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불명’ 아파트 이름에 ‘장미·개나리’ 고운 낱말 돌아올까?

정인선 기자 2024. 2. 2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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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공동주택 이름 길라잡이’ 발간
지난달 16일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에서 본 서울의 아파트 단지 모습. 연합뉴스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빛가람 대방엘리움 로얄카운티 1차’(25자), ‘동탄시범다은마을 월드메르디앙 반도유보라 아파트’(22자)…

그동안 ‘길고 긴’ 이름으로 눈길을 끌었던 아파트 이름이다. 부동산 정보 조사업체 ‘부동산인포’의 2019년 조사를 보면 1990년대 평균 4.2자이던 아파트 이름은 2000년대 6.1자, 2019년 9.84자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글자수가 길어지는 것은 물론 온갖 외래어 등이 결합한 국적 불명의 아파트 이름도 속속 등장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시어머니가 못 찾는 아파트 이름”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동네 이름에 건설사명과 브랜드는 물론 ‘센트럴’, ‘팰리스’, ‘퍼스트’, ‘엘리움’ 등 외래어 별칭(펫네임)까지 겹겹이 붙어 뜻을 알기도, 기억하기도 어려워진 아파트 이름에 변화를 주기 위한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가이드라인이 처음으로 나왔다.

서울시는 한글과 고유 지명 등을 활용해 편리하고 쉽게 부르거나 외울 수 있는 아파트 이름이 자리 잡도록 돕는 ‘아파트 이름 길라잡이’를 펴냈다고 28일 밝혔다. 서울시는 이번 가이드라인 마련을 위해 2022년 말부터 지난해 말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학계 전문가, 조합, 건설사 등이 참여하는 토론을 벌였다. 아파트 이름 짓기와 관련한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건 전국 지자체 가운데 처음이다.

이는 아파트 이름에 생소한 외래어를 쓰는 경우가 늘면서 우리말이 파괴되고 생활 불편이 늘어난다는 지적에 따른 조처다. 이러한 현상은 건설사들의 고급화 전략과 함께 브랜드명 아파트가 나오면서 시작됐다. 강, 호수 조망을 부각하려 ‘리버’ ‘레이크’를 붙이고 고급스런 이미지를 준다는 이유로 ‘퍼스트’, ‘베스트’, ‘노블’ 등의 영어 표현이 더해지면서 아파트 이름이 점점 길어졌다. ‘집값’에 도움이 된다며 특정 법정동·행정동 이름을 넣는 시도도 종종 있었다.

이에 서울시는 가이드라인에서 어려운 외국어 사용 자제하기, 고유 지명 활용하기, 애칭 사용 자제하기, 적정 글자 수 지키기, 아파트 이름 변경 시 절차 따르기 등 크게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시는 “아파트 이름을 짓거나 바꿀 때 참고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각 구청과 조합, 건설사에 공개·배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시 정비사업 정보몽땅 누리집 자료실에서도 누구나 가이드라인을 내려받을 수 있다.

가이드라인 ①“우리말 이름 발굴”

시는 우선 “어려운 외래어·외국어 사용을 자제하고 우리말로 된 아파트 이름을 발굴하자”고 제안했다. 시는 “아파트가 많아지면서 차별화를 위해 외래어 애칭 (펫네임)을 사용한 아파트 이름이 인기”라며 “아파트 이름에 외래어 ·외국어를 경쟁적으로 사용하면서 뜻을 알기 어려운 말이 길게 나열돼 오히려 의미와 가치가 퇴색되고 있다”고 짚었다. 시는 ‘사랑으로’ , ‘하늘채’ 등 실제 아파트 이름에 쓰인 순우리말을 예로 들며 “아름답고 부르기 쉬운 우리말 이름이 아파트의 가치를 한층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가이드라인 ② “‘미추홀’처럼 옛 지명 활용 어때요”

아파트 이름이 지명으로 활용되는 만큼 공공성을 띈다는 점을 고려해, 아파트가 속한 지역의 옛 지명이나 주변 유명시설(랜드마크) 등을 활용한 이름을 짓자는 제안도 이어졌다. 시는 “법정동·행정동에 따라 아파트의 가치나 가격이 달라질 수 있다는 현실 때문에 아파트가 있는 지역의 법정동·행정동이 아닌 다른 법정동·행정동 이름을 붙이는 사례가 있다”면서 “이런 이름은 자칫 사람들의 인식에 혼란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몇 년 전 한 건설사가 인천에 아파트를 시공하며 인천의 옛 이름인 ‘미추홀’을 사용해 단지 이름을 차별화했다”면서 “지명을 활용하더라도 충분히 개성 있는 이름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서울시가 동네 이름, 건설사명, 외래어·외국어 애칭 등이 겹겹이 붙어 뜻을 알거나 외우기 어려운 아파트 이름을 개선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28일 발간했다.

가이드라인③ “근처에 공원있다고 ‘파크’? 이제 그만”

시는 최근 아파트 이름이 길어지는 가장 큰 이유로 꼽히는 애칭 사용을 자제해 달라고도 했다. 시는 “근처에 공원이 있다면 ‘파크’, 개발지구나 해당 지역의 중심부에 들어선다면 ‘센트럴’, 강이나 호수를 끼고 있다면 ‘리버’, ‘블루’ 등 다양한 애칭이 쓰인다”며 “애칭이 같은 지역 같은 브랜드 아파트의 단지를 구분해 주는 역할을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정작 애칭을 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 만큼, 처음부터 이름에 애칭을 쓰지 않는 게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밝혔다.

가이드라인④ “어차피 줄여 부를 거 10자 안 넘게”

여러 혼란과 불편을 줄이기 위해 아파트 이름이 최대 10자를 넘어가지 않도록 하자는 원칙도 제시했다. 시는 “전남 나주의 한 아파트는 이름이 25자로 전국에서 가장 긴데 정작 사람들은 이를 6자로 줄여 부른다”면서 “멋지게 지어 놓은 이름이 불편해서 쓰지 않는다면 그 이름은 아파트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처음부터 사용하기 편한 이름으로 짓는다면 각종 전산 시스템에서 주소를 입력하거나 우편물, 택배를 받을 때, 택시를 타고 이동하거나 내비게이션 등을 이용할 때에도 편리할 것”이라고 했다.

가이드라인⑤ “이름 바꿀 때는 절차 지켜야”

시는 조합이나 건설사가 아파트 이름을 바꿀 때 공모나 선호도 조사 등 ‘건축물대장의 기재 및 관리 등에 관한 규칙’이 정한 절차를 빠뜨려선 안 된다고도 강조했다. 아파트 이름을 처음 지을 때는 건설사가 서너개를 정해 제안한 뒤 조합원 설문조사와 대의원 투표로 확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후 지어진 이름을 바꿀 땐 입주 전이라면 수분양자, 입주 뒤라면 소유주 80%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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