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되고 친서민 이미지 부각"…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앞다퉈 시장 먹방
정치인들이 전통시장 찾는 까닭
지난해 12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은 부산 국제시장을 찾아 떡볶이 접시를 집으며 이렇게 말했다. 윤 대통령의 최근 행보를 보면 전통시장 방문이 더욱 잦아졌다. 지난해 11월 7일(대구 칠성종합시장)부터 지난달 26일(충남 서산 동부시장)까지 9곳을 오갔고 지난달에만 5곳을 찾았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여야 지도부도 앞다퉈 전통시장을 찾고 있다.
총선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전통시장을 향한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한층 빨라지고 있다. 전국에서 전통시장이 가장 많은 서울(189곳), 그중에서도 중구(50곳·1위)와 종로구(30곳·2위) 전통시장엔 후보들의 방문이 온종일 끊이질 않고 있다. 부산(160곳)과 대구(107곳)도 만만찮다. 후보들 대부분은 “민심 청취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정치인들은 왜 선거 때만 되면 이처럼 전통시장으로 향하는 걸까. 전통시장 대신 대형마트를 찾으면 안 되는 걸까. 전통시장이 대체 뭐길래.
#민심의 바로미터
대통령기록관 사진과 동영상을 들춰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3월 5일 서울 길음시장에서 상인들과 순대에 소주를 곁들이고 있다. 대통령의 음주 장면은 흔치 않다. 하 평론가는 “전통시장에서의 민심 청취 행보라는 컨셉이라 (음주도)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최근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자신을 드러낼 매체가 진화하면서 전통시장에서의 정치인도 ‘그림’이 잘 나오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심지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시장 먹방’을 대선 홍보 영상으로 삼았다. 2008년 3월 9일 자양동 골목시장을 찾아서는 떡을 건네는 상인의 손을 덥석 잡아 입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날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다. “재래시장이 대형마트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차별화 정책이 필요하다”면서다. 2013년 실시된 대형마트의 ‘새벽 영업금지’와 ‘매달 이틀 의무 휴업’ 규제는 이미 이때부터 이 전 대통령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이 전 대통령에게 전통시장은 민심 청취의 장이자 대선 공약이었던 ‘재래시장 활성화’를 재확인하는 곳이었다. 제도 시행 후 10년. 전통시장은 과연 활성화됐을까.
게다가 당초 의도대로라면 대형마트 규제로 소비자는 불편해야 하는데, 한국리서치 조사 결과 “불편하지 않다”는 응답이 65%에 달했다. 이에 더해 대구·청주·고양시 등 일부 지자체는 최근 조례 개정을 통해 대형마트 휴무일을 공휴일에서 평일로 옮겼다. 정부도 지난 1월 22일 대형마트 공휴일 의무 휴업을 폐지하기로 했다. 관련 개정안은 현재 국회 계류 중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왜 대형마트는 좀처럼 들르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이강윤 정치평론가는 “대형마트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강자’라는 인식이 강한 상황에서 어느 정치인이 리스크를 감수하려 하겠느냐”며 “대신 서민과 중산층을 두루 접할 수 있는 전통시장의 방문 효과가 훨씬 크다고 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지현(27·경기도 고양시)씨는 재래시장이란 단어를 낯설어했다. 문헌상 우리나라 시장 전통은 490년 시작됐다. 신라 소지왕 12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화를 통하게 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로부터 1500여 년. 그새 태어난 시장들은 재래시장과 전통시장으로 뒤섞여 불리고 있다. 정치인들도 현장 방문 중에 구분 없이 부르고 있다. 국어사전은 재래시장을 ‘예전부터 있어 전해져 내려온 시장’으로 풀이한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제정된 ‘시장 규칙’이 대한제국 시대까지 지속돼 온 시장을 ‘재래시장’으로 정리한 뒤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그런데 2009년 ‘공식 용어’가 바뀌었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3월에 찾았던 자양동 시장의 상인이 “재래시장이란 용어의 어감이 안 좋다”고 하자 “재래시장 대신 전통시장으로 이름을 바꾸라”고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1년 뒤인 2009년 ‘재래시장 육성을 위한 특별법’은 ‘전통시장 육성을 위한 특별법’으로 바뀌었다. 김도형 지방행정연구원 센터장에 따르면 재래시장이란 용어가 낙후된 느낌이 강해 이름이 갖는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전통시장으로 변경한 것이었다.
그중 대구 서문시장과 광주 양동시장은 정치인들에겐 영호남 전통시장의 상징이자 ‘성지’로 통한다. 이 대표는 지난달 5일 양동시장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들렀던 국밥집에서 노 전 대통령이 국밥을 먹었던 자리에 앉았다. 한 위원장도 같은 날 서울 경동시장을 찾았는데 당내에선 “우리도 서문시장에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 평론가는 “정치인들에겐 대구 하면 서문시장이고, 광주 하면 양동시장”이라며 “기왕에 갈 거면 그 지역에서 가장 어필할 수 있는 시장과 장소를 택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전통시장에서 물건을 사며 “저렴하다”고 외치기도 한다. 그런데 전통시장은 과연 쌀까.
#물가의 바로미터
일각에선 정치인들의 전통시장 방문을 ‘구태’라고 꼬집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시선을 익히 알면서도 전통시장을 외면하지 못하는 건 전통시장이 갖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특히 떡볶이·어묵·순대를 많이 찾는다. 하 평론가는 “이곳저곳 빨리 들러 ‘그림’을 만들어야 하는데 국수를 먹자니 시간이 걸리고 남기면 ‘친서민’에 반하는 거고. 그러다 보니 ‘패스트푸드’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라고 짚었다.
이처럼 대형마트에 밀리면서도, 숫자가 줄면서도 전통시장은 여전히 화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논리만으론 설명할 수 없다. 문화가 담겨 있고, 만남이 이뤄지며, 정서가 순화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공간을 넘어 의미 있는 ‘장소’이기에 시장(市場)이라고 부른다. 윤 대통령이 어묵을 먹었던 의정부 제일시장 분식집 사장이 말했다. “민심이고, 물가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 우리 서민들에겐 시장이 곧 인심(人心)이죠.”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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