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이별 잇는 인연, 디아스포라의 진보된 서사로

김은형 기자 2024. 2. 2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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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 송 감독 ‘패스트 라이브즈’ 6일 개봉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제공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가 6일 한국 극장에 도착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등 거장 감독들이 최고의 데뷔작으로 찬사를 보낸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최고의 오프닝을 꼽을 때 두고두고 언급될 만하다.

늦은 시간 어둑한 바에서 아시아 남자와 여자, 백인 남자가 나란히 앉아 이야기한다. 카메라는 이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바 건너편 남녀의 시점 쇼트로 그들의 관계를 추측한다. “동양 여자랑 백인 남자가 커플이고 동양 남자는 오빠 같아” “동양 여자랑 남자가 커플이고 백인 남자가 둘의 친구이거나” “백인 남자랑은 얘기도 안 하잖아” “그럼 둘은 관광객이고 백인 남자는 가이드?” “직장 동료인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멈춘 뒤 두 남자 사이에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모습은 비추지만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음으로써 영화는 이 세 사람의 관계,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인연’을 미스터리 구조 안에 넣는다. 직후 카메라는 2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첫 장면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실타래 풀듯 천천히 풀어나간다.

29일 내한해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기자들과 만난 셀린 송 감독은 이 첫 장면에 대한 자전적 경험으로 영화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열두살 때 캐나다로 이민 가기 전 친했던 한국 친구가 미국에 와서, 미국인 남편과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노라(그레타 리)처럼 두 사람 사이에 앉아 통역을 했는데 둘이 서로에게 나에 관해 묻더라. 그 순간 내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여기 함께 있구나, 이들이 내 역사와 정체성을 연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 감독은 “이때의 강렬한 경험을 첫 장면으로 하는 이야기가 떠올랐고, 캐릭터들의 대화를 공개하기보다 낯선 타인이 이들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야기로 풀어간다는 설정을 잡으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제공

영화는 나영이 이민을 떠나기 직전 열두살 소년 소녀의 애틋한 감정을 지나 12년 뒤 소셜미디어에서 다시 만나는 해성(유태오)과 노라라는 미국 이름을 갖게 된 나영의 20대 중반을 그린다. 반가움은 그리움으로, 어린 시절 어렴풋했던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하지만 ‘롱디’의 벽 앞에서 둘은 다시 각자의 길을 간다. 그리고 다시 12년 뒤 해성은 뉴욕으로 휴가를 와서 유대인 남자와 결혼하고 극작가로 살아가는 노라를 만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뉴욕에서 해성과 노라가 보내는 이틀의 시간을 농밀하게 담는다. 공원, 유람선 등을 옮겨가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들, 어린 시절의 회고, 달라진 상대방에 대한 인상 등 둘이 나누는 대화 사이에 파고드는 짧은 침묵들이 물결 퍼지듯 대화의 여운을 증폭시킨다. 나영으로서의 삶을 한국에 두고 온 노라, 그 삶을 아직 붙잡고 있는 해성, 노라 이전 나영의 삶이 궁금한 미국인 남편 아서(존 마가로) 등 세 인물이 지닌 각자의 호기심과 그리움, 과거의 시간이 현재를 침투했을 때 느껴지는 낯섦 등의 감정을 영화는 대칭적인 화면 편집을 통해 감각적으로 살려낸다.

노라가 아서에게 설명하는 “인연”은 세 사람이 만나 겪는 감정적 파고를 통해 불교적 윤회의 의미를 넘어 디아스포라의 진보된 서사로 도약한다. ‘미나리’가 보여준 역경의 역사, ‘성난 사람들’이 보여주는 고립과 불안을 지나 이동, 떠남이라는 계기가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축조하는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제공

해성을 연기한 유태오는 영화에서 지극히 보편적인 한국의 평균 남성을 연기했지만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국과 영국에서 청년시절을 보내며 나영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이날 기자들과 만난 유태오는 “던져진 듯한 상황에 살아 가면서 결핍감이나 멜랑콜리 같은 감정을 평생 느껴왔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보고 영화의 정서에 금방 빠져들었다”고 했다. 유태오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배우로서 어눌한 영어를 연기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서구 미디어에서 너드나 코믹 캐릭터로 주로 소비하며 인격 부여가 부족했던 한국 남성 캐릭터를 무게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게 가장 큰 숙제였다”고 말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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