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식 때 왜 짜장면?…목포 ‘1965년 가격표’ 보며 알아봤다

박미향 기자 2024. 2. 2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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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의 미향취향
짜장면 이야기·목포 짜장면 ‘중깐’
‘중화루’에서 파는 짜장면 ‘중깐’. 가격은 7천원. 박미향 기자
미향취향은?

음식문화와 여행 콘텐츠를 생산하는 기자의 ‘지구인 취향 탐구 생활 백서’입니다. 먹고 마시고(음식문화), 다니고(여행), 머물고(공간), 노는 흥 넘치는 현장을 발 빠르게 취재해 미식과 여행의 진정한 의미와 정보를 전달할 예정입니다.

“졸업식, 입학식 때가 대목이었죠. 엄청났죠. 손님이 많았는데, 주로 짜장면을 주문했어요. 제가 어릴 때 얘기죠. 목포에 중국집으로는 우리가 제일 컸으니까요. 다들 오셨죠. 짜장면은 특별한 날 먹는 음식이었어요.”

전라남도 목포시 목포오거리에 있는 중식당 ‘중화루’(목포시 노적봉길 7-1)의 주인장 겸 요리사인 왕윤석(65)씨가 하는 말이다. 왕씨가 어린 시절이었던 1960~70년대에는 ‘특별한 날’ 짜장면을 먹었다. 지금도 이어지는 전통이다. 왜일까.

마포구에 있는 한 중식당에서 파는 짜장면. 박미향 기자

1880년대 중국 산둥 지방에서 인천항으로 온 중국인 노동자들이 해먹던 면 요리가 짜장면 탄생의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다. ‘짜장면’이란 글자가 신문에 처음 등장한 때는 1936년. 1936년 2월16일치 ‘동아일보’를 보면 ‘전조선 남녀 전문학교 졸업생 대간친회’를 보도하며 ‘우동 먹고 짜장면 먹고 식은 벤또 먹어가며 그대들을 가르쳤느니라’라는 기사가 있다. 1940~50년대로 넘어가면, 짜장면은 청요릿집이나 고급 중화요리점에서 먹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면 요리의 일종이었다. ‘짜장면’이 지금처럼 ‘국민 음식’으로서 독자적인 위상을 갖춘 게 아니었다는 소리다.

한국전쟁 종전 후 미국은 자국 잉여농산물을 한국 등에 무상 공급했다. 그 하나가 짜장면의 재료가 되는 밀가루였다. ‘중국요리의 세계사’의 저자이자 식문화 연구가인 이와마 가즈히로 게이오기주쿠대학 교수는 자신이 쓴 책을 통해 “미국 밀가루 무상 원조가 일본에서 라멘이, 한국에서 짜장면이, 타이완에서 우육면이 국민 음식이라 불릴 정도로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짚었다.

1960년대에는 정부가 혼분식장려운동(1970년대 쌀 생산 부족을 메우기 위해 혼식과 밀가루가 주식인 분식을 강제한 운동)을 펼쳤는데, 이 또한 짜장면 대중화에 일조했다. 하지만 미국의 밀가루 무상 원조는 우리 밀 농사 생태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1970년대 이전까지 활발했던 국내 밀 생산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 1920년대만 해도 한반도에 밀 생산지는 흔했다. 이젠 국내 밀 시장의 80% 이상이 수입 밀에 의존하는 지경이다.

서울 시내 한 중국집에서 파는 짜장면. 박미향 기자
서울 시내 한 중국집에서 파는 짜장면. 박미향 기자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끝나자, 밀가루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짜장면 가격에 영향을 미쳤다. 1969년 10월4일치 ‘경향신문’을 보면 “50원씩 받던 짜장면 값을 올려 60~70원에 받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집 주인들은 재료비 상승을 원인으로 꼽았다. 1979년 2월16일치 ‘매일경제’ 기사에도 “짜장면 가격이 올라 지역에 따라 한 그릇에 2백50원에서 3백원한다”고 적혀있다. 과거 짜장면이 ‘특별한 날’ 먹는 음식이 된 이유다. 이후 ‘밀 수입 자유화’(1982년) 등 정부의 일련의 조치를 거치면서 국내 생산 밀보다 싼 수입 밀이 우리 밥상을 지배하게 된다.

