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붓끝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됐다

김인혜 미술사가 2024. 3. 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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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그림으로 망국의 자존심 지킨 한국 근대미술사 대부 안중식

한반도 지형은 무엇을 닮았는가. 노인? 토끼? 호랑이? 원래 조선인은 한반도가 노인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허리 굽히고 팔짱 낀 채 중국에 인사하는 형상, 이 생각이 중국을 향한 사대주의가 마땅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후 조선의 지형이 토끼를 닮았다는 주장이 일본인 학자 고토 분지로에 의해 제기됐다. 1903년 ‘조선산맥론’에서 전라도는 토끼 뒷다리, 충청도는 앞다리, 황해도·평안도는 머리, 함경도는 귀, 강원도·경상도는 어깨에 해당한다고 했다.

하지만 고작 노인이나 토끼라니? 이에 분개한 최남선(1890~1957)은 호랑이 형상을 주창했다. 일본에는 없는 호랑이, 그것도 중국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는 호랑이 말이다. 조선의 ‘3대 천재’로 통했던 그는 14세에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갔다가 하루빨리 세계 신문물을 조선인에게 전파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인쇄기와 일본인 기술자를 들여와 18세에 ‘신문관’이라는 출판사 겸 인쇄소를 차렸다. 첫 사업이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지 ‘소년’ 발간이었다. 그리고 그 잡지에 ‘태백범’이라는 시와 함께 호랑이 모양 한반도를 처음 그려 넣었다. 호랑이 털 주름이 태백산맥에서 파생된 여러 작은 산맥과 닮아 있다.

화가 안중식이 1909년 11월 잡지 ‘소년’에 호랑이처럼 그린 한반도. /개인소장

그런데 이 호랑이 그림을 그린 이는 누구일까? 구전에 의하면,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이다. 최남선은 안중식이 그려준 삽화를 몇 번이나 퇴짜 놓고 주문하기를 반복해 그를 화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안중식 입장에서는 자기보다 스물아홉 살이나 어린 새파란 젊은이가 조그만 호랑이 그림 하나 가지고 어지간히 까다롭게 군다고 여겼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후 한반도 호랑이설은 20세기를 지배한 새로운 개념이 됐다. 누구나 한 번쯤은 호랑이 모양 한반도 지도를 본 적 있을 것이다.

◇격동의 시대를 함께한 삶

안중식의 대표작 ‘성재수간’. 소리는 나무 사이에 있다는 뜻. 구양수의 ‘추성부’ 한 구절을 딴 것으로, 바깥에 소리가 들려 동자에게 나가보라 했더니 인적은 없고 쓸쓸한 가을의 바람 소리였다는 내용이다. /개인소장

안중식이 누구인가. 20세기 한국 근대미술사의 대부(代父) 같은 존재. 고희동·이상범·노수현·변관식 등 한국 최고 근대 한국화가들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그러나 안중식이 호랑이 삽화를 그리고, 화업에 매진하며 제자들을 키운 것은 그의 생애 후반기에 해당한다. 40대 이전까지는 격동기 개화파 일원으로 활동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861년 서울 청진동에서 태어났다. 무관을 많이 배출한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었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친척인 화원화가 안건영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재주가 많고 총명해 1881년 개화기 최초의 중국 유학생단인 ‘영선사’에 선발됐다. 약 2년간의 유학에서 그가 배운 것은 자주국방을 위한 신식 무기 제조법. 귀국하면서 기기 도면 몇 장을 그려왔다고는 하나 조선 최초의 신식 무기 제조국인 기기창(機器廠)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고 성공하지도 못했다. 근대적 체신 업무를 위해 세워진 우정국의 사사(司事)로도 채용됐지만 갑신정변이 일어나 실패했고, 안중식도 한동안 잠적해야 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다시 개화파가 실권을 잡자, 안중식은 군수로 전격 발탁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아관파천으로 상황이 역전되면서 그도 다른 개화파 인사들과 마찬가지 곤욕을 치렀다. 안산에서 의병이 들고일어나 군수인 그가 몸을 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까지 그의 이름은 안욱상이었다.

산전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99년 그는 이름을 안욱상에서 안중식으로 개명한다고 신문에 공표했다. 그리고 그해 중국 상하이를 거쳐 일본에 들어가 약 2년간 체류했다는 사실이 일본 ‘요시찰 인물 감시 자료’에 세세히 기록돼 있다. 그가 ‘요시찰 인물’이었던 건 일본에 망명 중인 개화파 인사들과의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갑신정변 주도자 박영효와 그 추종자들을 만났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상하이를 거쳐 귀국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에서 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한가로이 휘호회나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 머문 것은 아닐성싶다. 당시 그의 호 ‘경묵용자(耕墨傭者)’, 즉 ‘먹을 갈아 품팔이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만은 없다. 그는 뭔가 잘해보려고 애썼지만, 무엇이 잘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는 그런 시대를 살았다.

◇애국계몽운동의 ‘이미지’ 생산자

안중식이 그린 ‘아이들보이’ 표지화(1913). /개인소장

자,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안중식은 1907년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후 호랑이 그림 같은 걸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한 후였고, 고종이 강제 폐위되던 때였다.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안중식이 택한 길은 오랜 친구 오세창과 마찬가지로 출판과 교육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흔히 배웠던 ‘애국계몽운동’에 힘을 보탠 것이다.

