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2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이영관 기자 2024. 2. 2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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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5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월례 독회를 열고 작년 10~11월에 출간된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2월 독회의 추천작은 2권. 안보윤 소설집 ‘밤은 내가 가질게’(문학동네)와 이주혜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입니다.

밤은 내가 가질게
안보윤 소설가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 소설가/ 창비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정명교 문학평론가

◊밤은 내가 가질게

안보윤의 ‘밤은 내가 가질게’(문학동네, 2023.11)에 묘사된 인물들은 보통 사람들인데, 사람들에게 가정되는 일반적인 속성을 박탈된 상태로 드러난다. 그것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게, 본명 대신 특정한 약어로 불린다는 것이다. 이 약어들은 인물의 삶의 어떤 실제적인 계기와 연결된 소재들 중에서 우발적으로 선택된 호칭들이다. 그들은 ‘후두티’거나 ‘나무’ 혹은 ‘나무반’이다. 그러나 실제 이 우발적으로 선택된 호칭들은 인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다. 인물들은 다들 저마다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런 이름 하에 자신을 인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호칭이 눈에 띄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선 이런 방식이 이번 독회에서 함께 후보작에 오른 이주혜의 ‘기억은 짧고 기억은 영영’에서도 동일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상식적인 이해지만 이는 통신망의 비약적 발달과 함께 개인들이 사회적 네트워크에 긴밀히 참여하게 된 정황에 대한 개인 반응의 진화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서 일단 ID로 전환된다. ID는 그런데 ‘접속’을 위한 순수한 기능어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실존이 담보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들은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기 위한 다른 지시체를 찾게 된다. ID에 아바타를 입힌다든가, 아니면 ‘별명’을 선택한다든가 한다. 그래서 ‘실명’ → ‘ID’ → ‘별명’의 이행이 이루어지게 된다.

중요한 점은 이 이행 과정 속에서 개인들은 본래의 실명이 내포하고 있던 자신의 속성을 버리고 새로운 내용으로 자신 안을 채운다는 점이다. 즉 일반적인 사회적 삶 속에서의 자신의 지위와 정체에 대한 불만이 ‘별명’을 통해서 새로운 지위와 정체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이주혜의 ‘기억은...’을 비롯해 상당수의 요즘 소설들에서 작동하는 절차이다.

그런데 안보윤의 ‘밤은 내가 가질게’는 그런 경향에 대해 역방향을 취한다. 여기에서의 편의적인 별명들이 인물들의 삶의 진실을 보장하는 듯 하지만, 실은 인물들이 자신에게 붙은 별명을 통해 심각히 왜곡당하고 있는 양상을 폭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사회적 별명들은 그들의 실존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조작된 속성들의 창고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요약적으로 전하는 구절이 하나 있다.

“정보가 덧붙으면서 사고는 안타까운 비극이 됐다.”(p.90)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 SNS상에서 그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간다. 그 와중에 그에게 닥친 우연한 사고는 여러 가지 곡절을 내포한 안타까운 사연이 된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 그의 죽음의 진상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먹이로 활용될 뿐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때로 무시무시한 사회적 폭력이 되기도 한다. 최근 축구선수들에 대한 사회적 네트워크 장소에 팬 및 안티팬들이 몰려가서 쏟아붓는 엄청난 말 폭탄을 생각해보라.

여기에서 독자는 21세기의 새로운 언어 현상의 기본 형식이 단순하지만 그러나 아주 날카롭게 표현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다른 자리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21세기에 들어 언어 현상에서의 중요한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이전 세기에서 언어가 대체로 사건에 대한 성찰과 해석과 반성의 장치로서 개입한 데 비해, 21세기의 언어는 사건에 사로잡혀서 사건의 환상성을 증강시키는 데 기여하는 병렬기구로서 쓰이는 경향이 유독 강해졌다는 점이다. 사건은 언어를 타고 더욱 화려하게 거짓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이것을 두고 필자는 ‘의미주의의 부패’라고 부른 적이 있다. 요컨대 이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유튜브와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온갖 이야기들을 쏟고 삼키는 까닭은 무엇인가? 결코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존재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갈증이 그들을 그렇게 내모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갈증에 대한 탐닉 속에서 그들은 점점 자신의 진실이 아니라 거짓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온몸‧마음이 망가지고 있는 참이다. 그것이 ‘부패’라는 말이 가리키는 실제 모습이다.

