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 장편 ‘문신’ 완간… “필생의 역작이라 믿고 버텨”

박동미 기자 2024. 2. 2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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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연재시작 후 30여년만
일제강점기 속 가족모습 담아
“박경리 선생의 뜻 이제야 이뤄”

“‘큰 이야기 쓰라’던 박경리 선생 뜻 이제 이룹니다. 부끄러워도 ‘필생의 역작’이라 믿고 버티며 썼습니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완장’ ‘장마’ 등 한국 문학사에 이미 깊은 족적을 남긴 윤흥길(82·사진) 작가가 스스로 ‘대표작’이 될 것이라고 공언한 장편 ‘문신’이 오는 3월 1일 완결·출간된다. 2020년 3권까지 나온 상태에서 이례적으로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한 소설은 총 5권으로 마무리된다. 지난 27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완간 기념 간담회에서 윤 작가는 ‘문신’이 ‘토지’ 같은 대하소설이 되지 못한 채, 결국 다섯 권짜리 ‘중하소설’로 낙착됐다고 자조하면서도 “‘큰 작품’이란 긴 작품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통찰력을 갖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던 박 선생의 말을 기억한다”고, 작가 인생 55년에서 ‘문신’의 출간이 갖는 의미에 대해 강조했다.

‘문신’은 일제강점기 한 가족이 엇갈린 신념과 욕망, 그리고 갈등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비극의 시대를 마주하는 이야기다. 1989년 연재를 시작했으니 무려 30년도 더 걸렸다. 잡지가 여러 번 폐간하며 글쓰기가 중단됐고, 자연스럽게 의지가 꺾이곤 했다. 또, 불청객 같은 긴 공백기가 수시로 찾아왔고, 최근 몇 년은 육신의 노쇠와 질병과도 싸워야 했다. 말 그대로 악전고투. 이날 윤 작가는 “쓰지 말라는 신호인 양 느껴지기도 했고, 써서는 안 되는 작품 같다는 사위스러운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며 악순환의 연속이었던 집필 과정을 회고했다.

인고의 시간을 견딘 소설. 그 속엔 인고의 시간을 지나는 다종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다. 누군가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다. 누군가는 그 ‘대한’을 ‘조선’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 하고, 누군가는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는다. 자유와 보신, 신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가 있고, 이 모든 걸 기회 삼는 이가 있다. 위압과 폭력이 가득한 시대를 통과하는 한 가족의 풍경을 통해 소설은 시공을 초월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윤 작가는 제국시대 생활상을 선명하게 묘사하면서, 기회주의자 최명배부터 폐결핵에 걸린 지식인 최부용, 사회주의자 최귀용, 기독교 신자이자 강건한 마음의 최순금 등 그 아들딸들까지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빚어냈다. 누구 하나 절대 악인이 아니라 할 수 없지만, 누구 하나 완전한 악인도 아니다. 이에 대해 윤 작가는 “해학의 힘, 해학의 효과다”라고 했다. “어떤 인간이든지 동정과 연민을 느낄 수 있게 썼습니다. 분노 촉발이 아니라 웃음을 유발하는 것에 해학의 본질이 있으니까요.”

소설이 혼돈의 시대를 뚫고 나가는 원동력엔 ‘귀소본능’이 있다. 윤 작가는 “고향을 찾는 한국인의 심성과 죽으면 본향(천국)으로 돌아간다는 기독교 사상이 일맥상통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소설은 본향을 바라며 지상의 고통을 이겨내는 원리와 항상 고향으로 되돌아가려는 우리 민족의 귀소본능이 만나는 어딘가에서 점화하고, 들끓고, 흘러넘치는 이야기다. 거기에서 소설 제목도 나왔다. ‘문신’은 과거 전쟁에 나가서 반드시 살아 가족에게 돌아오겠다는 다짐이고, 동시에 죽으면 고향에 돌아와 묻힐 수 있게 시신을 식별하는 표식이었다. 윤 작가는 “이러한 ‘부병자자(赴兵刺字)’의 풍습을 어린 시절 많이 봤다. 실제로 6·25 때도 남아 있었고, 왜란 호란 등 더 거슬러 올라가도 존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래의 궁극은 어쩌면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역설이 요즘의 나를 사로잡고 있는 셈이다. 인생의 출발점으로, 시작점으로 되돌아가다 보면 어느덧 고향의 품에 안기게 되고, 그곳에서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민족의 정체성을 만나곤 한다.” ‘작가의 말’이 가슴에 새겨진다. 그 어느 해 살아 돌아온 문신처럼, 혹은 죽었으나 죽지 않은 문신처럼.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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