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맞아 알아보는 강치와 삽살개…일제 수탈로 자취 감추거나 멸종 위기에 처한 ‘독도 지킴이’

안광호 기자 2024. 2. 2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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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릉도 통구미에 세워진 강치 동상. 해양환경공단 제공

‘강치와 삽살개’. 일제의 독도 침탈 야욕으로 무자비하게 도살된 동물들이자 독도의 상징이다. 강치는 멸종됐고, 삽살개는 가까스로 복원에 성공했다.

28일 해양수산부 등에 따르면 독도 바다사자로 불린 강치는 몸길이 2.5m 내외로, 군집을 이뤄 생활했다. 한국과 일본, 러시아 등 인근해에서 주로 서식했는데, 특히 1900년대 초엔 을릉도와 독도 주변에 수만 마리가 무리를 지어 살았다. 강치는 성격이 온순해 어선이 다가와도 도망가거나 경계하지 않아 맨손으로도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는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에 강제 편입한 후 강치잡이 전담 회사를 만들어 닥치는대로 강치 사냥에 나섰다. 강치는 일본 어부들의 주 수입원 중 하나였다. 이들은 강치의 가죽으로 가방이나 모자챙 등 일상 소모품을 만들고, 지방은 기름으로 사용했다.

독도 강치 개체 수는 1910년대 초 8500마리에서 이후 지속적으로 포획되면서 1930년에 790마리, 1940년에 227마리 등으로 개체 수가 급감했다. 일제는 1941년까지 약 1만6500마리를 남획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치는 1974년 일본 훗카이도에서 비공식 관측된 것을 끝으로 자취를 감췄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1994년 독도 강치의 멸종을 공식 선언했다.

한국 고유의 토종견인 삽살개도 일제강점기 멸종 위기에 처할 정도로 수난을 겪었다. 삽살개는 일제강점기 이전엔 우리 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장 친숙하고 흔한 개였다. 긴 털이 얼굴을 덮어 신선과도 같은 외모를 가졌다 해서 ‘액운을 쫓는다’는 뜻의 ‘삽살’이란 이름이 붙었다. 삼국시대 김유신 장군의 군견이었을 정도로 용맹한 점도 특징이다. 한국삽살개재단에 따르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조선총독부는 군대의 방한복과 방한모를 만들기 위해 조선원피주식회사를 설립했고, 이 회사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7년에 걸쳐 최소 100만~150만 두의 우리 토종견을 도살했다. 일제는 일본 개와 생김새가 닮은 진돗개와 풍산개는 각각 1938년과 194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반면 삽살개는 생김새가 일본 개와 다르다는 이유에서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그들이 노린 것은 삽살개의 모피였다. 삽살개는 긴 털과 방습·방한에 탁월한 가죽을 가진 탓에 집중 공격 대상이 됐다.

삽살개 복원 작업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됐다. 경주 일원과 강원 남부의 산간벽지에서 비교적 원형이 유지된 삽살개 30두를 찾았다. 1985년 DNA 지문기법을 통한 원형 복원에 성공했고, 1992년엔 천연기념물 제368호로 지정됐다. 1990년대 후반 일본 정부의 독도 역사 왜곡이 극에 달하자 한국삽살개보존회와 경북도 등은 삽살개를 독도에 정착시켰고, 삽살개는 지금까지 독도지킴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지난 27일 삽살개의 역사를 알리는 4분짜리 다국어 영상을 제작해 온라인에 공개했다. 서 교수는 “삽살개는 일제의 토종개 도살 행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며 “삼일절을 앞두고 독도의 상징인 삽살개의 역사를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독도의 삽살개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안광호 기자 ahn787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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