이런 SNS 안에서 별명은 이런 언어+사건의 환상적 스펙타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여기에 실존이 붙는다고 생각하는 게 오늘날 사회적 네트워크 참여자들의 일반적인 기대라면, 실제로는 이 별명에는 여러 사람들이 향유할(그리고 주체 자신도 같이 누린다고 착각하는) 모종의 미래의 열락을 위한 소재들이 들어차는 공간이 구성되는 것이다. 그 공간을 통해 인물들은 장밋빛 미래를 향해 날아간다는 착각 속에 이미 정해진 위치에 할당된다. 그들은 “적절히 준비된 모습으로 정해진 장소에”(p.9) 못박힌다.

안보윤의 소설들의 압도적인 정황을 구성하는 게 바로 이런 문제이다. 이 정황 속에서 인물들은 그 안에 ‘특이한 방식으로’ 휩싸여 들어간다는 것이 이 소설집의 또다른 특성이다. 이 인물들은 사회적 네트워크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야기하는 결과가 처참한 경우가 이 인물들의 사정이다. 따라서 이 인물들은 보통사람들의 부류에 속하긴 하지만, 그 안에서 모종의 결여를 가지고 문제를 인식하거나 혹은 일으키는 존재들이다. 그 문제로 인해 그들은 별명을 갖지 못하고 기어이 본명으로 돌아가려 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본래의 실존이 있다고 믿고 그런 것을 보증해주는 소재들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들의 본래의 현실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중하류층의 미래가 막힌 그런 꼴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한심한 진심’과 ‘화려한 거짓’ 사이의 대립이 이 소설집의 표면을 장식한다. 그러나 독자가 읽어야 할 것은 이 표면의 단순한 대립 안에서 작동한 언어+사건(이미지)의 결탁 혹은 의미주의의 부패 현상이다. 안보윤의 소설집에서 그런 각성을 유도하는 인물든은 방금 말한 문제를 일으키거나 문제를 인식하는 보통사람들이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문제적 주인공problematic hero’이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2023.11)은 현재 가족의 사건으로 인해 야기된 정신적 질환을 ‘일기 쓰기’를 통해서 치유하는 한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분노의 감정이 밤송이처럼 껍질을 뚫고 솟아나는 현재의 사건은 금세 뒤로 숨고, ‘일기’의 형식으로 인물의 지난 세월을 차분히 회상하는 과정이 매우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그 솔직함으로 이 소설은 198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사람들의 사회적 환경과 정신적 정향을 추적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 충분히 쓰일만하다.

이 소설은 문학의 기능에 관한 진지한 질문을 제기한다. “문학은 치료요법인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미술치료’, ‘음악치료’와 더불어 ‘문학치료’라는 말이 유행한지도 꽤 오래 되었고 학문 분야에까지 올라있다. 따라서 이런 질문이 의아할 수도 있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근대(모더니티) 이후 문학(좀 더 넓혀 말해 자의식을 동반한 글쓰기)은 기존 현실에 대한 반성이자 낯선 세계에 대한 상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는 경향이 큰 줄기였다. 그런 움직임은 현실 안에 사람들을 안전히 적응시키는 ‘치유’의 그것과는 궤적이 다르다. 때로 그 다름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의 상태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특히 그 충돌은 현실 인식 혹은 묘사에 대한 믿음의 근거를 둘러싼 물음 위에서 터진다. 일기는 현실을 정직하게 복원하고 있는가? 주관적인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작품은 이 문제를 직접 제기하기도 한다. 기억은 자의적으로 선택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자서전이라는 게 왜곡이나 날조로 흐르기 좋다.”(p. 256)는 점을 떠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주의가 여주인공의 일기에 투영되어야 할 터이다.

글의 치유력을 인정한다고 할 때, 과거를 다시 쓰는 일과 현재 문제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 문제가 제기된다. 오늘의 가족의 위기는 그 피해자인 여주인공이 과거를 복기하는 일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가? 이 둘을 연결하는 유일한 ‘하나되는 표지trait unaire’는 ‘여성’이 한국사회에서 안고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 주어진 부정적 조건들이다. 넓게 보면 여성의 불균등한 지위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실제로 그 불균등함의 실제와 내포는 끊임없이 변화되어 왔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여성들의 권리 상승을 위한 다방면의 노력과 투쟁이 개재되어 있다. 때문에 과거의 글쓰기가 현재의 해결로 작동하려면, 그 변화를 ‘계통발생적으로’ 되짚는 과정이 과거 복기의 작업 안에 내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자의적으로 무작정 연결되면 ‘히스테리’가 증가한다는 게 정신분석의 통찰이다. 글 앞에 이 소설이 ‘차분한 회상’을 특징으로 갖고 있다고 했다. 이 차분함은 방금 말한 ‘계통발생적 반추’를 포함하는가? 독자는 그 점에 유의해가며 작품을 읽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김지호 기자

◊밤은 내가 가질게

동주야, 진실을 말해 줘.

