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 못할 참혹함을 ‘모형’으로…집념이 쌓아올린 ‘지옥의 디테일’

이문영 기자 2024. 3. 2.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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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커버스토리
형제복지원 한종선의 ‘건축 투쟁’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
건물부터 폭행·가혹행위까지 12년간 제작
“글로 못 담는 공기·냄새까지 느끼도록”
한종선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모임 대표가 2월13일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의 지하 작업실에서 자신이 만든 형제복지원 건물들 사이에 서 있다. 실제 건물 순서와 높낮이를 반영해 배치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끌려간다.

눈앞에서 누나가 끌려간다. 동생을 만나려고 소대를 이탈해 달려온 누나가 끌려간다. 조장에게 두들겨 맞으며 머리채를 잡혀 무참하게 끌려간다.

“움직이면 죽을 줄 알아.”

‘가만히 있으라’는 유구한 위협에 동생은 무리 속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말리지 못한다. 조장의 몽둥이질에 몸을 숨긴 국가가 ‘사회 정화’의 폭력을 퍼붓고 있을 때 성인이 된 동생의 갈라지는 목소리가 반주 없는 노래로 깔린다.

“엄마아야 누우나야 가앙변 사알자~.”

노래라기보다 울음으로 들린다. 악몽 같은 기억이 흐르는 영상 속에서 악몽을 떨치려는 비명처럼 “누우나”를 부른다.

자신을 만나려고 소대를 이탈해 달려온 누나가 조장에게 몽둥이로 두들겨 맞던 기억을 한 대표가 모형으로 재현했다. 모형 운동장에 배치하고 현실감을 살려 사진도 찍었다. 한종선 제공

위이이이이이잉.

모터가 돌 때마다 우드록(발포 스타이렌 수지를 가공해 나무처럼 만든 판재) 가루가 튀었다. 한종선(47)이 2월13일 ‘악몽의 단면’을 미니 그라인더로 갈았다. “우드락(우드록) 다듬으라고 제작된 도구는 아닐 거”라 짐작하면서도 “정해진 용도 상관하지 않고 갈고 다듬는 데” 연마기를 썼다.

한종선은 앞서 자를 대고 우드록을 재단했다. 잘라낸 우드록 조각에 사포질을 했다. 잉크와 물감이 먹을 수 있도록 표면을 문지른 다음 펜으로 한 인물을 스케치했다. 그의 악몽이 시작되는 첫 장면에 채워 넣어야 할 남자였다.

‘폭압의 시대’ 부산에서 행해진 범죄가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의 한 건물 지하실로 옮겨지고 있었다. 40년 전의 누나를 만들고, 누나를 구하지 못한 자신을 만들고, 체제와 정책의 대리인들을 만들고, 단속과 감금과 폭력의 형상들을 만들며 한종선은 ‘살아남은 시간’을 조금씩 이어 붙였다.

한 대표가 ‘형제복지원의 악몽’이 시작되는 첫 장면에 넣을 한 남자의 얼굴을 우드록 조각에 스케치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그가 때때로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살폈다.

재료 박스와 제작 도구들, 뒤엉킨 전기선, 오래 쌓인 먼지와 한겨울의 냉기가 가득한 지하 작업실이었다. 그 작업실 모퉁이에 놓인 낡은 소파에 누나 한신예(50)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동생이 어서 작업을 마치고 “집에 가자”고 말해주길 기다리면서도 누나는 동생을 보고 있지 않았다. 소파 팔걸이에 두 다리를 올린 채 말없이 한쪽 벽을 응시했다. 기억을 빼앗겨 텅 빈 듯하면서도 특정 기억으로 꽉 찬 듯한 눈을 바라볼 때마다 동생은 그 순간 누나가 언제, 어디로 가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12년 동안 만들어온 모형들이었다. 오랜 시간 작업에 몰두하며 염두에 뒀던 어떤 시기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한 대표는 이쑤시개를 사용해 자신이 수용됐던 제27소대의 침대 기둥을 세웠다. 한종선 제공

12년간 만들어온 모형

“단어로는 묘사할 수 없는 공기와 냄새, 소리까지 느껴지도록.”

한종선의 모형 제작은 그가 국회 앞 1인 시위로 “세상에 튀어나온” 2012년부터 시작됐다. 그는 형제복지원 폐쇄(1987년) 25년 뒤에야 등장한 당사자의 목소리였다. 그의 투쟁은 한국 사회가 ‘그들의 과거’로 묻어버린 사건을 ‘우리의 오늘’로 끄집어냈다. 2014년 4월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모임을 결성한 그는 2015년 국회 앞 삭발·단식과 2017~2020년 ‘927일 농성’ 등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2020년 6월)과 진상규명의 길을 열었다. 그는 낮에 농성하고 밤엔 천막 안에서 모형을 잡았다.