중화루에 가면 1960년대 짜장면 가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누런 종이에 적힌 ‘1965년 가격표’가 액자에 끼워져 벽에 걸려있다. 왕씨는 “당시 부친이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1947년 중화루를 문 연 작은할아버지, 1950년부터 맡아 식당을 키운 부친 왕서은(2006년 작고)씨의 뜻을 이어 1995년부터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3대가 이어 영업하는 목포 대표 노포인 것이다. 가격표에는 짜장이 60, 간짜장이 80, 군만두 120, 물만두 120, 보꾼밥 100, 라조기 400, 댄뿌라 300 등이 적혀있다. 추억이 돋는 글자와 숫자다.

‘중화루’ 벽에 걸린 ‘1965년 차림표’. 박미향 기자
‘중화루’에서 파는 짜장면 ‘중깐’과 탕수육. 박미향 기자

중화루에는 특별한 짜장면이 있다. 이곳에 와야만 먹을 수 있는 짜장면이다. 왕씨가 자랑하는 이 집의 짜장면 이름은 ‘중깐’. “중깐도 아버지가 만드셨죠.” 장사 솜씨가 뛰어났던 부친은 직원이 13~15명에 이를 정도로 중화루를 규모가 큰 청요릿집으로 키웠다. “손님들이 푸짐한 요리를 먹고 난 다음 기스면이나 짜장면을 먹었어요. 아버지는 넉넉하게 만드셨는데, 손님들은 배가 부르니까, 남겼어요. 그게 아까우셨죠. 면 굵기를 가늘게 빼고, 채소나 고기를 더 다져서 후식 개념으로 면을 비벼 냈어요.” 손님들은 이 후식을 ‘중화식당 간(깐)짜장’이라고 불렀다. 중화식당은 중화루의 옛 이름이다. 씹을 틈도 없이 술술 넘어가는 ‘중화식당 간(깐)짜장’은 단박에 인기 메뉴가 됐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줄여서 ‘중깐’이라 부르며 찾았다. 단골들 입으로만 전해졌던 ‘중깐’은 2000년대 중반 당당히 차림표에 정식 메뉴로 올라갔다. 2022년엔 상표등록도 마쳤다.

‘중화루’ 주인 겸 요리사 왕윤석씨. 박미향 기자
‘중화루’ 외관. 박미향 기자

부친이 물려준 근사한 음식이 있어도 장사가 쉽지는 않았다. 1990년대 신도시 개발에 밀려 중화루가 있는 구도심이 쇠퇴해갔기 때문이다. 5형제 중 둘째인 그는 중화루를 지켜내는 게 자신의 소임이라고 믿었다. “아버지가 한 거니까, 그냥 한 거예요. 그냥 이거 하고 싶대요.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그냥 했어요.”(웃음) 손님이 날마다 줄어도 그는 버텼다. “우리 가게가 엄청 귀하더라고요. 책도 보고 하니까. 50년, 70년 된 식당도 주인이 막 바뀌잖아요. 우리는 아닌데요, 그런 점에서 귀하다는 생각 들었어요. ‘꼭 지켜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버틴 보람은 있었다. 2010년대 중반부터 구도심이 예스러운 여행지로 부각되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하루 200그릇 이상 판 적도 있다. “그런대로 오시니, 살 만하게 되었어요.” 그는 ‘생활의 달인’(SBS) 등 방송에도 출연해 ‘짜장면 장인’으로 인정받았다. 중화루는 전국적으로 유명 짜장면집이 됐다. “제 아들도 하겠다면 시킬 생각입니다.”

‘중화루’ 옛 모습이 담긴 사진. 왕윤석씨 제공
‘중화루’에서 파는 짜장면 ‘중깐’ 소스. 박미향 기자
‘중화루’에서 파는 짜장면 ‘중깐’ 면. 박미향 기자

중깐 한 그릇을 받아들면 양배추 향이 훅 코를 치고 지나간다. 중깐 소스는 생강, 마늘, 양파, 양배추 등을 다져 만든다. 면은 일반 짜장면보다 굵기가 반이다. “요즘 사람들 입맛 고려해 아버지 때보다 조금 달게 했어요. 옛날에는 간장 소스였어요.”

지금은 한강 둔치에서도, 공원 한가운데서도 전화 한 통화면 배달이 가능한 대표 ‘배달음식’이자 ‘국민 음식’이 짜장면이다. 이 음식엔 한국 현대 식문화사가 녹아있다. 왕씨의 마지막 말은 울림이 크다. “어디 안 힘 드는 일이 있나요. 그냥 열심히 하면 살았어요. 그러다 보면 좋은 날도 오고! 안 오면 어때요. 그냥 그 모든 날이 좋지요.”

목포/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참고문헌 : ‘중국요리의 세계사’(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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