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영주 명당 여행..성공한 사람들의 안빈낙도[함영훈의 멋·맛·쉼]

2024. 2. 2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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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소백산 사이 산자수명 명당
선비마을·산타마을에 스며드는 봄 햇살
정도전과 이몽룡 실존인물 성이성 배출
영주 무섬마을 고택에 깃든 봄기운

[헤럴드경제(봉화)=함영훈 기자] ‘춘향전’ 속 이몽룡의 실존 인물인 성이성(1595~1664) 선생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경북 봉화에 터를 잡았다. 바로 봉화 춘양면의 계서당 고택에서다.

그는 1627년부터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공직 기강 확립 중앙 부처들, 4번의 암행어사, 6개 광역·기초단체장을 오간다.

1647년 순천 암행 중 문득 남원에 들른다. 앞서 아버지 성안 선생이 남원부사일 때, 글 공부하던 성 도령은 남원 예인(관기)의 딸과 사랑을 나누다 헤어졌다. 그리고는 50줄이 넘어 남원의 나이든 관기를 불러 자신의 소년 시절, 그 소녀의 근황을 물어보고 깊은 시름에 잠겼다는 얘기는 계서당 기록 ‘호남암행록’에 현존한다.

그는 이듬해 남원 옆 담양군수가 돼 홍수방지용 관방제림, 체류형 관광지로 만들기 위한 배의 계류시설 석당간 조성, 죽세공의 장려 등 주민의 안전과 경제발전에 힘썼다고 전해진다.

경북 봉화에 가면 ‘억지춘양’ 시장이 있다?

봉화에 춘향과 이름이 비슷한 ‘춘양’이라는 지명이 있고, 성 선생이 춘향의 성씨를 자신의 성(姓)인 성(成)씨로 ‘세탁’하고는 위민정치에 몰두한 모습에서, 소년시절 절절했던 추억과 그리움을 억누르고 위민정치, 공직기강 확립에 매진했던 그의 마음이 읽혀진다.

봉화 춘양에 가면 ‘억지춘양시장’이 있다. 매력적인 먹거리와 토산품, 카페가 있다. 춘향전의 실화를 알고나면 봉화까지 가서 이곳을 방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이성 선생이 결혼 전에 벌인 로맨스를 빌미로, ‘춘양’이란 지명을 둔, 이런 ‘억지’를 이제는 미소지으며 말할 수 있다.

1610년 건립된 봉화 계서당 종택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입구 자(口) 형으로 크다. 후학을 양성하는 교실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채의 오른쪽 뒤편으로 네모난 토석 담장을 두른 사당의 조경이 이채롭다. 안채엔 다른 고택에 비해 ‘여성들의 생활 및 취미공간’인 규방을 많았는데, 행여 그녀가 올 것을 대비하고 있었을까.

봉화는 성이성 선생 외에도 많은 문신들이 터를 잡았다.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의 거두’ 정도전(1342~1398)의 본관도 이곳이다. 태백산 자락 아래 낙동강이 흐르는 곳, 산빛이 곱고 강물이 맑다는 뜻의 ‘산자수명(山紫水明)’ 명당이기 때문이다.

봉화 선유교에서 본 낙동강 [한국관광공사 제공]
영남 4대 명당 ‘봉화 닭실마을’

낙동강 지류 내성천변 봉화 닭실마을은 영주 무섬마을 등과 함께 영남 4대 명당으로 꼽힌다. 안동권씨 집성촌인 닭실마을 터는 ‘금계포란형’, 즉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마을 주변에 알처럼 생긴 봉우리들이 있고, 수탉 봉우리가 호위하는 형상이라는 게 향토사학자들의 설명이다.

금계포란형 명당, 봉화 닭실마을

봉화 읍내에서 닭실마을이 있는 유곡리까지 이어진 솔숲갈래길은 내성천의 물줄기를 따라 거슬러 오르며 계곡을 감싸는 울창한 소나무 숲 속을 걷는 건강 여행길이다. 물 맑은 석천계곡, 500년 안동권씨 집성촌 닭실마을, 선비들이 며칠을 머물며 공부하도록 지은 별장 ‘석천정사’, 권벌이 세거지를 만들 때 거처로 삼았던 ‘청암정’, 찬물 같은 맑은 정신으로 공부를 한다는 뜻의 정자 ‘한수정’ 등을 거친다.

청암정은 신탄 상류의 약 500m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 올려 연못을 파놓고 거북 모양의 바위와 예쁜 돌다리를 놓은 인공 정원 정자다. 네모진 돌담 마저 서정적으로 보여 사진 맛집이 되고 있다. 국가명승(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으로 지정된 닭실마을에선 쫀득하고 달콤한 전통 한과를 꼭 체험해봐야 한다.

봉화 청암정

닭실마을에서 동쪽으로 20㎞가량 가면 법전면 사미정계곡에서 ‘미쉐린 그린 가이드’에 등재된 세계적인 드라이브길 35호선 국도를 만날 수 있다.