“나는 왜 형제복지원 모형을 만드는가.”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쓰고 말했다.

“나는 왜 (다른 피해자들이 고통스러워) 잊으려는 것을 오히려 재현하려 하는가. 형체가 남아 있지 않는 것은 그만큼 빨리 잊혀지고, 그곳에 남아 있는 고통과 억울함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노숙농성 747일째인 2019년 11월24일 페이스북)

모형 제작은 기약 없는 진실규명과 손해배상을 기다리며 한종선이 필사적으로 매달려온 싸움이었다. “재판부가 우리 삶이 어떠했는지 잘 모른다면 제대로 된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에”(2023년 7월12일) 그는 “피해자들이 목격하고 겪은 (사건의) 진상을 샅샅이 끌어내”(2022년 1월10일)야 한다는 절박함을 손끝에 모아냈다. 그 손끝에서 ‘잊히게 둘 수 없는 참혹’이 하나둘씩 생생한 모습을 드러냈다.

1984년 10월 한종선·한신예 남매가 형제복지원으로 인계된 ‘동광파출소’와 강제로 그들을 태운 ‘부랑인(아) 선도차’. 이정용 선임기자

“저와 누나예요.”

한종선이 ‘동광파출소’ 모형의 내부를 가리켰다.

그는 사각형의 파출소 안 정면에 태극기를 걸었다. 출입구 옆 좌우 벽엔 ㄴ자 모양의 나무 의자를 배치했다. 오른쪽 의자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나란히 앉혔다. 파란 옷과 노란 옷을 입은 남매의 얼굴에 긴장과 두려움은 그려 넣지 않았다. 곧 시작될 평생의 비극을 예상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남겨뒀다.

아버지가 남매에게 새 신발과 옷을 사주고 이소룡(리샤오룽) 주연의 영화까지 보여준 1984년 10월의 저녁 장면이었다. 그날 동광파출소(부산시 중구)로 남매를 데려간 아버지는 “여기 좀 있으라”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파출소 앞에 검은 지프차가 멈춰 섰다. 팔과 옆구리에 완장과 몽둥이를 찬 남자들이 들어와 경찰과 문서를 주고받았다.

한종선이 ‘부랑인(아) 선도차’ 모형을 파출소 앞에 놨다. 그가 차 뒷문을 열자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웅크린 아이들이 보였다. “대가리 숙이라며 머리를 빡 때려서 눈앞에 별이 반짝였던” 어린 종선이 그 안에 있었다.

“이 인간이었어요.”

우드록 조각에 그리다 만 얼굴을 보며 한종선이 말했다. 모형의 정체가 밝혀졌다.

“파출소 의자에 앉아 있던 우리를 번쩍 들어 차에 태운 남자.”

한종선·신예 남매를 태운 ‘부랑인(아) 선도차’가 형제복지원 정문에 도착하는 장면. 한종선 제공

부산 형제복지원(1960년 설립)은 가난을 범죄시하는 국가가 치안과 안보의 관점에서 ‘잠재적 적대세력’을 격리하는 ‘부랑아 대책’(1975년 제정된 내무부 훈령 410호)의 산물이었다. 강제수용·감금(1975~1986년에만 3만8천여명)과 강제노역, 성폭행과 가혹행위 등 끔찍한 인권유린이 ‘복지의 탈을 쓴 지옥’에서 벌어졌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 수만 657명(2022년 8월 진실화해위원회 발표)이었다.

“자립으로 국민에게 보답하자.”

자정께 남매를 태운 차가 지옥문 앞에 도착했다. ‘너희는 국민이 아니란 선언’이 정문 철창 위에서 철창보다 뾰족하게 돋아 있었다. 한종선이 모형차를 형제원 정문 앞으로 옮기고 작업실 불을 껐다. 깜깜한 작업실에서 모형에 설치된 가로등만 작고 흐린 빛을 발했다.

“끌려가던 첫날의 기억이 이랬어요.”

