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인연' 주제로, 세계 관객들 '연결'한 셀린송 감독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2. 28.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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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3월 6일 개봉
유년시절 함께한 소녀·소년
오랜 이별 끝에 뉴욕서 재회
운명·우연·사랑 탐구한 작품
과천 국립현대미술관·평촌 등
작품 곳곳에 한국 풍경 가득
개봉 맞춰 각본집도 출간
셀린 송 감독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한 장면. 첫사랑이었지만 30대에 재회한 나영과 해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CJ ENM

사랑에 관한 영화이지만 사랑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맺는 감정의 관계를 들여다보면서 그 안에서 '인연'이란 소중한 단어를 캐내 의미를 되묻는 영화다. 3월 11일(현지시간) 미국 LA 돌비극장에서 개최하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 작품상·각본상 2개 부문 후보 '패스트 라이브즈'가 베일을 벗엇다. 28일 언론 시사회에서 영화를 미리 살펴봤다.

골목길을 오르는 소녀 나영은 같은 반 친구 해성을 좋아한다. 둘은 1·2등을 앞다툴 만큼 공부를 잘했고, 하굣길을 공유하는 단짝이었다. 사랑이란 단어의 뜻도 알기 어려운 나이, 둘은 그러나 서로를 좋아해서 생각할수록 배시시 웃음부터 난다. 나영 부모가 캐나다 이민을 결정하면서 소년과 소녀는 불가항력적으로 헤어진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 둘은 서로에 대한 보이지 않은 끈을 느낀다.

시간이 흘러 20대가 된 나영과 해성은 페이스북의 힘으로 연결된다. 둘은 사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영은 해성이, 해성은 나영이 자신을 주시하며 찾고 있으리란 것을.

노트북 모니터를 보며 수개월간 대화를 나누던 둘은, 그러나 연락은 끊기로 한다. 상대에 대한 애착이 강해지면서, 현실에 대한 충실함 대신 그리움만 강해져서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30대가 된 해성은 나영이 두 번째 이민지로 택한 뉴욕행을 택한다. 다만 관계는 전과 같지 않다. 많은 조건이 달라졌다. 극작가인 나영이 7년 전 한 유대인 작가와 이미 결혼한 것. 해성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며, 유대인 작가인 나영의 남편도 해성의 존재를 안다.

영화는 이 지점부터 쉬운 표현이 불가능한 깊이로 깊어진다. '페이스북을 통한 첫사랑 찾기'라는 흔한 함정을 피하고 인간이 맺는 인연이란 과연 무엇인가란 거대한 화두를 던지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는 인간의 항구적 조건이다. 우리는 누구나 현재 이 순간, 바로 이곳에서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앞서 누구나 '그때, 거기'를 지나온 존재들이다. '지금, 여기'와 '그때, 거기' 사이를 지나는 인간에겐 무수한 관계망이 형성되고, 그때 우리의 선택과 결심이 '인생'을 구성한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바로 그 인연을 질문한다.

셀린 송 감독은 시사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영화에서 단어 '인연'을 한국어 그대로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인연의 감정과 느낌은 전 세계 누구나 이해 가능하기 때문"이라며 "영화를 보고 나면 어느 나라 관객이더라도 인연이란 단어에 대해 알게 될 것"이라며 웃었다.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의 뜻은 전생(前生)이다. 불교식 윤회에 기댄 용어이지만, 영화가 갖는 함의는 윤회나 전생을 넘어선다.

꾹꾹 눌러쓴 것이 분명해 보이는 두 배우들의 대사를 들으면 스크린으로 달려나가 보이지 않는 밑줄을 긋고 싶을 지경이다. 30대 젊은 감독이 쓴 각본이라고 믿기 어려운 넓이와 깊이의 명대사가 관객 마음에도 실금을 낸다. 특히 영화 속 나영의 마지막 대사인 "그때 보자"에 이르면, 왜 이 영화가 세계 영화인의 극찬을 받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때'의 의미는 영화관을 직접 찾은 관객만이 오롯이 느끼게 될 선물이다.

한국적 요소도 가득하다. 박카스, 김광석, 콩나물국, 화투, 육개장, 평촌,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등 한국인은 모두가 아는 사물, 인물, 장소가 은밀한 유머처럼 장착됐다. 가수 장기하의 출연도 반갑다. 20대 한국 남성이 자주 가는 소줏집, 군대 행군길에 먹는 식판 배식 등 장면도 인상적이다.

우천이 예보된 뉴욕, 해성을 비추는 물웅덩이, 교각이 우뚝 서 있는 강, 나영과 해성이 마시는 술 등 물의 이미지가 상영 2시간 내내 반복된다. 물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도 눈여겨볼 포인트다. 강물처럼 스미다 인연에 취하게 만드는 영화다.

뉴욕의 거대한 다리는 떨어진 시공간을 살아가는 인간을 잇는 인연에 대한 시각적인 상징물로 보인다. 그러나 나영과 해성은 같은 자리를 뱅뱅 돌아 원위치로 돌아오는 영원성의 회전목마 앞에 앉아 있게 될 뿐이다. 그것은 둘의 운명, 또 보편적인 인간의 운명을 닮았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현재 전 세계 영화 시상식에서 75개의 트로피를 이미 받아냈고, 후보로 오른 부문은 총 210개다. 3월 오스카 시상식에서 셀린 송 감독이 후보로 오른 작품상 부문 경쟁작은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펜하이머', 마틴 스코세이지 '플라워 킬링 문' 등이다. 한국 영화 '넘버3'를 만든 송능한 감독의 딸인 셀린 송 감독이 첫 데뷔작으로 세계 최고의 거장과 겨루게 됐다.

뉴욕타임스는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해 "운명, 우연, 사랑 그리고 영혼과 영혼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실에 대한 탐구를 훌륭하고 감동적으로 표현한 영화"라고 상찬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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