안보윤의 소설집 ‘밤은 내가 가질게’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 중 세 번 째 작품 ‘애도의 방식’을 읽고 나면 저 말이 환청처럼 귀에 달라붙는다. 동주와 같은 반 학생이었던 승규의 어머니가 동주에게 끝없이 묻는 말이다. 승규가 폐건물 옥상에서 추락할 때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곤 동주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실이라고 말은 해도 승규 어머니가 알고 싶은 건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고가 있던 그날 그 장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말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혹시 동주가 보복으로 승규를 밀어 떨어뜨린 것 아니냐고 묻는 거나 마찬가지다. 동주가 승규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해왔다는 사실을 승규 어머니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동주가 당했던 괴롭힘에 관련한 진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러하기에 동주 어머니와 변호사도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동주를 단속한다.

‘애도의 방식’에는 진실이라는 말에 이어, 다른 단편에서는 더 빈번하게 언급되는 진심이라는 말이 뒤따라 등장하며 작품에 미묘한 층위를 더한다. 진실과 진심을 약분하면 실實과 심心이 남는데, 실로 보자면 승규의 죽음이 실족에 의한 사고사지만 심으로 보자면 동주가 승규를 죽인 셈이 된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동주는 승규를 슬쩍 밀어버렸다는 환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동주의 그런 마음의 방황과 혼란을 작가는 끝내 지워지지 않는 가책의 행위로 여겨 ‘애도’라는 제목을 달았는지는 모르지만 쉬 단정할 수는 없다. 이외의 단편에서도 반복해 노출되는 진심이라는 말을 따라가다 보면 과연 진심이란 무엇일까 자꾸 되묻게 되듯이, 아무래도 ‘애도의 방식’ 역시 자꾸 진실이란 무엇일까를 묻게 하는 소설인 것만 같기 때문이다.

진실이든 진심이든 그 말을 입속에 되뇌다보면 진실이 무엇일까 진심이 무엇일까 궁금해지기는커녕 도무지 모르겠다는 쪽으로 치닫게 된다. 말에 담긴 뜻이 하얗게 바래다 아득하게 증발하여 말이 껍데기에 지나지 않게 될 때 말은 그 변별력을 잃는다. 변별력을 잃고 말 뿐만 아니라 때로는 진실과 거짓, 진심과 위선, 가해와 피해가 서로 자리를 맞바꾸기도 한다. 이런 효과를 위해서인지 특히 ‘어떤 진심’에서 작가는 제목에서뿐만 아니라 본문에서도 진심이라는 말을 빈번함을 넘어 과도하게 노출한다. ‘완전한 사과’에서는 심지어 ‘진심오리지널돈가스’ ‘진심치즈돈가스’라며 진심을 희화한다.

진심을 과도하게 되뇐다는 것은 진심이라는 말의 뜻에 의문을 던지는 일이고, 끝내는 진심을 아무 뜻도 없는 껍데기에 이르게 하는 일이며, 나중에는 조롱까지 하는 일이다. 여기서 조롱의 대상은 말의 의미를 일방향으로 규정하고 강제하는 권력과 그것에 순응하는 피권력 모두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이치는 진심이라는 말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모든 언어가 되뇌임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안보윤은 특히 진심이라는 말에 치중을 하지만 더러는 사랑과 용서(‘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 피해와 가해(‘미워하는 일’), 정의와 비겁(‘완전한 사과’), 구원과 학대(‘미도’), 선과 악, 선의와 괴롭힘(‘밤은 내가 가질게’) 으로 언어의 영역을 넓히며 되뇐다.

얼마든지 넓어질 것이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 넓어질 것이냐가 아니라, 그에 해당하는 적절하고 인상적인 사례들을 얼마나 집요하게 관찰하고 발견해 작화해 내느냐가 작가에겐 무엇보다 절실한 일일 것이다. 안보윤은 그걸 치밀하고도 너끈히 해내며 성실함을 잃지 않는다.