그 깜깜한 어둠이 남매를 철창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8살이던 한종선은 남자 아동소대인 24소대로, 11살 한신예는 여자 아동소대인 23소대로 배정됐다. 소대도 자물쇠 채운 철문을 따고 들어갔다. 먼저 잡혀온 남자아이들이 침상에서 머리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초등학생 나이에 시작한 군대 생활이자 감옥 생활. 식사 시간이 다가오면 원생들은 식당에 들어가기 앞서 허기진 배를 붙잡고 운동장을 뛰어야 했다. 한종선 제공

참혹 시각화한 ‘증언의 건축물’

“나를 기준으로 차례로 교회당 라인, 원장 사택 라인, 아동소대 라인, 식당 라인….”

한종선이 기억 속 건물들의 위치(현재 아파트 단지가 된 사상구 주례동)를 읊었다. 건물들이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재현한 형제원 건물들이 실제 순서대로 작업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의 지하 작업실 자체가 일종의 전시실이었다. 언덕 높낮이에 따른 고도차까지 반영한 배치였다.

초기에 제작한 소형 건물들로는 내부 구조와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2022년 작업실을 얻고 건물 크기를 키우면서 세부 묘사가 가능해졌다. 전체 건물의 틀을 갖춘 뒤 한종선은 강제입소 이듬해 옮겨간 27소대를 중심으로 안쪽을 꾸몄다. 이쑤시개로 기둥을 세워 이층침대를 만들고, 모포를 만들고, 관물함을 만들었다. 창문을 내고 창살을 세웠다. 천장엔 취침등도 달았다. “뭘 배운 적이 있어야 뚝뚝뚝딱 만들 텐데”(2021년 7월21일) 그는 따로 배운 기술 없이 “조그마한 것들을 붙들고 조물딱거리”며 본드를 바르고, 말리고, 물감을 칠하고, 말리는 일을 무한 반복하느라 “엄청 빡셌”(2021년 8월30일)다.

2021년 7월 한 대표가 27소대 건물 모형에 색을 칠하고 있다. 한종선 제공

“히로시마 타.”

조장(끌려온 원생 중에서 뽑힌 하위 통솔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원생들이 일제히 이층침대 난간에 발을 걸치고 물구나무를 섰다. 똑바로 서지 못하거나 휘청대면 곧바로 “매타작”이 들이닥쳤다. 한종선이 물구나무 모형들을 오징어 말리듯 일렬로 침대에 붙였다. 수십개의 모형들 어딘가엔 어린 한종선도 있었다. 히로시마를 탈 때마다 피가 거꾸로 쏠렸다. 정치도, 행정도, 정의와 윤리도 뒤집힌 시대였다.

초등학교 2학년의 나이로 시작한 군대 생활이자 감옥 생활이었다. 소대 내부 묘사를 끝낸 한종선은 자신이 직접 겪은 일들을 재현했다. 기발하고 기괴한 기합들이 기묘한 이름으로 행해졌다.

물구나무 얼차려 ‘히로시마’. 똑바로 서지 못하면 조장의 매타작이 시작됐다. 한종선 제공

“이게 ‘한강철교’란 건데요.”

한종선이 엎드려뻗쳐 모형을 우드록 원판 위에 올렸다. 같은 자세의 모형들을 꼬리 물듯 놓은 다음 앞 모형의 다리를 뒤 모형의 등에 올렸다. 50여명의 엎드려뻗쳐로 연결한 ‘인간 다리’가 완성되면 조장이 그 위를 뛰어다녔다. 다리는 도미노처럼 무너졌고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났다.

누워서 머리와 다리를 들고 두 팔을 앞으로 뻗는 ‘나룻배’, 발을 벌리고 허리를 뒤로 꺾으며 엄지손가락 두 개로 벽을 지탱하는 ‘전깃줄’, 코로 원산폭격을 하는 ‘고춧가루’ 등 얼차려란 이름의 가혹행위가 날마다 되풀이됐다. 조장에게 밉보였다간 담요를 씌우고 두들겨 패는 ‘모다구리’(이불말이)를 당해 피범벅이 됐다. 한겨울에 속옷까지 벗기고 손발을 묶은 채 찬물을 끼얹는 ‘물고문’을 당했을 때 한종선은 죽음의 공포로 얼어붙었다. 누군가 알게 모르게 죽어 나갔고, 교회 옆엔 새로 생긴 무덤들이 늘어났다. 그 시간을 포착한 모형에 대사와 음향을 입힌 영상 ‘27소대의 하루 일과’는 폭력을 앞세운 ‘복지의 실체’를 우리 눈앞에 들이민다.