‘미쉐린 그린’ 여행길 중 한 곳인 명호면 선유교에서 본 낙동강은 협곡을 통과하는 미시적인 모습이고, 산길로 올라 범바위 전망대에 서면, 황우산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의 장쾌한 흐름을 굽어볼 수 있다. 인근엔 오르막길이 내리막으로 보이는 신비의 도로도 있다.

청량산으로 연결된 명호면의 만리산전망대는 문체부-한국관광공사의 ‘사진찍기 좋은 녹색명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청량산을 제대로 보려면 이름도 낭만적인 ‘오렌지꽃향기는바람에날리고’ 카페가 좋겠다.

수많은 향교와 서원 그리고 설화…상상력의 보고

조선의 야외 철학살롱 겸 문화예술경연장인 정자가 봉화에만 도암정, 갈천정, 야옹정, 사덕정 등 100여채나 있다.

세종 때 만들어진 봉화향교, 사립학교 삼계·구만·행계서원이 있고 도계·단계·문산·오천·동명·문암·인계·도연·문계서원은 대원군에 의해 철폐됐다. 감고당문적 등 기록유산 외에 봉화초고장, 봉화유기장등 손재주를 보여주는 무형유산도 많다.

봉화에는 이웃 고을 영월에 유배돼 있던 단종이 백마 타고 놀러온 것을 보았다는 주민들의 사후(死後) 목격담, 조선 최고의 풍수가 남사고 선생이 봉화에서 명당을 발견하고 조상묘를 쓴 이야기, 조선에 큰 장군이 날 것을 우려해 명나라 이여송이 바위를 깨트렸다는 스토리, 부자가 된 백정과 그의 후원을 받은 가난한 선비 출신 판서의 배신·사필귀정 응징 이야기 등 실화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봉화 분천 산타마을의 키다리산타아저씨

1개 군에 국보 마애여래좌상과 수십개의 보물이 있고, 마을 동제 무형유산이 190개나 된다.

이곳이 산촌 문화의 대표 아이콘인 ‘머루야, 다래야’의 진원지라는 건 이해가 되지만, 논과 삼이 드문 곳인데도 ‘모내기 소리’, ‘베틀노래’ 등 노동요가 발달한 점은 봉화 사람들의 상상력이 매우 탁월함을 방증한다. 끝내, 눈(雪) 좀 온다는 이유로 조성한 봉화 분천 산타마을엔 ‘키다리 산타 아저씨’까지 등장했다.

무섬마을 외나무 다리도 볼 만

봉화 서쪽 영주 역시 낙동강 지류 내성천을 이어받는데, 영남 4대 명당 중 하나인 무섬마을이 자연경관-인문학여행을 겸하기에 좋다. 내성천이 거의 원에 가까운 300도 휘감아 도는 곳이다. ‘S’라인 외나무다리로 기억하는 국민도 많다.

연화부수형 명당, 영주 무섬마을의 대표 아이콘, 외나무다리.

마을의 주산인 뒷산은 연꽃, 평지는 연잎처럼 보여 풍수학적으로 명당인 ‘연화부수형’의 전형이라고 한다.

무섬마을은 자전거로 돌아보는 게 제격이다. 영주시 자전거공원에서 자전거를 빌려 무섬마을까지 서천변 13㎞를 달리는 동안 조선의 의국 ‘제민루’, 봉화정씨 정도전 생가 ‘삼판서고택’ 등 명소를 만난다.

자전거 전용 데크를 달리다 보면 봄볕에 반사된 은빛 강물이 반짝인다. 부드러운 물길이 감싸 안은 마을에는 350년이 넘은 만죽재고택을 비롯해 전통 가옥 30여채가 있다. 마을 구석구석 자전거로 둘러보며 고즈넉한 분위기로 시간 여행을 한다.

해질녘 영주호 용마루 공원
배흘림기둥에 기대서 본 소백산 ‘황홀경’

무섬마을에서 동쪽 물길따라 6㎞ 남짓 떨어진 영주호 용마루 공원은 봄에는 오후 4~5시 무렵에 가는 게 가장 좋다.

호수 속 섬과 섬을 연결한 용미교와 용두교, 멀리 흐르는 깊은 강물, 호수를 빚어낸 크고 작은 백두대간 산자락들, 황홀한 해넘이 장면이 어우러진다. 해가 지면 불이 켜지며 화려한 야경까지 뽐낸다.

영주 여행에서 국보 부석사 무량수전을 빼놓을 수 없다. 명랑한 MZ(밀레니얼+Z)들은 기다란 올챙이국수를 닮았다고 하겠지만, 세계에 자랑할 만한 역학적 정합성과 미학적 탁월함을 겸비한 배흘림기둥(하부에서 1/3지점이 가장 굵고 위 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기둥)을 가진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소백산 능선을 바라보면 모종의 성취감이 느껴질 것이다.

봉화-영주 명당 여행을 통해 새로운 인생 미학, 즉 ‘노력을 해서 성공을 거둔 뒤, 안빈낙도할 때 얻는 심신의 풍요로움’을 실감할 수 있어서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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