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 면허 위조에 뚫렸다…버지니아 범죄 현장 가보니 [노석조의 외설]
그후 3중 체크로 법 뜯어고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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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주의 차량관리국(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에 며칠 전 다녀왔습니다. 미국에 체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찾았을 곳입니다.
한국에서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국제운전면허증으로는 미국에서 1개월 이상 체류하며 사용하는데 제한이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워싱턴 D.C. 조지타운대학교에 1년간 방문연구원으로 있기 때문에 현지 면허증이 필요했습니다.
차는 미국에 입국한지 하루만에 한국차를 구입했습니다. 거주지가 버지니아 비엔나 타운인데 차 없이는 생수 한 통 사러가기도 어렵더라고요.
운전면허증을 신분증으로도 쓸 수 있어서 미국에서 생활하기 편한 게 많다고 합니다. 여권을 매번 가지고 다닐 필요 없이 현지에서 발급한 운전면허증만 가지고 다녀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주하는 버지니아주의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기로 했습니다. 관련 기관인 DMV를 방문했습니다. 버지니아주의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으려면, 필기 시험 등을 봐서 통과하거나 한국 면허증을 버지니아주 면허증으로 교환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말이 ‘교환(exchange)’이지 한국 면허증을 근거로 ‘운전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현지 면허증을 내주는 식이었습니다.
면허증 교환을 신청한지 2주가 흐르자 집으로 교환이 승인됐다는 안내 편지가 집에 왔습니다. 이 편지를 가지고 DMV를 찾았습니다.
승인이 났다고 해서 금방 플라스틱 면허증을 받을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직원은 저를 창구에 세워두고 실제로 버지니아에 거주하는지를 3중으로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집 계약서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월세 계약서를 제출했습니다.
직원은 굳은 얼굴로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더니 창구 밖으로 툭 던지며 이걸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계약서에 임대인, 임차인 이름이 고딕체로 프린트돼 있었는데, 실제 친필 서명된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컴퓨터로 이름을 쓴 것은 위조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계약을 해준 부동산 사무실을 찾아가 DMV가 요구한 대로 계약서를 출력해 받아야 했습니다.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주한 미국 대사관 영사과에서 체류 목적에 걸맞는 비자를 발급 받았고, 이 비자 발급에 필요한 DS-2019 등 각종 서류에 버지니아에 거주할 것이란 정보도 포함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DMV에서 꼭 그래야한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찾아가 서명이 들어간 계약서를 제출했는데요. 그러자 직원은 이제 당신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우편물을 하나도 아니고 두 종을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계좌 개설 서류를 제시했는데요, 직원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계좌 개설 서류에 집 주소가 적혀 있다고 했지만, 꼭 우편물의 수신란에 당신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어야한다고 했습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그간 받았던 우편물 봉투도 이날 챙겨갔기에 다행히 요구 사항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은행이 집으로 보내준 데빗 카드 우편 봉투, 가스 청구서를 제출했습니다.
직원은 이런 서류를 모두 복사해 사본을 만들고, 즉석에서 시력 검사 등을 한 뒤 ‘임시 운전면허증’이라 쓰인 종이 한 장을 줬습니다. 이걸로 운전하고 있으면 집으로 플라스틱 운전면허증이 갈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미국이 다른 나라와 운전면허 상호 협정을 맺었으면 거주 확인을 굳이 이렇게 까지 할 필요 없을 텐데 왜 이렇게 까다롭게 할까 의문스러웠습니다.
알아보니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소식통은 “9·11테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테러범들은 미국의 중동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국적자들로 구성돼 있었는데요, 이들은 미국 국내선 항공기를 하이재킹해 뉴욕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충돌시켰습니다.
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은 신분증으로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의심 받지 않고 국내선 항공편을 이용하기 위해 현지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허술한 절차로 실제로 버지니아에 거주하지도 않는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테러범에게 신분증 대용 효력이 있는 운전면허증을 발급해준 ‘구멍’이 제가 갔던 DMV 지국이었던 것이죠.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23년 전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국제 정치, 외교안보적으로 미국과 전 세계를 뒤흔든 9·11 테러 사건의 범죄 현장 중 한 곳이 지척이었습니다. 이런 수사 결과가 발표됐을 때 DMV 직원들과 그곳을 드나든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싶었습니다.
과거 신문 기사를 검색해보니, 9·11 전만 해도 버지니아에서 운전면허증을 발급받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100달러만 주면 브로커들이 단순 관광객은 물론 불법 체류자들한테도 운전면허증 발급 받아줬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실명과 주소가 기재된 우편물을 제출하라는 규정도 없었습니다. 실제 거주 여부를 제대로 확인도 않았습니다. 9·11테러범들도 이런 식으로 허술한 당시 버지니아 DMV 제도를 악용했던 것입니다.
워싱턴 소식통은 “9·11테러 이후 미국은 거의 모든 게 다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버니지아주는 면허증 발급 제도를 뜯어고쳤습니다.
외국인에게 국제운전면허증을 현지 것으로 교환해주는데도 해당 외국인의 본국에 문서를 보내 신분 확인을 거치고 그 뒤에도 실제 그가 버지니아에 주소를 갖고 거주하는지를 각종 문서로 3중 점검 확인하게끔 한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나니 왜 DMV 직원이 그토록 까다롭게 굴었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혹시 미국에서 운전면허증 발급을 신청하시거나 기타 이유로 문서 제출 요구를 받으신다면 꼼꼼하게 서류를 잘 챙기시기를 권합니다.
9·11 사태가 터진 지 어느 새 23년이 흘렀습니다. 테러 발생지인 뉴욕이 아닌 버지니아가 관련됐는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다시 한번 문서 위조가 얼마나 중범죄인지도 실감했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규정과 절차를 우습게 보고 대충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상 뉴스레터 ‘노석조의 외설’이었습니다. 구독자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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