엎드려뻗쳐 자세에서 두 다리를 뒷사람 등 위로 올리는 얼차려 ‘한강철교’. 한종선 제공

참혹했다.

불의한 정치가 불순한 세력이라며 가두고, 때리고, 파괴한 어린아이들의 몸과, 마음과, 기억에 각인된 감각. ‘고문’과 ‘학살’과 ‘테러’가 장식용 수식어로 동원되는 지금 시대에조차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참혹’. 그 추상의 명사를 시각화하는 데 쏟아부은 시간이 한종선의 지하 작업실에 가득했다. 그가 선명한 사진처럼 펼쳐놓은 ‘지옥의 디테일’은 불쌍한 피해자에 머무르길 거부한 집념 어린 생존자가 한장 한장 쌓아 올린 ‘증언의 건축물’이었다.

어떤 기억은 가차 없었다. “만들다 보면 당시의 고통과 분노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재현은 “아픈 기억을 꺼내는 일”이었다. 장면과 장면이 그를 빨아들였다. “자주 지치고 숨이 막히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존감 없이는 밀고 나갈 수 없는” 작업이었다. 옛 시간은 부서졌지만 그는 깨진 채로 방치하지 않았다.

머리와 다리를 들고 두 팔을 앞으로 뻗는 ‘나룻배’ 자세에서도 발바닥을 맞았다. 한종선 제공

15일 시작되는 손배소 증거로 제출 예정
앞선 판결들, 수용기간 기준 배상액 산정
“사람답게 살 기회 박탈, 다시 돌려줘야”

붕어빵을 굽는 중에도

“어서 온나. 오늘은 뭐 주꼬.”

“슈크림 2천원어치요.”

어린 손님이 주문하며 말했다.

“엄마가 여기 붕어빵이 가장 맛있댔어요.”

엄마와 자주 오는 어린 단골이었다. 빵을 새로 굽는 사이 한종선이 ‘서비스 붕어’를 줬다.

“이거 먹고 새해 복 많이 받아.”

가스 불의 열기 탓에 그는 겨울 날씨에도 반팔 티셔츠를 입고 일했다. 지난해 10월 광주의 한 대학교 후문에서 시작한 장사는 한달 만에 인근 ‘붕어 상권’을 평정할 만큼 소문이 났다.

‘빠삭’과 ‘서비스’와 ‘친절’이 비결이었다. 다른 붕어빵과 구별되도록 앙금을 꽉 채우고 겉은 바삭하게 구웠다.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원 플러스 붕어’를 남발”했다. 무엇보다 손님들에게 밝은 얼굴로 대했다. 대학생들과 야간자율학습 하는 중고등학생, 맞은편 아파트 주민들이 그의 붕어를 사려고 줄을 섰다. 대학생 단골들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아주고 갔고, ‘꼬맹이 단골들’은 “꼰대스럽지 않아 좋다”며 인생 상담을 청했다. 당근마켓 ‘동네생활’엔 그의 붕어 홍보 글이 올라왔다.

한 대표가 2월13일 광주의 한 대학교 후문에서 붕어빵을 구워내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한종선이 모형의 주재료로 우드록을 택한 까닭은 “제작 행위 자체가 시위의 연장”이란 생각(“국회 앞 1인 시위 때 들었던 피켓 재료가 우드락”)에서였지만 비싼 나무값을 감당할 수 없는 현실 탓도 컸다. 부족한 제작비는 ‘완공’을 지연(진행률 70~80%)시켰다. 현재 작업실에 교회, 정신병동, 공장소대 등 아직 짓지 못한 건물의 배치 공간이 없다는 사실은 추가 ‘시공’을 방해했다. 임대료 마련도 기초생활수급자인 그가 매달 해결해야 하는 우선 과제였다.

“신예.”

붕어빵 장사는 한종선 평생의 ‘첫 사업’이었다.

“한신예.”

임대료를 벌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었다. 음식에 집착하는 누나가 먹고 싶을 때 자유롭게 집어 먹게 하고 싶었다.

“누나…. 대답해야지….”

빵틀에 반죽을 넣던 한종선이 목소리를 키웠다.

“그러면 고양이 목 졸려서 안 돼.”

그는 빵을 굽는 중에도 끊임없이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집 안에 설치한 시시티브이(CCTV)를 연결해 누나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는지 살폈다. 걱정스러운 행동이 관찰되면 휴대전화에 대고 누나를 불렀다.

