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 변화는 흔적으로 느낀다 [영화와 세상사이]

송상호 기자 2024. 3. 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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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

 

올해는 ‘중경삼림’ 개봉 30주년이다. 이에 맞춰 2월 말부터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해피투게더’, ‘타락천사’, ‘2046’을 비롯한 영화들과 함께 ‘중경삼림’이 극장가에 다시 소환되면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다. 사실 ‘중경삼림’과 같이 붙어 다니는 수식어 내지는 미사여구는 너무나 많다. 90년대 홍콩 반환 직전의 혼란스러운 감성을 잘 표현했다느니, 부유하는 청춘들의 감정을 형형색색 도시의 풍경과 엮어냈다느니 하는 말들이 그렇다. 심지어 영화가 동시대에 미치는 영향력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경찰 663 역으로 분한 배우 양조위가 극 중 처음 등장하는 순간은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여전히 반복 재생되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이제는 ‘중경삼림’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왜 대중의 무의식에 자리잡아 존재감을 발산하는지 들여다볼 때다. 과연 영화에 어떤 매력이 깃들어 있는 걸까.

‘중경삼림’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

■ 변화를 알아차리는 건 어려운 일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변화’를 인지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의 헤어스타일이 바뀌었는지, 같은 자리에 늘 두던 그 물건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를 둘러싼 환경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따져봐야 소통을 향한 창구가 열릴 수 있다. 하지만 변화를 알아차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하루가 지나 있거나 그 사람의 마음이 떠나갔거나 내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페이(왕페이)가 경찰 663(양조위)의 집을 몰래 청소하고, 집 내부의 물건이나 흔적을 임의로 바꿨지만 663이 크고 작은 변화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기에 ‘중경삼림’이 이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맴돌고 있는 영화고, 관객은 그들과 접속할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왜냐하면 영화가 관객에게 넌지시 물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들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과연 그들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던지고 있다. 1부와 2부로 쪼개진 구성에서, 네 명의 인물이 각기 다른 속도로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교차했다가도 평행선을 그린다. 관객들은 각기 다른 인물들의 사연을 매개로 영화 속에 뛰어들지만 이내 길을 잃어 버린 뒤 영화가 빚어낸 세계에서 치열하게 고민한다. 이제 관객들은 출구를 찾는 대신 인물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중경삼림’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

■ 과연 우리는 인물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중경삼림’을 어떻게 감상해야 친근하게 느껴질까. 먼저 영화 속 인물이 무언가 변화를 알아차리는 순간을 현실 속 관객인 우리들이 정확하게 짚어낼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해보자. 이유는 인물들 각자의 독백(내레이션) 때문이다. 그들이 각자의 사연이나 심리 상태를 늘어놓을 때 발화 시점과 화면 정보의 서술 시점은 늘 어긋나 있고 내적 세계에서의 인물의 발화 시점이 내레이션의 발화 시점과도 일치하지 않을 때도 많다.

경찰 663이 끝내 오지 않는 페이를 기다리다 체념하고 돌아서는 장면에서, 그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해하며 되뇌는 663의 목소리가 삽입된다. 이 구간에서 663의 음성을 통해 전달되는 그의 내면 상태, 그가 처한 상황은 함께 제시되는 장면들과 정확하게 호응하거나 일치하지 않는다. 이 점에 주목해보면 우리는 스크린 속 663은 어떤 마음일지 자유롭게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고, 또 목소리로 자신을 드러내는 663이 어떤 상황에서 말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중경삼림’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관객이 인물과 만나려는 방식에 따라 각자만의 경로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결코 똑같은 버전의 ‘중경삼림’을 감상할 수는 없다. 각자에게 각자만의 ‘중경삼림’ 판본이 생겨나는 셈이다.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 마약 밀매상(임청하)과 경찰 223(금성무)이 처음 가까워지는 순간. 223은 내레이션으로 자신의 내면과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때의 화자는 용의자를 쫓는 경찰 본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이때의 223은 현재 달리고 있는 223과 같은 시공간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이때의 내레이션이 열심히 내달리는 223의 내면 상태를 지시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프레임 밖으로 223이 벗어난 뒤에도 화자의 내레이션은 독립적으로, 마치 미래를 예언하듯이 밀매상의 존재를 223 본인의 서사에 편입시키려고 한다. 하나의 인물이 분열된다. 카메라에 찍히는 인물, 그리고 그 인물의 내면을 서술하려는 존재로 갈라지고 있다.

‘중경삼림’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

■ 변화를 느끼려면, 흔적을 붙잡아야

결국 ‘중경삼림’ 속 인물은 자신의 변화 상태를 관객에게 제대로 털어놓을 수 없다. 관객은 이들의 감정 혹은 심리에 관한 정보를 전달받거나 수용할 수는 있어도 인물들과 이러한 것들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는 없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그럴 수 없는 영화라고 봐도 좋다.

그렇다면 ‘중경삼림’에서 인물과 가까워지기 위해선 그들 주변을 맴도는 것들에 집중해야 한다. 그들과 관계된 모든 요소들이 그들의 심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 속 세계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무언가를 지시하는 흔적이라든가 물리적인 매개체 따위의 것이다. 우리는 흔적과 매개체를 통해 ‘변화’를 느끼기 때문이다. ‘중경삼림’을 보는 관객들은 통조림을 먹는 223 자체를 조명하기보다는 인물의 손에 들린 통조림을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 또 관객들은 술집과 식당이나 운동장 그리고 경찰의 집에 머무르면서 무엇이 예전과 달라졌는지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문득 663이 집에 둔 비누를 보면서 말을 거는 장면이 떠오른다. 비누에게 왜 뚱뚱해졌냐며 말을 거는 663은 “그녀는 없지만, 자신을 돌봐야지”라고 내뱉는다. 그이가 같이 집에 있을 당시도, 그이가 떠나고 나서 집이 삭막해졌을 때도 비누는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변화의 순간을 다시금 환기하게 만드는 매개체가 됐다. 여러 사람이 나와 각자만의 사연을 풀어내고 있지만 도통 사람들의 생기가 넘실대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들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건 역시 흔적들이다. 그렇기에 ‘중경삼림’은 통조림의 영화, 삐삐의 영화, 인형과 빨래 그리고 비누의 영화, 냅킨의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송상호 기자 ssh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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