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업체가 유치원 역할…정서 악영향 우려되는 ‘영어유치원’ 열풍 [심층기획-영어유치원의 그림자]

김유나 2024. 2. 27.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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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유치원 대체기관 된 ‘영어유치원’
소위 ‘영어유치원’ 5년간 66% 폭증
유아교육전문기관 아닌 학원에 불과
유아발달단계 고려없는 커리큘럼 多
강사도 대부분 유아교육 비전문가
유치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교육
전문가 “영어유치원은 유치원 대체 못해”
“아이에게 눈 깜빡임 같은 ‘틱’ 증상이 생길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A씨가 소위 ‘영어유치원’이라 불리는 유아 대상 영어학원(이하 영어유치원으로 표기)에 아이를 보내며 들은 당부 사항이다. A씨는 지난해 한국 나이 6살인 아이를 일반 유치원에서 영어유치원으로 옮겼다. 주변에서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뒤처진 것 같다’는 조바심이 나서다. 유치원이 아닌 ‘학원’이란 건 알았지만 큰 차이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못 했다. 그저 ‘영어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곳’ 정도로 여겼고, 고액인 만큼 아이에게 좋은 환경일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영어유치원은 생각과 많이 달랐다. 원에서는 거의 매일 시험이 이어졌고, 주눅이 든 아이가 수업시간에 울자 강사는 “아이가 수업을 못 따라가니 집에서 보충 공부를 해오라”고 요구했다. A씨는 “아이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업에 방해가 된다는 식이었다”며 “진도를 빼는 것이 중요한 학원이란 것이 실감 났다”고 회상했다.

아이가 가기 싫다며 우는 날이 늘었지만 A씨는 아이를 다독이며 버스에 태웠다. A씨는 “이 고비만 넘기면 아이가 평생 영어에 스트레스받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참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아이는 날이 갈수록 말이 줄고 표정이 우울해졌다. 그는 “알고 보니 아이가 원에서 ‘왜 이걸 못하니’란 말을 자주 들었고, 질문했다가 수업 방해하지 말라고 혼나서 종일 말을 안 했다고 했다. 수업시간에 화장실에 못 가니 물도 잘 마시지 않았다”며 “아이 정서발달에 맞지 않는 교육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아이는 결국 7개월여 만에 일반 유치원으로 돌아갔다. A씨는 “남들이 좋다니까 고민 없이 보냈던 것이 후회된다. 잘 적응하는 아이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는 힘든 구조”라며 “영어를 얻는 대신 놓치는 것도 많다. 보내기 전 잘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출생으로 문을 닫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늘고 있지만, 영어유치원은 5년 만에 60% 넘게 급증하며 나 홀로 몸집을 키우고 있다. 중산층에게 영어유치원은 어린이집, 유치원과 함께 미취학 아동 기관 선택지 중 하나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국가 교육과정이 미치는 기관이 아닌 ‘학원’이어서 수업 커리큘럼 등이 아동 발달과 맞지 않다는 목소리도 높다. 초등학생 단계에서는 학원이 학교를 대체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유아는 사교육업체가 공교육 기관 역할을 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영어유치원은 유아교육 비전문 기관”이라며 “아동 정서발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아교육 기관 아닌 학원…강사도 비전문가

26일 교육부에 따르면 하루 4시간 이상 교습하는 유아 대상 영어학원은 지난해 3월 기준 전국 847개로 2018년(562개)보다 66.4%나 급증했다. 영어유치원은 법으론 존재하지 않는 단어여서 정부는 유아 대상 영어학원 중 1일 4시간 이상 수업하는 곳을 기준으로 규모를 파악하고 있다. 월평균 교습비는 전국 평균 174만4705원으로, 한 달에 300만원 가까이 내는 곳도 있다.

많은 학부모는 영어유치원을 유치원 대체기관으로 여기지만, 둘은 차이가 크다. 유아교육법이 적용되는 유치원과 달리 영어유치원은 학원법을 적용받아 교육과정이나 강사채용, 시설 등 기준에 유아발달 특성이 고려되지 않는다. 

유치원의 경우 국가가 만든 유아교육과정인 누리과정이 적용된다. 누리과정은 ‘놀이중심’이 특징으로, 놀이를 통해 정서·기본생활 등을 교육한다. 반면 영어유치원은 학습 위주다. 특히 ‘학습식’을 강조하는 곳은 5∼7세가 수준별로 반을 나눠 온종일 수업을 듣고, 수시로 시험을 본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전부터 성적으로 줄 서고 좌절하는 경험을 배운다. 유아교육에서 지양하는 가치들이다. 일부 원은 수업시간에 화장실에 가거나 물을 마시는 것조차 금지하고, 친구들과의 자유놀이 시간이 없는 경우도 많다.