이날 한신예는 고양이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있었다. “고양이가 추울 거란 생각에서”(한종선)였다. 가끔 창문 밖으로 고양이를 내보내기도 했다. “집 밖으로 나가고 싶은 누나의 마음을 투영한 행동”이었다. 형제원으로 끌려가기 전 동생과 살던 옛집을 찾아간다며 한신예는 자주 창문을 넘었다.

‘한종선 붕어빵’의 한 손님이 지난해 11월 당근마켓 ‘동네생활’에 올린 글과 사진. 당근마켓 갈무리

창문.

그 안을 들여다봤을 때의 충격을 한종선은 잊지 못했다. 면회도 외출도 차단된 형제원 정신병동에 누나가 갇혔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창문에 매달려 눈으로 누나를 찾는 것뿐이었다. 그 안에서 누나는 항상 손이 묶인 채 누워 있었다. 어떤 남자가 침대에 손발이 결박된 여성을 성폭행하고 있는 장면도 목격했다.

매일 자신을 만나러 달려온 누나가 몽둥이에 맞고 끌려가는 모형을 만들며 한종선은 총명하고 생활력 강했던 누나를 잊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에게 어린 시절 누나는 “기억에 없는 엄마” 대신이었다. 칭얼대는 동생을 등에 업고 나직한 목소리로 ‘엄마야 누나야’를 불러줬다. 그 누나가 끔찍한 폭행을 당하고 정신장애로 감금됐다. 누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생존권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소대를 이탈해 동생을 만나러 온 누나가 조장에게 두들겨 맞고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모습. 한종선 제공

지난 1월 초 한종선은 앙금 포장을 자르던 가위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찔렀다. 민원을 이유로 철거를 통보받은 직후였다. “공무원들이 민원의 타당성은 검토하지 않고 무조건 법대로 하겠다며 돌아섰”을 때 “생존권을 빼앗겨 죽거나 찔려 죽거나 마찬가지”라며 가위를 들었다. 출동한 경찰이 그를 체포하려 했다. 한종선은 ‘야스리’(빵 부스러기 긁어내는 도구)를 자신의 목에 갖다 댔다. 지켜보던 단골들과 시민들이 공무원과 경찰에게 항의했다. 구청 담당 과장이 나와 “계속 장사하시라”며 상황을 수습했다. 그는 병원에서 11바늘을 꿰맸다.

“형님, 혹시 몰라서 불 좀 줄였어요.”

화장실을 다녀온 한종선에게 전정풍(41)이 말했다.

그도 당시 단속반을 향해 소리 지르던 단골 중 한명이었다. 한종선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대신 노점을 지키며 손님을 맞았다. 언 앙금을 부드럽게 펴거나 바람이 들이칠 때마다 노점 천막도 정비했다. “형님과 이야기하는 게 좋아” 매일 빵을 한 뭉텅이씩 사가는 그는 “형님 덕에 형제복지원 사건도 알게 됐고 형님이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는지도 알게 됐”다. 그가 앙금을 주무르고 있을 때 한종선의 전화기가 연거푸 울었다.

지난 2월13일 붕어빵을 굽는 한 대표 옆에서 단골 손님 전정풍(왼쪽)씨가 장사를 돕고 있다.

햇수×금액으론 정산될 수 없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죠?”

한 손으로 전화기를 든 한종선이 다른 손으로는 계속 빵을 구워냈다. 손해배상소송 절차와 참여 방법을 문의하는 전화가 하루 종일 때를 가리지 않고 걸려왔다.

“시간이 걸릴 테니까 생계 활동도 계속하셔야 해요. 최선을 다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전체 신청자 544명 중 3차례에 걸쳐 490명)이 이어지면서 형제원 피해자들의 손배소도 잇따르고 있다.

한종선은 2020년 12월 전국 기차역을 돌며 개별 접수가 힘든 피해자들의 신청서를 받았다. 서울역에서 신청서를 쓴 피해자 중엔 작년 8월 ‘대학로 특수협박범’으로 몰렸다가 재판에서 무죄(지난 1월25일)를 선고받은 발달장애인 유철용(가명·홈리스야학 교사의 도움을 받아 작성)도 있었다. 2기 위원회 출범(2020년 12월10일) 몇시간 전부터 대기하던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1호 진정 사건으로 집단 접수했다. “위원회 활동이 지지부진하더라도 상임위와 사무처도 구성되지 않은 첫날 위원장 손으로 직접 받은 1호 사건을 모른 체하긴 어려울 거”란 판단이었다. 그는 2022년 8월24일 1차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191명에 포함됐다.

