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밭 위의 스톤 워즈(Stone Wars)! [말록 홈즈]

2024. 3. 1. 15:5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말록 홈즈의 플렉스 에티몰로지 9]

‘플렉스 에티몰로지’란 ‘자랑용(flex) 어원풀이(etymology)’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쓰는 말들의 본래 뜻을 찾아, 독자를 ‘지식인싸’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작은 단서들로 큰 사건을 풀어 나가는 셜록 홈즈처럼, 말록 홈즈는 어원 하나하나의 뜻에서 생활 속 궁금증을 해결해 드립니다. 우리는 단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쓰곤 합니다. 고학력과 스마트 기기가 일상화된 시대에, ‘문해력 감소’라는 ‘글 읽는 까막눈 현상’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습니다. 단어는 사물과 현상의 특성을 가장 핵심적으로 축약한 기초개념입니다. 우리는 단어의 뜻을 찾아가면서, 지식의 본질과 핵심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와 학교를 떠난 이들의 지식 인싸력도 레벨업됩니다.

제25회 농심 신라면배 바둑대회 결승전에서, 신진서 9단이 신화를 썼습니다. 바둑의 종주국이자 15억 인구 대국인 중국의 대표팀을 상대로, 그것도 중국 현지에서 이뤄낸 업적이기에 가슴 벅찬 찬사를 보냅니다. 문득 ‘바둑’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어릴 때 배웠다면 지금 삶이 어땠을까 궁금해지는 취미가 세 가지 있습니다. 수영, 피아노, 바둑입니다. 저는 다 할 줄 모릅니다. 수영을 못 합니다. “꼬로록~” 맥주병이 아니라, 그냥 “쑤욱~!” 벽돌입니다.

수퍼맨이나 박태환이나, 제겐 동급 영웅으로 보입니다. 전 둘 다 못 하니까요. 피아노에 얽힌 추억도 있습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학생회실에서 복학생 선배의 기타 연주에 맞춰 강산에의 ‘라구요’를 흥겹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평소 학생회실에 오지 않던 여자선배가, 말을 건넸습니다.

“Extreme의 ‘When I first kissed you’ 불러줄래? 네 목소리랑 잘 어울릴 것 같아, 파아노 연주도 하면 멋있을 거야.”

흠모했지만,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어 아쉽던 예쁜 누나였습니다. 내게 건넨 한 음절 한 음절이, 후리지아 내음이 밴 듯 향긋하게 들려왔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 어떤 말을 하면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멋진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 피아노 못 치는데요.”

젠장, 천하제일 어리바리! 내겐 순발력도 재치도 가뭄콩이었습니다.

만약 바둑을 잘 뒀더라면 어땠을까요? 바둑을 잘 두던 벗이 있었습니다. 영균이. 아마추어 5단의 실력이라, 보통 사람들 중엔 적수가 거의 없었습니다. 학창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친구였습니다. 영균이의 생각과 말들은 종종 내 마음에 울림을 주었고, 나는 비결을 묻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멋쩍은 표정이 실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바둑을 둬서 그런가?”

내가 아는 바둑의 규칙은, ‘상대방의 돌을 내 돌로 에워싸서 잡고, 그렇게 내 집을 상대방의 집보다 더 넓게 키우면 승리한다’ 정도였습니다. 아는 게 거의 없던 내게도, 주어진 상황을 분석하고 다양한 변수를 예상해 준비하는 바둑은, 뭔가 심오한 깊이가 있어 보였습니다.

“바둑이 무슨 뜻이야?”

“옛날엔 ‘밭독’이라고도 불렀대. 경작하는 밭(田)처럼 줄이 그어진 바둑판 위에, 돌을 놓아서 영토를 넓혀가는 놀이야. 독은 돌을 가리키는 옛말이라네.”

“멍멍이 바둑이는 바둑이랑 무슨 관계야?”

“바둑의 흰 돌이랑 검은 돌처럼, 몸에 하얗고 검은 무늬가 있는 개를 바둑이라고 불렀대. 바둑을 ‘오로(烏鷺)’라고도 불렀는데, 까마귀와 백로가 대결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럴 거야.”

바둑의 다른 이름인 ‘오로(烏鷺)’에 착안해 백로와 까마귀가 바둑을 두는 모습을 AI로 제작해 봤다. 새머리들이라 룰까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진=Bing Image Creator>
“넌 모르는 게 뭐야?”

세월이 많이 지난 2016년 3월, 천재기사 이세돌이 구글의 AI 프로그램 알파고와 대국을 벌이는 중계방송을 보면서, 영균이가 생각났습니다.

“‘알파 고(Go)’의 고는 ‘바둑 기(棋)’의 바둑의 일본식 발음이잖아. 중국에서 만들어진 게임인데, 왜 중국어가 아니라 일본식 한자발음을 붙인 거야?”

“세계에 바둑을 전파한 나라가 일본이라서 그래. 유도(柔道)를 주도(judo)라고 부르고, 인삼(人蔘)을 진셍(ginseng)이라고 부르는 거랑 마찬가지겠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그러면 중국어로 바둑의 뜻은 ‘밭 위의 돌싸움’이 아니겠네?”

“맞아. 중국어로는 웨이치(围棋)라고 불러. ‘에워쌀 위(围)’에 ‘바둑 기(棋)’. 여기서 기(棋)는 윷놀이 할 때처럼 놀이판에 캐릭터 대신 말을 놓아서 하는 게임이란 뜻이야. 말은 야생마나 적토마가 아니라, 게임 캐릭터 칩이고.”

유레카(eureka)! 그제서야 이해가 갑니다.

“‘상대방 말을 포위해서 먹는 놀이’란 뜻이었어?”

“응, 이제 쉽지? 중국 요순 시대 임금이, 좀 아쉬웠던 아들의 사고력 발달을 위해 열심히 가르쳤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이해하자.”

“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많이 썼던 말인데, 이제서야 뜻을 알았네. 우리나라 바둑은 게임판과 돌의 모양에서 왔고, 중국 웨이치는 게임의 방식에서 온 거란 말이지?”

영균이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넌 대체 모르는 게 뭐야?”

사실 알파고 이야기는 제 머릿속 상상입니다. 오랫동안 영균이의 소식을 모릅니다. 어느날 갑자기 전화번호가 바뀌었고, 곧 연락이 올 거라고 기다리다가 어느새 14년이 흘렀습니다.

오랫동안 곁에 있는 게 너무 당연해, 소식이 끊기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 믿었었나 봅니다. 바둑을 배웠더라면, 이런 상황에 대비해 가족들의 연락처라도 미리 알아뒀을지도 모르겠단 아쉬움이 남습니다. 혹시 내게 서운했던 일이 있어 찾지 않는 거라면 좋겠습니다. 어디에 있든, 어떻게 살든, 즐겁고 건강하기만 소망합니다.

*감수: 안희돈 교수(건국대 영어영문학과). 건국대 다언어다문화연구소 소장. 전 한국언어학회 회장

[필자 소개]

말록 홈즈. 어원 연구가/작가/커뮤니케이터/크리에이터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22년째 활동 중. 기자들이 손꼽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커뮤니케이터. 회사와 제품 소개에 멀티랭귀지 어원풀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어원풀이와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융합해, 기업 유튜브 영상 제작.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