작품을 읽다보면 천사와 악마가 같은 것이 되거나 뒤바뀌며 그것이 우리의 밖에도 안에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우리를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면 ‘괴물(2023)’이라고 하지 않을까. 일상화된 학대여서 학대인 줄 모른 채 학대하고 당하며, 범죄인 줄 모른 채 범죄를 저지르고 당한다면(‘미도’) 그런 우리를 괴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일컬어 괴물의 평범성이라고까지 한다면 이상할까. ‘악의 평범성’ 뒤에 히틀러가 있었듯이 작가는 괴물의 평범성 뒤에다 황목사(‘어떤 진심’ ‘미워하는 일’)라는 상징 권력을 세운다. 아이히만의 죄는 권력을 맹신하여 스스로 죄를 되뇌지 않은 죄였다. 진심과 진실, 사랑과 용서, 구원과 학대, 가해와 피해를 되뇌고 되뇌는 일이 괴물로의 전락을 막는 최소한의, 그러나 궁극적인 일이라고 안보윤의 작품들은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 오종찬 기자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의 인물은 일기를 쓴다. ‘헤어지고 싶은 기억’을 글로 쓴다. 헤어지고 싶은 것은 되도록 피해야 하는데, 쓰기 위해서는 피하지 않아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피하고 싶은 것을 굳이 기억해서 쓰다니. 더구나 그 글이 몇십 년의 시차를 두고 회상하는 것이라면, 행위자와 쓰는 이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다. 기억 속에 있는 제3의 인물에 대한 기록이나 다름없다. 소설의 주인공 ‘나’가 삼인칭 인물 시옷을 내세워 일기를 쓰는 이유일 것이다.

‘3인칭 일기’를 통해 우리는 모든 기억의 기록화 과정에 작용하는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일기가 소설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일기는 “경험을 진술하는 것이지만, 경험을 진술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이라는 회로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하”다. 어떤 다큐멘터리는 일기보다 작위적이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일기가 소설이 되기도 하고 소설이 사실의 진술이 되기도 하는 게 글쓰기의 연금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129쪽)

기억이 기록이 되기 위해서는 기억 속의 일들은 다시 일어나야 하고, 그러나 그 일어남은 일종의 재현이고, 모든 재현에는 현재의, 당사자의 연기가 따라붙는다. 그래서 과거를 기억해서 쓴 글은 모두 현재의 화자의 것이다. 글을 쓰기 전에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한다. 그러나 글을 씀으로써, 기억의 재배치를 통해 현재는 과거의 봉사를 이끌어낸다. 이 소설은 그 마법이 시연되는 한 장소이다. 이 연금술이 어떻게 발휘되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다만 안간힘이 필요하다는 건 안다. 3인칭 인물을 내세워야 할 정도의 거리 두기, 혹은 기만이 필요하다는 건 안다. 그 정도의 안간힘 없이 헤어지고 싶은 기억을 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그 때문에 일기가 ‘복수의 자서전’이 되는 비밀이기도 하다고 작가는 암시하는 것 같다. 한 시절의 나에 대해 쓰려고 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시절의 나에게 관여하고 있는 시대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다. 일기는 나의 기록이면서, 나에게 관여하고 내가 관여한 누군가와 그 시대에 대한 기록이다. 일기가 소설과 구분되지 않는 지점이다. 가령 이 소설의 한복판에는 남자애가 아니어서 노래를 빼앗긴 시옷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 합창단 단복을 구입하지 못해 친구의 단복을 얻어 입고 나가 여자아이로 발각(?)되는 순간 시옷이 겪은 일은 단순히 한 개인의 상처가 아니다. 거기서 우리는 시대의 얼굴과 마주한다.

이 문제적 장면은 이 소설을 성장 소설로 읽게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성장은 이루는 것이 아니라 겪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성장기의 아이들은 모두 “크느라 고단”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걸 두려워한다. 그러나 기꺼이 경계를 넘어야 한다고 이주혜는 주문한다. “우리는 기꺼이 경계를 넘어야 한다고. 세계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통과하는 법이라고.”(225쪽) 어린 시옷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걸 두려워하는 어른인 ‘나’에게 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제가 숨어 있는 대목으로 읽힌다. 애초에 시옷에게는 ‘남자애와 여자애의’ 경계가 없었다. 경계는 외부에 있고, 성장은 그것을 넘는 일이다. 그 일이 쉬울 리 없다. ‘헤어지고 싶은 기억’을 쓰기 위해 안간힘이 필요한 이유이다.

◇김인숙·소설가

김인숙 소설가/이명원 기자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의 소설에서는 밀도가 느껴진다. 단단한데, 틈이 있다. 촘촘하게 읽히다가 적당한 곳에서 숨을 쉬게 하는 틈이다. 좋은 밀도다.

