 이듬해에 성과가 나타나며 SC제일은행은 2016년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2022년 3900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하는 등 꾸준히 실적을 개선하고 있다. ‘미운 오리 새끼’로 취급받던 한국 시장은 SC그룹 전체 수익의 7%를 차지하는 중요한 전략적 시장이 됐다.

SC제일은행을 되살린 박 행장은 SC그룹의 신뢰를 받으며 10년째 은행을 이끌고 있다. 2월 13일 서울 종로구 SC제일은행 본점에서 만난 박 행장은 “한 우물만 파다 보니 어느덧 현직 은행장 중에 최고참이 됐다”고 했다. ‘은발의 JB’라는 별명답게 그는 여전히 염색하지 않은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1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 있는 SC제일은행 본점. 2 2005년 서울 종로구 공평동 제일은행 본점에서 영국계 대형은행 스탠다드차타드(SC)그룹의 제일은행 인수 축하 행사가 열렸다. 3 2016년 한국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의 행명이 SC제일은행으로 변경됐다. 박종복(맨 왼쪽) SC제일은행장이 행명 변경 제막식에 함께하고 있다. 사진 SC제일은행

은행원이 천직처럼 보이는데 원래 꿈은 은행원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SC제일은행에 대학원 학비를 벌려고 들어왔다. 당시에는 대졸자가 오면 지점에 1~2년 근무하다 본사를 갔다가 승진하고 간부가 돼 영업점에 다시 나오는 구조였다. 나는 명동에 있는 중앙지점에서 창구 보조부터 출납 보조, 가방을 들고 당좌수표 등을 교환하는 일을 했다. 대졸자는 보통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첫 지점이 명동 근처라 대학 친구를 마주치면 허드렛일하고 있는 나 자신이 창피해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학비 벌려고 왔는데 참아야지’라는 생각으로 은행에 다니다 보니 20여 년간 지방에서부터 주요 기업이 몰려있는 서울 중심지까지 안 가본 지점이 없다. 11개 지점을 돌며 다른 사람보다 본점에 빨리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 경험이 큰 재산이 됐다.”

‘영업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1986년 성수동 지점 행원으로 근무할 때는 어느 넥타이 수출 업체의 고액 외화수표 추심전매입(대금 선지급)을 하라는 지점장 지시를 거부한 일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업체의 거래 흐름에 수상한 점이 많아 지시를 거부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 넥타이 수출 업체 사장이 미술품 매매 사기 혐의로 구속됐고, 넥타이 수출은 위장 거래임이 밝혀졌다.”

제일은행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시기 미국계 사모펀드에 팔렸다. 당시 심경이 어땠나.
“제일은행 매각으로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의 국가 신용도는 상승했지만, 그 대가로 일만 열심히 했던 제일은행 직원들은 다니던 직장을 반강제적으로 떠나야 했다. 평생 영어 한마디 제대로 써본 적이 없는데, 하루아침에 회사가 ‘외국계’가 됐다. 자신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을 상대하고 영업하는 일이 전부였기에 불안한 마음에 영어 학원도 다녀보고 과외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은행업의 본질인 ‘사람’과 ‘영업’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SC제일은행 최초 한국인 행장이다. 행장이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
“세 가지 담판을 지었다. 2015년 1월 행장이 되고 4개월 후 그룹 최고경영자(CEO)도 지금의 빌 윈터스 회장으로 바뀌는 상황이었기에 런던으로 윈터스 회장을 찾아갔다. SC제일은행을 다시 흑자 은행으로 되살리기 위해 인력 구조 효율성을 높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임금 직원의 퇴직이 필요하니 나를 믿고 5000억원을 지원해달라고 했다. 옷을 벗을 생각을 하고 덤볐다. 그해 약 1000명의 직원이 특별 퇴직으로 은행을 떠났다.

두 번째 담판은 제일은행이라는 사명을 다시 찾아온 것이다. 한국에서 소매금융을 하려면 오랜 전통을 가진 ‘제일’이라는 이름을 써야 한다고 그룹 이사회를 설득했다. 2016년에 행명을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서 ‘SC제일은행’으로 다시 변경했다. 글로벌 은행이 진출한 지역에서 현지 이름을 쓰는 건 첫 사례이자 아직도 유일한 사례다.

세 번째는 우리 직원들과 담판이었다. 직원들 앞에서 ‘뉴 뱅크 뉴 스타트(New Bank, New Start)’라는 기업 문화 운동을 선포했다. 우리가 긴 호흡으로 몰입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은행을 떠나간 1000여 명 선배들의 아픔을 딛고 후배들이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한국의 은행은 글로벌 경쟁력이 약하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은행이 규제 산업인 만큼 은행의 노력만으로 경쟁력이 강화될 수 없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가장 큰 책임은 금융업에 종사하는 금융인들에게 있다. 중소기업부터 대기업까지 기업이 절실하게 노력할 때 화이트칼라인 은행은 규제 산업의 범주 안에서 안주한 부분이 있다. 한국이 선진국이라고 하는데 금융업을 바라보는 정부와 국민의 시선이 그만큼 성숙했는지도 볼 필요가 있다. 반도체, 배터리 등 산업 비중이 선진국 평균보다 높다고 한다면, 금융업은 평균 미달이다. 금융을 둘러싼 시장 참여자들의 시각 변화가 필요하다. 생산의 3대 요소인 노동·자본·기술의 중요 축인 금융업을 산업으로 보는 성숙한 시선도 필요하다.”

은행원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은행이라는 직종은 안정성·수익성을 추구하면서도 굉장히 창의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변화가 빨라도 은행의 기본 철학은 바뀌지 않는다. 인공지능(AI) 혁명으로 비대면이 일상화돼도 은행의 기본은 만남과 만남이다. 은행원이 되기 위해선 사회성과 공감 능력, 관계 관리가 중요하다. 독보적 기술을 창의적으로 만들어낸들 혼자만 승자가 될 수 없다. 창의성과 긍정의 마인드가 있으면 더 좋다. 특히 은행업이라는 건 도덕성과 공공성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은행은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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