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건축 세계 <12> 콘크리트 유토피아] 그랑 파크 주거 지구 아파트 실험과 530 드웰링 트랜스포메이션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2024. 3. 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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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사진 다음영화

영하 26도의 이상 저온으로 얼어붙은 2023년 겨울의 서울.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대지진으로 도시는 순식간에 폐허가 된다.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은 황궁 아파트 한 동뿐이다. 외부 생존자들은 추위를 피해 아파트로 모여들고, 부지불식간에 ‘선택받은 자’가 된 주민들은 이 상황에 점차 예민해진다. 엄태화 감독의 2023년 작품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위기 가운데 배타적으로 변해가는 집단의 모습을 묘사한다. 두 집단의 아슬아슬한 공생 관계가 유지되던 어느 날, 주민과 갈등을 빚은 외부인에 의한 화재가 발생한다. 주민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외부인을 모두 추방한 후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아파트를 폐쇄하고 보호하기로 한다. 광기 어린 주민들은 일부 선의를 가진 주민들이 숨겨준 외부인들까지도 ‘바퀴벌레’로 비하하며 색출해 쫓아낸다. 추방당한 이들이 도시의 폐허 한구석에서 동사하는 동안, 주민들은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자축한다. 그들은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슬로건을 함께 외치며, 모든 행동을 스스로 정당화한다.

강현석SGHS 설계회사 소장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서울대 건축학과 출강,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스위스 바젤 사무소 건축가

아파트를 통해 보는 다른 시선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모습은 냉혹하고 비인간적이다. 그러나 영화의 설정은 관객이 그들의 배타성을 단호하게 비판하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주민들의 행동을 수긍케 하는 강력한 플롯 장치는 외부인 대다수가 옆 단지인 드림 팰리스 주민이라는 설정이다. 그들은 평소 황궁 아파트 주민을 무시했으며 학군이 섞이지 않도록 단지를 폐쇄해 배척해 왔다. 이러한 점은 영화 전체의 서사를 현실의 아파트 문화와 중첩해 바라보게 한다. 이들은 계급주의와 폐쇄적 공동체의 키워드를 공유한다.

우리 사회에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아파트는 현재 주택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도시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아파트가 많은 역할을 해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도시는 아파트를 통해 주택난을 해소했고, 불량 주거지역을 개선했으며, 단지 도입으로 부족한 기반 시설을 확충했다. 그러나 아파트가 철저한 시장 재화로 변모하면서 본래 주택의 의미는 상실되고 주객이 전도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주택은 거주하는 개인 삶의 방식에 의해 정의됐다. 역으로 현대사회의 개인은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의해 정의된다. 지역과 학군, 임대와 분양, 구축과 신축, 평수와 층수에 따라 암묵적인 계층이 생겨나고, 서로가 서로를 차별한다. 여기에서 획일적인 평면과 층고는 아파트의 왜곡된 현상을 물리적으로 방증한다. 위치와 평수에 따라 매겨지는 경제적 가치가 삶의 다양성을 우선한다.

영화의 끝에서, 황궁 아파트를 떠난 주인공은 다른 생존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이 거주하는 ‘옆으로 넘어진 아파트’에 도착한다. 90도로 누운 아파트에서는 기존의 벽은 바닥과 천장으로, 바닥과 천장은 벽으로 뒤바뀐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획일적인 높이로 층수를 구분했던 건물은 이제 동일한 너비의 1층 가구로 통일된다. 여기에서 아파트 가치를 좌우하던 평수는 더 이상 점유할 수 없는 허공의 높이 값으로 치환되면서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렇게 기존 가치 체계가 역전되고 뒤틀린 아파트의 모습은 반복되는 재생산의 굴레에 묶인 도시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아파트의 경제성에 의존해 번영을 이뤄온 도시는 이제 축적된 문화를 어떻게 교정하고 발전시켜 나갈지 고민해야 할 시기를 맞았다.