강사는 대부분 유아교육 비전문가다. 유치원교사는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자격증을 따야 하지만, 영어유치원 강사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대학 졸업장’뿐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3월 기준 전국 영어유치원 강사 중 유치원·보육·초중등교사 자격증 혹은 테솔(영어교육 전문가) 자격증 중 하나라도 소지한 비율은 내국인 강사의 31%(1만1161명 중 3492명), 외국인 강사의 36%(9271명 중 3345명)에 그쳤다. 그나마 자격증이 있는 사람도 대부분 유아교육과 거리가 있는 테솔 자격증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교육부 점검에서는 강사 채용 시 성범죄 등 범죄 경력을 조회하지 않은 경우도 26건 적발됐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지난해 전직 영어유치원 강사 4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이들은 “원어민 강사는 아동 발달에 대한 이해가 없다”, “화장실 사용법, 밥 먹기 전 손 씻기 등 일상생활지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며 영어유치원이 아동 발달에 부적합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 강사는 “교실에 의자·책상만 있고 놀잇감이 없어 아이들도 뭘 할지 모른다”고 했다.
◆부작용 겪는 아이도 많아…‘무조건 보내는 건 금물’

적지 않은 아이들이 이런 환경에서 스트레스를 느낀다. 한 학부모는 “원에서 아이에게 ‘열심히 안 하면 (레벨) 낮은 반 간다’며 부족한 면을 부각했다. 아이가 압박을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또 다른 학부모는 “아이가 6시간 공부를 하고 와 집에서 또 숙제를 해야 했다”며 “영어 실력은 늘었지만 불안감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영어유치원에서 근무했던 B씨는 “10명 중 처음부터 적응 잘하는 아이는 2∼3명뿐”이라며 “한국말을 못 쓰게 해 말을 아예 안 하는 아이들도 있다. 원어민 강사가 ‘이건 아동학대’라며 그만두기도 했다”고 말했다. 윤지혜 전국국공립유치원교사노조 위원장 당선인은 “유아교육 비전문가는 유아 발달단계에 적절한 신체·정서·인지 등의 교육이 불가능해 유아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낼 경우 전인발달이 고르게 이뤄지지 않거나 발달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국어 발화가 잘 안 되는 등의 문제를 겪는 아이도 많다. 충청의 한 스피치 학원 관계자는 “영어유치원에 다니며 한국어 표현에 문제가 있어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한글을 바로 파악 못 하는 등 문해력 발달이 부족한 아이도 많다. 정도가 심해 언어치료 전문기관을 소개해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조영은 이해와공감심리상담컨설팅센터 대표(임상심리전문가)는 영어 조기교육이 모든 아이에게 맞는 것은 아니라고 조언했다. 그는 “우울해 보인다고 데려왔는데 지능이 아주 낮게 나온 경우도 있었다. 한국어 발달이 안 돼 사고력 발달까지 안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대표는 “영어유치원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언어능력이 뛰어나고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적은 일부 아이에겐 학습 효과가 있다”면서도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나중에 행복해지기 위해 영어를 가르치는 건데 영어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며 “왜 영어를 가르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영어유치원이 유치원 대체 못해”

많은 부모들이 일반 유치원이 아닌 영어유치원을 선택하는 이유는 영어유치원이 아이의 발달에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경란 광주여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이런 인식은 오해라며 영어유치원이 일반 유치원·어린이집을 대체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냥 노는 것’처럼 보이는 활동들도 미취학 시기에 배워야 할 가치를 배우는 교육과정이라는 것이다.

10여년간 유치원을 운영하며 현장에서 아이들을 지켜보기도 한 유아교육 전문가인 김 교수는 “학원은 눈에 보이는 성취에만 집중하지만 유치원은 보이지 않는 것을 교육하는 곳”이라며 “5∼7세 아동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영어공부가 아닌 정서발달”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미취학 시기는 ‘자아상’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기다. 김 교수는 “아이들은 ‘저 친구는 운동을 잘하지만 나는 종이접기를 잘한다’는 식으로 자아존중감을 기른다”며 “영어유치원은 학습이 일괄 진행돼 서열이 매겨지고 영어로만 평가해 아이들이 ‘각자 잘하는 것이 다르고 나도 뭔가를 잘한다’는 생각을 갖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영어유치원에서 ‘아이들끼리 노는’ 자유시간이 적은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아이들에게 노는 시간은 곧 ‘타인과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김 교수는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다른 사람 말을 귀담아듣고 행동을 살피면서 타인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지 자연스레 체득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교육을 ‘히든 커리큘럼’이라고 한다.

김 교수는 “‘일반 유치원은 놀기만 해 시간을 허투루 쓰고 영어유치원은 그날 공부한 내용이 눈에 보이니 시간을 값지게 보내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놀이는 사회성을 발달시키는 꼭 필요한 교육과정”이라며 “미취학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을 배우는 정서발달 ‘골든타임’인데 그 시기에 가장 필요하고 많이 발달할 수 있는 교육을 놓치고 나중에 공부해도 될 영어에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또 “영어유치원이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적어 ‘소수 케어’라 생각하지만 각자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유치원과 달리 학교처럼 강사를 따라가는 전체수업이어서 오히려 아이 한 명 한 명의 생각에 집중할 기회가 적고 개별 특성이 존중되지 못한다”며 “전문가들은 영어유치원이 유아발달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는데 학부모들이 아이 발달에 잘 맞는 곳이라 판단하는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어보다 인생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뭐 하고 놀지’ 생각할 때 아이가 자랍니다.”

세종=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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