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한국인] "보이는 것은 나인가, 내 자아인가"
[편집자주] [뉴욕의 한국인]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뉴욕에서 전세계를 상대로 활약하는 한국인과 한국계 코스모폴리탄들의 분투기를 찾아 고국에 전하겠습니다.
탁월함은 때로 천재성 보단 결핍에서 출발한다. 뉴욕의 일루전 아티스트 윤다인은 집안의 둘째였다. 언니는 아빠를 닮아 공부를 잘해 엄마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화가인 엄마는 자신을 닮은 둘째보다는 첫째를 더 아끼는 것 같았다.
일찍 철이 든 탓일까. 엄마에게 투정 부리기보단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미술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일등을 놓쳐본 일이 없다. 하지만 엄마는 기대만큼 기뻐해 주진 않았다. 어쩌면 어떤 칭찬보다는 엄마가 언니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 그리웠나 보다. 해소되지 않은 욕구가 항상 스스로를 지배했다.
중·고등학교 때까진 회화를 그리다가 상업 미술을 위해 대학에서 무대미술을 전공했다. 하지만 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나갔던 영화 메이크업 아티스트 실습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주인공이 살짝 추락하는 신이었는데 그가 다칠 걸 염려한 스텝실장이 메트리스처럼 뒤를 받치라는 것이었다. 그게 농담이든 진담이든 들러리 취급받는 게 싫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난데 부속물이나 엑스트라로 살긴 싫었다. 주목은 내가 받아야 했다.
대학 공연장에서 일하다가 문득 연극을 위한 분장이 아니라 내 포트폴리오를 위한 결과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객을 바꿔본 것이다. 영화 현장에 실습을 나갔을 때 유명한 실장도 그랬다. 이런 걸 어떻게 십년 넘게 버티냐고. 그러면서 '그럼 네가 한 번 바꿔봐'라고 했다.
그래서 연기자 선배 오빠를 한 명 섭외해 PPT로 시안을 보여주곤 얼굴과 상체를 캔버스 삼아 순수작업을 시도했다. 그를 발판으로 나를 캔버스 삼아 남긴 습작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갑자기 팔로워가 늘었다. 그리고 한 달 뒤엔 상업 제안이 들어왔다.
인생이 어떻게 한 번에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8년을 사전에 없던 '일루전 아티스트'로 살았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캔버스는 이제 내 얼굴과 내 몸이 됐다. 점점 유명해져서 좋긴 했는데, 역시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내막을 모르는 법이다. 아티스트가 되어 갈수록 외로웠다. 의뢰받은 것을 충실히 작업하려고 있는 힘 없는 힘을 쥐어짜고 나면 속 안은 텅 비어버리기 일쑤였다.
2021년 여름에 거처를 미국으로 옮겼다. 어차피 이름도 생소한 일루전 아트를 한국에서 십년 더 설명하고 다닐 바에야 세계시장에 먼저 알리자는 생각으로 왔다. 십대에 잠시 와봤던 미국은 생각보다 더 낯선 도시였다. 미국이라고 해서 이름도 생소한 아티스트를 특별히 반기지는 않았다.
대신 한 가지 수월한 것은 사는데 있어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눈빛은 '아, 쟤는 왜 저렇게 살지'였다면 미국은 '저 친구는 그냥 저렇게 사는구나'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시커먼 암흑이 날 삼키려 할 때쯤 깨달았다. 한국에서도 외롭지 않은 적이 있던가. '맞아 실은 이 예술적인 절망을 찾아온 것이었지'. 연고도 없던 이곳에 갑자기 옮겨붙어서는 언제나 그랬듯 결핍에서 에너지를 얻어냈다. 존재감 없이 스며들었지만 어느 새 이미 살이 차오른 혹덩어리가 되자.
윤다인이 아티스트로 치열하게 스스로와 분투한 결과는 작품과 명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1000건 이상의 작품이 만들어졌고 애플과 메르세데스벤츠 스냅챗 화이자 등이 상업물을 의뢰한다. 관심을 받아보려고 시작한 작업이 삶을 바꿨지만 지나친 관심과 기대는 스스로를 숨게 만들었다. 창의성을 이끈 것은 주목이 아니라 결핍이었기 때문이다.
윤다인은 "추상화를 그리던 엄마를 어릴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요즘에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며 "어릴 적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미술을 하면서는 등수에 집착하곤 했는데 그랬던 내게 엄마가 왜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어쩌면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깨닫고 있다"고 했다.
박준식 머니투데이 뉴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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