530 드웰링 트랜스포매이션. 사진 philippe Ruault

1960년대 아파트의 변형 실험

2017년, 프랑스 보르도의 ‘그랑 파크 주거 지구’에서는 1960년대 초에 건설된 사회 주택 아파트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건축가 듀오 라카통 앤드 바살(Lacaton & Vassal)은 ‘530 드웰링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of 530 dwellings)’으로 명명된 이 프로젝트에서 낙후한 아파트를 철거하고 새롭게 건축하기를 반복하는 낭비적인 관행을 거부했다. 대신에 기존 건축물의 공간 구조를 유지하면서 거주자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공간을 확장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건축가는 10~15층 규모의 콘크리트 전면 벽을 철거하고, 온실을 닮은 3.8m 너비의 겨울정원과 외부 발코니를 이어서 연장했다. 추가된 공간은 콘크리트 바닥과 기둥,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와 유리문 그리고 단열 커튼 같은 평범하고 경제적인 재료로 구성됐다. 이를 통해 각 가구의 내부 공간은 풍부한 채광과 조망으로 채워지고, 아파트는 에너지 효율적인 열적 완충 공간으로 기능하는 개방적인 입면을 갖게 됐다. 프로젝트가 추구하는 경제성과 지속 가능성은 시공 방법에 대해서도 정교한 전략을 요구했다. 530가구 주민의 불필요한 이주를 피하고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공장에서 사전 제작한 콘크리트 판과 기둥을 현장으로 운반하여 크레인으로 조립하는 방식이 도입됐다. 결과적으로 모든 아파트의 개조가 12일에서 16일 이내에 완료됐다.

규격화된 평면과 거주자의 자유공간

‘530 드웰링 트랜스포메이션’은 기존 아파트의 벽으로 구획된 평면에 미리 정해진 기능이 없는 공간을 추가하여 조합한다. 외부와 기존 공간 사이에서 투명 슬라이딩 문으로 둘러싸인 겨울정원은 공기와 빛으로 채워진 ‘가벼움의 공간’이다. 거주자는 날씨와 취향에 따라 문과 커튼을 여닫으면서 공간의 성격과 기존 공간과 관계를 조정할 수 있다. 겨울정원은 3.8m의 넓은 폭으로 기존 방들과 동등한 위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부수적인 공간으로 인식되는 우리의 발코니와 구별된다. 내부로부터 외부로 향하는 무거움과 가벼움, 기능성과 느슨함의 양가적 공간 구조는 이를 주체적으로 조율하고 사용하는 거주자의 삶을 다채롭게 만든다.

건축가는 경제성과 단순성을 추구하는 자유공간이 역설적으로 ‘간소함 속의 호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유공간은 거주자의 생활 방식을 규격화한 평면과는 달리 사용의 자유와 공간의 관대함, 그리고 전유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530가구 주민들이 실제로 자유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프로젝트는 실험적이었다. 공사가 완료된 후, 프랑스 사진작가 필립 루오(Philippe Ruault)는 주민들의 삶이 충분히 녹아든 각 가구의 내부 풍경을 기록했다. 그의 사진들은 주민들이 겨울정원을 각자 취향에 따라 식물과 가구 등으로 꾸며 놓고, 창의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각각의 개성이 반영된 형형색색의 가구와 집기는 열린 입면을 통해 도시로 드러나면서 집합적인 삶의 풍경을 형성한다.

폭발적인 청약 경쟁률은 영화 제목처럼 우리 사회가 아파트를 유토피아로 맹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상적인 사회를 지칭하는 유토피아의 어원은 ‘현실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뜻한다. 따라서 왜곡된 유토피아를 이상적인 방향으로 조정하는 것은 그 물리적인 실재를 깨뜨리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랑 파크 주거 지구의 아파트 실험은 표준화된 콘크리트 평면을 깨고, 개인의 자유를 위한 공간을 새로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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