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K팝, 빚내는 ‘덕질’…‘탈케’ 고민합니다

노정연 기자 2024. 3. 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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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파트너’ 추켜세우지만 공연장선 암표상·‘도촬자’ 취급
유료화되는 팬서비스, 티켓·굿즈 가격도 천정부지로
“팬이 ATM·불가촉천민인가” ‘가성비 덕질’로 돌아서기도

1990년대 후반 H.O.T와 젝키를 시작으로 형성된 대한민국 아이돌 팬덤은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국내 가요시장의 발전과 함께 ‘해가 지지 않는 팬덤’을 구축했다. 2024년, K팝의 위상이 높아지며 해외 유명 음악 시상식에서 K팝이 울려 퍼지고 있는 지금 터져 나온 건 팬들의 처우를 개선하라는 목소리다. K팝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떠오르며 기획사들이 조 단위 매출 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팬들의 처우는 아이돌 음악이 업신여김을 당하던 그때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폭력경호’, 과도한 몸수색…멍드는 팬덤

지난해 12월 한 K팝 그룹의 경호원이 공항에서 여성 팬을 손으로 거세게 밀쳐 넘어뜨리는 영상이 공개돼 논란이 됐다. 6인조 아이돌그룹 ‘보이넥스트도어’의 경호원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던 팬을 제지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논란이 확산되자 아무리 경호 중이라도 팬을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비판이 일었고 소속사 KOZ엔터테인먼트 측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경호인력에 대한 경호 가이드 및 교육 강화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사과 입장을 내놨다.

아이돌 가수의 과잉 경호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2월에는 SM 소속 그룹 ‘NCT드림’ 경호원이 인천공항에서 30대 여성 팬을 밀쳐 늑골 골절 등 전치 5주의 상해를 입힌 사건이 뉴스를 탔고, 7월에는 하이브 소속 보이그룹 ‘엔팀’ 팬사인회에서 과도한 몸수색과 속옷 검사 등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이 있었다는 폭로가 나와 파문이 일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당시 상황을 전한 팬은 스태프가 ‘녹음 또는 촬영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스마트워치 등 전자기기 소지 여부를 확인하겠다고 과도한 몸수색을 벌였다며 “너무 수치스럽고 인권이 바닥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최근엔 그룹 ‘제로베이스원’의 멤버 김지웅과의 영상 팬사인회에서 욕설을 들었다는 팬의 주장이 나와 논란이 됐다. 소속사 웨이크원은 특수감정 결과 욕설이 확인됐으나 김지웅의 목소리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고 의혹을 부인했다. 이에 문제를 제기한 팬은 “설령 본인(김지웅)이 한 게 아니더라도 수백만원의 돈을 지불하고 온 팬이 그렇게 느꼈다면 직접 상황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어가야 하는 게 먼저”라고 심경을 밝혔다.

시대 변했지만 팬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

밀쳐지고, 수색당하고, 욕설까지. 팬들에게는 왜 이런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것일까.

연예기획사들은 아티스트 보호를 위해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팬들을 통제하는 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팬들이 몰리는 공항 입출국 현장이나 오프라인 행사, 콘서트 입장 과정에서 팬과 아티스트의 안전을 위해 예민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세대 아이돌 팬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오빠’를 보기 위해 방송국 앞에서 밤을 새우는 ‘철없는 10대 여학생’으로 차별받았다. K팝이 세계로 뻗어나가며 주류로 자리 잡은 현재는 팬들의 연령층이 전 세대로 확장되고 전보다 더 막강한 소비력을 가졌음에도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K팝 산업의 주체적 소비자인 팬을 보는 대중의 시선이 시대와 산업의 변화에 맞춰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최이삭 K팝 칼럼니스트는 “현장에서 팬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기분이 들었을 것”이라며, 대다수가 젊은 여성인 K팝 팬들을 함부로 대하는 공기가 국내 엔터업계에 고질적으로 퍼져 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K팝 산업의 이런 부끄러운 이면을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발전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팬의 안전과 소비자로서의 권리 보호를 위해 업계 전체가 각성하고 적극적으로 시정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료화되는 팬서비스, 굿즈 가격도 ‘껑충’

1·2·3세대 아이돌 ‘덕질’을 거쳐 웬만한 신인그룹 멤버들의 이름과 생일까지 외울 정도로 K팝 열성팬이었던 이유나씨(가명)는 얼마 전 더는 K팝 덕질을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탈케’(탈(脫)케이팝) 선언을 했다. ‘선언’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쓰게 된 것은 “요즘 왜 아이돌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는 지인들의 물음에 답하면서다.

“K팝 신곡이 나올 때마다 뮤직비디오는 물론 음방(음악방송)과 직캠(직접 찍은 영상), ‘자컨’(자체 콘텐츠), 라이브 소통, 콘서트까지 챙기느라 친구 만날 시간이 없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든 게 유료화되기 시작하더라고요. 티켓값도 너무 비싸졌고요. 20년 넘게 덕질을 해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SM엔터테인먼트 자회사 ‘디어유’의 팬 유료 소통 플랫폼 ‘버블’(위)과 하이브 ‘위버스샵’에서 판매중인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터의 굿즈들.

그는 ‘버블’로 대표되는 유료 소통을 사례로 들었다. SM의 자회사 ‘디어유’에서 운영하는 버블은 가장 사랑하는 스타 ‘최애에게 받는 프라이빗 메시지’를 내건 유료 구독형 채팅 플랫폼이다. 한 달에 일정 금액(아티스트 1인 기준 4500원)을 결제하면 앱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메시지를 수신하고 답장도 보낼 수 있다. 아메리카노 한 잔 가격으로 최애와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설레고도 가성비 높은 덕질이란 말인가! 최애와의 대화(메시지)를 돈으로 산다는 게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지만, 우리는 이미 갖은 비물질적 서비스를 유료로 구독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 K팝 팬들에게 유료 소통은 낯설지 않다. 2010년 전후 2세대 아이돌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아이돌에게 건당 100원가량의 SMS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운이 좋으면 답장도 받을 수 있는 ‘유타’(UFO 타운)를 기억할 것이다. 최애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팬사인회 역시 앨범을 사야 참가권에 당첨될 수 있는 일종의 유료 소통 행사다.