소설은 일기교실에서부터 시작한다. 일기를 쓰는 일도 배워야 하나. 소설의 질문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일기는 자신을 독자로 하는 글쓰기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엄격한 독자를 가진 글쓰기일 터. 가장 속이기 어려운 독자이기도 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간절히 속이고 싶은 대상이기도 하다. 일기 쓰기를 모티브로 해서 진행되는 소설은, 그래서 어디까지 솔직해질 수 있을까. 소설에서 소녀는 소년으로 오해된다. 어찌보면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는 이 오해는 차별과 편견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소설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기로만 읽는다면, 상처와 균열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소년으로 오해받았던 소녀는 자라 어른이 되고, 또다른 균열과 마주친다. 극복되지 못한, 혹은 치유되지 못했던 상처의 확장이거나 더 근본적인 것으로의 침몰이이기도 하다. 상처는 스스로 치유되지 않는다. 내부에 기생해서 스스로 자라난다. 변주되지만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대답은 결국 그 자신의 내부에 있다.

일기인 척 하는 이 소설은, 물론 일기가 아니다. 소설인 척 하는 일기인 것처럼, 일기인 척 하는 소설이다. 일기와 소설 사이, 그것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틈일 뿐만 아니라, 글쓰기가 갖는 본질적인 틈일 수 밖에 없다. 허구와 사실 사이에서 숨쉬는 틈. 우리는 무엇을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부정해야하는 것일까. 진실 혹은 진심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서사를 입으면서 그 허약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어떤 진심은 역겹기도 하다. 이주혜는 서두르지 않고 그 질문에 다가간다. 그것도 단단하게 간다.

일기 속 주인공은 시옷이라고 명명된다. 그 이유를 묻자, 시옷은 어쩐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 보여서라고 말한다.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은 없다. 잘 넘어지는 방식을 아는 것, 그것이 좋은 소설의 기본일 터. 이주혜의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김연정 객원기자

◊밤은 내가 가질게

안보윤의 소설집 ‘밤은 내가 가질게’에는 돌봄과 상처라는 주제가 관류하고 있다. 표제작 ‘밤은 내가 가질게’의 주인공은 어린이집의 아동 보육교사이다. 주호라는 아이를 폭행하고 있다는 의심을 부모로부터 받고 있어서, 등하교 때 아이의 옷을 벗겨 어떠한 상처도 없음을 확인해 주고 있었는데, 폭행의 장본인이 놀랍게도 돌봄의 주체인 부모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돌봄의 주체인 부모는 상처를 주고 있으며, 돌봄의 대상인 아이는 폭행을 당하고 있으며, 돌봄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은 끊임없이 상처에 노출되어 있다. 집밖에서와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진다. 사이비종교에 빠져 전재산을 거덜내는 등 온갖 사고를 치며 식구들에게 상처를 준 언니가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배분되는 돌봄의 의무에 의해서 주인공은 언니를 돌보게 된다. 강아지보호소에 언니와 함께 봉사를 갔다가 밤톨이라는 유기견을 알게 되고,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언니는 돌봄의 대상인 유기견을 받아들이고 돌봄의 주체가 되고자 한다. 원래 밤톨이라고 새겨진 이름표에서 밤을 떼서 언니가 갖는다. 그렇게 되자 학대 받은 적이 없는 토리라는 개가 새로 눈앞에 나타나고, 상처(밤)를 거두어들인 새로운 돌봄의 주체인 언니가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면 집 안팎에서 돌봄을 노동으로 의무로 수행했던 주인공에게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있을까. 작품에 주로 이름으로만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이선이 있다.

겉에서 보면 이 작품은 진상 부모의 갑질과 유기견 입양이라는 너무나도 많이 알려진 두 가지의 사건을 결합시켜 놓은 이야기에 그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결합의 과정에서 놀랍게도 돌봄이라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관계성에 대한 심층적인 고찰을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돌봄은 어린이, 환자, 노인, 장애우 등 약자를 보살피는 행위를 말한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미숙 상태로 태어나기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돌봄의 대상이자 누군가를 돌보는 주체가 된다. 인간은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 상처에 노출되며 살아가는 존재이며, 인간은 상처를 보살피는 돌봄의 관계에 들어가거나 돌봄의 노동을 교환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문제는 돌봄의 과정에서조차 상처(폭력)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내가 너를 돌보고 너는 나를 돌본다는 돌봄의 상호성에 근거한 관계만으로는 돌봄의 재생산을 보장할 수 없다. 어쩌면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있고 누군가를 돌본다는 인간의 삶의 조건이야말로 최소한의 윤리적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돌봄과 상처라는 주제는, 매우 어렵지만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밤은 내가 가질게’는 우리의 일상 속에 돌봄과 상처라는 문제가 얼마나 일상적으로(심층적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상을 위해 다시 한번 더 읽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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