2020년 12월 한 대표가 전국 기차역을 돌며 피해자들에게 받은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신청서. 그는 2기 위원회가 출범(12월10일)하자마 1호 진정 사건으로 집단 접수했다. 한종선 제공

손배소 판결은 지금까지 3차례 나왔다. 지난해 12월21일 첫 국가배상 판결(서울중앙지법 민사29부 ‘피해자 26명에게 총 145억8천만원’)을 시작으로, 지난 1월31일(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 ‘16명에게 45억3500만원’)과 2월7일(부산지법 민사11부 ‘70명에게 165억여원’) 추가 선고가 이뤄졌다. 법원이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에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법원은 1인당 8천만원을 기준으로 수용 햇수를 곱해 배상금을 산출했다. 납치와 감금·학대로 교육 기회를 빼앗고 장애, 질병, 사망, 사회적 낙인 등을 낳아 평생을 파괴한 책임을 단순히 수용 기간으로 좁혀 계산하는 게 맞냐는 지적이 일었다. 그마저 정부는 “(배상) 금액의 적절성 등 상급심 판단을 받을 필요가 있다”며 세건 모두 항소(1월10일, 2월15일, 2월27일)했다.

“국가에서 나 감시하러 보낸 사람이오?”

2007년 병원으로 찾아간 아들을 아버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과 누나를 구하러 올 거라 기대했던 아버지마저 1986년 형제원으로 끌려왔을 때 한종선은 절망했다. ‘원장 박인근의 왕국’이 폐쇄된 뒤 그는 소년의집으로 보내졌고 아버지와 누나는 거리에 방치됐다. 갱생원과 공장, 건설 현장 등을 떠돌며 ‘창살 없는 형제복지원’에서 살던 그는 기초수급 신청 과정에서 두 사람의 생사를 확인했다.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있었다. 미안함으로 3년 동안 아들을 모른 척하던 아버지는 2022년 4월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돼 눈을 감았다.

한 대표가 2월13일 저녁 한 식당에서 누나 한신예씨가 먹기 좋은 크기로 음식을 잘라주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누나, 스톱 스톱. 물, 조금만 조금만.”

장사를 마치고 저녁을 먹던 한종선이 누나를 말렸다. 물 한컵을 비운 한신예가 다시 컵에 물을 가득 따라 들이켰다. 형제원 화장실엔 ‘잡수’를 담아두던 욕조가 있었다. 물이끼가 끼고 벌레 사체와 실지렁이가 떠다니는 물을 굶주린 원생들이 밥 대신 퍼마셨다. 그 기억이 누나를 “물 중독”에 빠뜨렸다.

누나를 놓아주지 않는 기억처럼 동생에게도 떨쳐지지 않는 기억이 있었다.

“야 이 ××년아! 다시는 오지 마!”

동생을 만나고 싶어 매일 달려와 두들겨 맞던 누나를 향해 한종선은 조장이 시키는 대로 외치고 외쳤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동생을 쳐다보던 누나는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살려고 누나를 버려야 하는 곳이 형제복지원”이었다. 그 장면은 “형제원 시절 중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한종선을 괴롭혔다.

누나도 정신병원에서 찾았다. 얼굴부터 크게 달라진 누나를 동생은 발등의 흉터를 확인하고서야 알아볼 수 있었다. 36년간 병원에 있던 누나를 2021년 집으로 데려왔다. ‘그날’의 죄책감으로 동생은 누나를 살뜰히 보살폈다. 이가 없는 누나를 위해 닭뼈와 생선뼈를 발라 밥 위에 올렸다.

한 대표가 작업실에서 자신이 만든 형제원 정문 모형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지금은 사라진 형제원 안에 그가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정용 선임기자

통째로 망가진 그들의 삶이 ‘수용 기간×8천만원’으로 정산될 리 없었다. “한 사람의 피해 사실을 햇수로 뭉뚱그릴 것이 아니라 무엇이 배상받아야 할 피해인지 명확히 해서 사람답게 살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재판부의 역할”이라고 그는 믿었다.

한종선·한신예 등 20명의 원고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배소(서울중앙지법 민사20부)는 3월15일 시작된다. 이때를 기다리며 제작해온 모형들이었다. 동생은 사진과 영상에 넣은 ‘지옥의 실상’을 변호인과 협의해 재판부에 증거자료로 제출할 계획이다.

한종선이 연마기를 내려놓으며 어느 기억에서 헤매고 있을지 모를 한신예를 불렀다.

“누나야, 이제 집에 가자.”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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