문제는 그동안 아티스트들이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해오던 소통 활동과, SNS 라이브 방송 등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콘텐츠들이 빠른 속도로 유료·상품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굿즈와 콘서트 티켓 가격이 치솟으며 팬들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 코로나19 이전 10만원 안팎이던 티켓값은 20만원에 육박하고 응원봉이나 에코백 등 1만~2만원 선에서 구입이 가능했던 팬 굿즈는 3만~5만원 선으로 가격이 훌쩍 뛰었다.

거침없이 뛰는 티켓 가격, 팬이 ‘ATM’인가요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한국 콘서트 티켓 가격은 2019년(LOVE YOURSELF: SPEAK YOURSELF 콘서트) 전석 11만원에서 2022년(PERMISSON TO DANCE ON THE STAGE 콘서트) VIP석 22만원, 일반석 16만5000원으로 두 배가 올랐다. 이달 열리는 ‘세븐틴’의 인천 콘서트(‘FOLLOW’ AGAIN TO INCHEON) 티켓 가격은 VIP석 19만8000원, R석 15만4000원, S석 13만2000원이다. 2019년 ‘ODE TO YOU IN SEOUL’ 콘서트 티켓 가격이 전석 12만1000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역시 크게 오른 것이다.

티켓 가격 상승에는 최근 등장한 ‘사운드체크 관람’도 영향을 미쳤다. 사운드체크 관람은 본공연에 앞서 관람객이 아티스트의 리허설을 볼 수 있는 이벤트다. 하이브가 2022년 BTS 콘서트에 처음 도입한 후 블랙핑크, 아이브, 르세라핌, 세븐틴, 제로베이스원 등 인기 아이돌의 공연에도 속속 도입되며 20만원 안팎의 티켓 가격대가 형성됐다.

물론 티켓 가격은 공연의 퀄리티, 가수의 이름값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급격히 올라간 물가와 인건비도 반영됐을 것이다. 한 공연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무대, 조명, 음향 설치 비용을 비롯해 콘텐츠 제작비와 행사 진행을 위한 인건비 등이 모두 올랐다”며 “여기에 억눌렸던 수요 폭발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 관객들까지 몰리니 티켓 가격 상승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가격이 오른 만큼 관객의 만족도도 높아졌는지는 따져볼 문제다. 해외에서는 사운드체크를 포함한 VIP패키지에 아티스트와의 만남, 개인 사진 촬영, Q&A 세션, 사인 CD 제공 등 다양한 혜택이 있는 데 비해 국내에선 20분가량의 짧은 리허설을 보는 데 그쳐 실망스럽다는 평가가 많다. 게다가 연예기획사들은 사운드체크 입장권을 별도로 팔지 않고 가장 앞 열의 ‘일반 티켓’에 묶어 VIP석으로 판매하고 있다.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보고 싶은 관객은 다른 선택권 없이 VIP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운드체크 관람이 ‘티켓 가격을 높이기 위한 상술’이라는 눈총을 받는 이유다.

‘탈케’, ‘가성비 덕질’로 돌아서는 팬들

팬들의 열성적인 소비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공연 산업의 위기 속에서도 아이돌 산업을 지탱해왔다. 연예기획사들의 주 수입원이었던 대면 공연과 오프라인 행사가 불가능한 와중에도 팬들이 온라인 콘서트와 굿즈 구매, 영상통화 팬사인회, 유료 소통 앱에 적극적으로 지갑을 연 덕분이었다. 2023년 IBK투자증권 자료에 따르면 하이브, SM, JYP, YG 등 주요 엔터 4사의 코어 팬덤 규모는 약 350만명. 업계에서 추정하는 K팝 아이돌 팬덤 산업의 규모는 약 8조원으로 K팝을 즐기는 세계 10~30대 인구수를 고려할 때 그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지나 거대 글로벌 산업으로 성장한 K팝 업계는 팬들을 ‘K팝을 함께 키운 파트너’라 치켜세우지만 업계의 성장과 수익 다각화를 지켜보는 팬들의 마음은 달갑지 않다. 끊임없이 과소비를 부추기는 상술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며 돈을 쓰지 않고 덕질하는 이른바 ‘가성비 덕질’로 돌아서는 팬들도 늘고 있다.

이씨는 K팝 업계가 팬들을 ‘ATM’, 즉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고 말한다.

“돈을 쓰면 쓸수록 업계는 기존에 있던 것들을 쪼개 유료화하고, 돈을 쓰지 못하는 팬들의 소외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요. 팬들은 덕질에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공연장에서 암표상, ‘도촬자’ 취급을 받고요.”

전문가들은 K팝 업계가 팬들을 소비자로서만 환대하면 향후 탈K팝 현상은 가속화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팬들이 느끼는 감정과 처우에 대해 더욱 세심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종임 문화사회연구소 이사는 “아이돌과 K팝 팬덤 간 친밀감은 오랫동안 K팝 산업을 유지해온 동인”이라며 “엔터사들이 이를 상업적 요소로 활용하며 발생하는 문제”라고 짚었다. 이어 “한류가 처음 우연한 기회로 인기를 끌었을 때 상업적 이익만 추구해 해외 팬들의 외면을 받았다”며 “업계가 수익성만 추구할 경우 팬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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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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