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없다고 병원 마비…의료체계 바닥 드러난 1주일

천호성 기자 2024. 2. 26.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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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5 병원 의사 중 전공의 39%
비용 아끼려 전문의 확충 외면
공공병원 병상수 기준 10% 불과
2차병원은 간단 수술조차 힘든 곳도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정책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집단 행동을 이어가고 있는 25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9일 시작된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발생한 의료 공백은 부실한 의료 체계의 민낯을 보여준다. 줄곧 지적된 전공의(인턴·레지던트)에 대한 상급 종합병원의 과도한 의존, 허약한 공공의료 체계 등이 보건의료 위기에서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인턴 계약을 앞둔 의대 졸업생의 임용 포기 사례가 속출하는데다 전임의, 일부 교수 등도 집단행동에 나설 가능성을 내비쳐 의료 체계 혼란이 더해질 전망이다. 대통령실은 2천명 증원 규모에 대해 “필요한 인원”이라며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25일 보건복지부 설명을 보면, 지난 22일 밤 10시 기준 94개 수련병원 소속 전공의 8897명(78.5%)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7863명(69.4%)이 근무지를 이탈했다. 이들이 떠난 이른바 ‘빅5’(삼성서울·서울대·서울성모·서울아산·세브란스병원) 병원은 수술을 평소보다 30~50% 줄이는 등 수술과 진료 기능을 대폭 축소한 상태다. 2020년 전공의 80% 이상이 의료 현장을 이탈해 한달 가까이 진료를 거부해 의료 공백이 벌어졌을 때와 유사하다.

전공의 집단행동 때마다 의료 공백이 발생하는 건 우선 대형 병원들이 진료 기능의 상당 부분을 상대적 저임금에 장시간 일하는 전공의에 의존하는 탓이다. 지난해 12월 기준 ‘빅5 병원’ 의사 가운데 전공의 비중은 39%였다. 이들은 병동·중환자실 당직, 수술 보조, 수술 전후 환자 관리 등 병원의 핵심 업무에 투입돼 의료 현장에서 ‘모세혈관’ 구실을 한다.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52%는 ‘4주 평균 주 80시간을 초과해 근무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법정 최대 근무시간(80시간)을 어긴 경우가 다반사인 셈이다. 보건사회연구원의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인턴과 레지던트의 연봉은 각 6882만원, 7280만원으로 전임의(2억3690만원)에 비해 3분의 1 수준이었다.

이에 병원 인력 구성을 전문의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의료계 안팎에서 나왔다. 전공의 근무시간을 줄여 이들이 교육·수련에 집중하게 하고, 병원은 봉직의·교수 등 전문의를 추가로 뽑아 당직, 병동 관리 등을 이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전문의 추가 채용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병원들의 협조는 지지부진하다. 김호중 순천향대부천병원 교수(응급의학과)는 한겨레에 “대학병원에 전문의가 충분치 않아 전공의가 빠졌다는 이유로 진료 차질이 생기는 것”이라며 “이미 드러난 문제인데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짚었다.

전공의 이탈에 대한 정부의 비상진료 대응 방안은 외려 공공병원 확대 필요성과 허약한 2차 병원 실태를 보여줬다. 정부는 23일 의료재난 경보 단계를 ‘심각’으로 격상하며 공공병원의 진료 시간을 최대로 늘리고 군병원 12곳의 응급실을 개방하도록 했지만, 공공병원은 전체 의료기관 가운데 5%에 불과하고 병상 수 기준으론 약 10%에 그친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등 40여개 시민단체가 모인 좋은공공병원만들기운동본부는 성명을 내어 “공공병원이 ‘비상진료’ 역할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는 건, 정부가 무책임하게 방치했기 때문”이라며 “윤석열 정부는 ‘경제성’을 들먹이며 공공병원 확충을 막았다”고 밝혔다. 대형 병원의 경증 환자를 2차 병원으로 분산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일부 2차 병원은 종양 제거, 외상 봉합 등 비교적 간단한 수술도 하지 못해 환자가 여러 병원을 찾아다녀야만 한다.

간호사와 의사 간의 업무 범위 조정도 이번 사태 이전에 해결됐어야 할 숙제로 꼽힌다. 의사 인력 부족으로 1만여명의 피에이(PA·진료보조) 간호사가 현재 활동 중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수술, 처치, 처방, 환자 동의서 작성 등 전공의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만, 현행 의료법상 간호사가 의사 지도 없이 단독으로 진료 행위를 할 수 없다.

정부는 피에이 간호사를 활용해 전공의 공백을 메울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의료법 개정 등을 통해 업무를 제도화해야 한다는 간호사들의 목소리가 계속 외면돼 현장에선 합법과 불법 사이 경계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전공의가 하던 업무를 맡다 의료 사고 등이 생길 경우 배상은 물론 처벌 위험도 있다.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필수의료 패키지’는 이런 부실한 의료 체계에 뚜렷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전공의 업무 부담 경감을 위해 36시간 연속근무를 축소하는 시범사업이나, 국립대병원 필수의료 전임교수 정원을 늘리는 등의 대책은 재원 조달을 비롯해 정책의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다. 국립대병원이 아닌 민간 의료기관에서 교수·봉직의를 늘릴 방법도 뚜렷하지 않다. 지방의료원 등 공공병원 강화책은 아예 포함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이 의-정 대결 해법을 찾는 것과 함께 각 의료기관이 제구실을 하도록 보완책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하는 배경이다. 조승연 인천시의료원장은 “상급 종합병원 교수는 중증환자의 입원 진료에 집중하게 하고, 전공의가 전문의 취득 이후 다양한 병원에서 역할을 할 수 있게끔 2~3차 병원에서 두루 수련하게 하는 공동 수련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김수경 대통령실 대변인은 이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브리핑을 열어 “(증원되는) 2천명은 정말 양보하고 양보해서 최소한으로 (정)한 것”이라며 “어느 나라에서도 의대 증원을 두고 의사들이 환자 목숨을 볼모로 집단 사직서를 내거나 의대생이 집단 휴학계를 내는 등 극단적 행동을 하는 경우는 없다”며 기존 입장을 이어갔다. 또 정부는 ‘의사 집단행동 대응을 위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열어 검경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의사 집단행동에 대한 법률 자문을 위해 복지부에 검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의료 현장에선 인력 이탈이 더욱 확대될 조짐이다. 대전 충남대병원에서 인턴 60명 전원이 임용 포기서를 제출하는 등 3월 초 임용이 예정된 인턴 상당수가 의대 증원에 반발해 임용 포기 의사를 밝히고 있다. 1년 단위로 병원과 계약을 갱신하는 전임의들도 업무 부담과 전공의 집단행동 동참 등을 이유로 재계약에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연세대 의대 교수평의회는 24일 성명을 내어 “제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벌이 현실화하면 (교수들도)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정진행 서울의대 교수협의회 비대위원장(분당서울대병원 병리과 교수)은 에스엔에스(SNS)에서 “(정부와) 이성적인 대화를 통해 최적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며 교수들이 정부와 의료계 사이 중재에 나설 뜻을 밝혔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김윤주 기자 ky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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