을사늑약 체결에 비분강개해 자결한 민영환을 기리는 일에도 참여했다. 그가 죽은 자리, 집안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해서 ‘혈죽도’ 그림이 유포되지 않았나. 안중식이 그 혈죽도를 많이 그려 잡지나 책에 실었던 화가다. 1907년 간행됐으나 금서로 지정된 민간 교과서 ‘유년필독(幼年必讀)’에도 삽화를 그렸다. 이 교과서는 세계지도, 한국 역사와 위인을 그림과 함께 소개해, 이전까지 서당 교육을 받던 조선 어린이들에게 ‘지적 신세계’를 선사했다. 나중에 독립운동가로 성장한 이들이 어릴 때 이 책을 몰래 보며 애국심을 갖게 됐다고 회고한 바 있다.

최남선이 잡지 ‘소년’의 호랑이 그림을 의뢰해 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중국에 사대했다가 이제는 일본에 자주권을 뺏긴 조선의 자존심을 어찌 호랑이 그림으로 보상받을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안중식은 나이 어린 친구로부터 자꾸 그림 퇴짜를 맞아 기분이 나쁠 만도 했지만 계속해서 최남선을 도왔다. 최남선이 발행했다가 일제 탄압으로 정간과 폐간을 반복했던 잡지들, ‘붉은 저고리’(1913) ‘아이들보이’(1913) ‘청춘’(1914) 등에 안중식은 꾸준히 표지화와 삽화를 그렸다.

나라가 망한 것은 조선이 문약(文弱)한 까닭이라 여겼기에, 안중식이 그린 그림에는 ‘장군’이 특히 많았다. ‘아이들보이’ 표지에는 용맹하면서도 친숙한 장군상을 내세웠고, 호랑이 마스코트를 깨알같이 그려 넣었다. 잡지 ‘청춘’에도 조선시대 북방 정벌에 성공한 김종서 장군의 모습을 그렸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하는 시조와 함께. 안중식은 이순신 장군상도 삽화나 그림으로 여러 점 남겼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으니, 요즘 말로 ‘국뽕’ 소재가 간절하게 필요했다. 그 소재를 각종 인쇄 매체를 통해 본격적으로 대중에 유포하고 이미지화한 것이 이때라 할 수 있다. 그런 ‘이미지 작업’의 선두에 안중식이 있었다.

◇망국의 恨을 예술로

경복궁 일대 풍경을 묘사한 ‘백악춘효’ 여름본(1915). /국립중앙박물관

자신의 세대는 여러모로 실패했기에 후세를 위한 교육에 투신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사명이었다. 1911년 안중식은 조석진과 함께 서화미술회 강습소를 처음 개설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이었다. 오세창의 조카 오일영을 시작으로 김은호·이상범·노수현 등이 여기서 서화를 배웠다. 안중식의 개인 화숙에서도 이미 이도영과 고희동이 공부했으니, 한국 근대기 대표적인 한국화가 대부분이 그의 제자였던 셈이다.

예술가로서 안중식은 오히려 나라가 망한 후 절정기에 올랐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1910년대에 쏟아졌다. 개화파 일원으로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참회가 기저의 정서였다. 그래서 유독 탈속의 삶과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많이 다뤘다. 예를 들어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이야기를 따온 그림을 보자. 만발한 복사꽃을 지나 작은 동굴을 통과하니 옛 진나라 때부터 터전을 잡은 풍요로운 마을이 있었으나, 다시 찾으려 했을 때 그 나루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안중식은 이런 그림의 화제에 이렇게 썼다. “계류를 따라 복사꽃이 흐르니 속세와 다른 봄이고, 어부는 이곳으로 통하는 나루터를 발견했네. 당시에도 진나라가 있었다 기억하고, 산하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 말하지 않았네.” 그는 이제 ‘다른 사람의 것’이 된 우리 산하에 대한 한탄, 잃어버린 이상향의 꿈을 이렇게 빗대 그렸다. 눈부시게 아름답게.

1915년 총독부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열겠다며 경복궁을 훼손할 당시, 안중식이 그린 ‘백악춘효’ 두 점도 그의 대표작이다. 백악산 아래 쓸쓸하고 스산한 경복궁 풍경이 압권이다. 여름과 가을에 각각 그렸다고 화제에 썼으면서, 제목은 ‘춘효(春曉)’, 봄날의 새벽이라니. ‘춘효’는 “봄잠에 날 새는 줄 몰랐네”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인데, 이어지는 바 다음과 같다. “간밤에 비바람 소리 들렸으니 꽃은 얼마나 졌을까.” 안중식은 주인을 잃고 날마다 공사로 시끄러운 궁궐의 전경을 애석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꽃이 지기 전, 즉 훼손되기 전 경복궁의 본모습을 기록하듯 화폭에 담았다. 경복궁의 원래 모습을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국민적 자존심 문제였다.

◇안중식의 유산

안중식의 ‘도원행주도’(1915) 세부. 배를 타고 어부가 동굴로 들어가는 부분이다. 이상향의 상실이라는 정서가 담겨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안중식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숨을 거뒀다. 민족 대표 33인 중 오세창·권동진 등이 그의 절친으로, 자주 안중식의 집에서 회합한 탓에 그도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자기 재산을 오세창에게 건네 운동 자금으로 쓰게 했다는 회고도 남아 있다. 인촌 김성수는 민족 대표가 33인이 아니라 안중식을 포함해 34인이 돼야 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역할을 높이 샀다. 안중식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고문 후유증으로 그해 10월 타계했다. 유족으로는 손자 안병소(1908~1974)가 있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는 장애를 극복하고, 1930년대 베를린에서 유학했던 1세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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