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싸게 사서 싸게 팔라는 게 대책이냐”

주영재 기자 2024. 2. 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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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서점 활성화 대책 ‘도서정가제 완화’ 탁상행정의 전형
동네 책방·독서 증진사업 예산 깎아놓고 엉뚱한 해법 내놔

[주간 경향] 지난 2월 13일 강원도 인제읍의 ‘책방나무야’를 찾았다. ‘책 읽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지역 서점’이라는 안내글이 서점 이름 아래 붙어 있다. 서가에 꽂힌 책을 보니 책방 주인이 손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알 것 같다. 서점 한쪽에 ‘일과 직업의 현장’이라는 주제 아래 <작은 가게에서 진심을 배우다>, <우리는 작게 존재합니다> 등의 책이 꽂혀 있다. 월별 북큐레이션 코너도 있는데 1월엔 ‘차별과 혐오를 거두라’라는 주제로 <우리의 분노는 길을 만든다> 등을 소개한다.

동네 서점은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지역에 따라, 또 그 안에서 책방 주인의 취향에 따라 서가에 놓인 책이 달라진다. 그런데 요즘 이들 동네 서점 운영자들의 고민거리가 하나로 모이고 있다. 정부가 ‘생활규제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도서정가제 할인율을 유연화하겠다는 방침을 내놨기 때문이다.

강원도 인제읍의 지역서점 ‘책방나무야’에서 작가와의 만남이 진행되고 있다. 책방나무야 제공

당사자는 지원책 아니라는 데도 ‘할인율 확대’

도서정가제는 생산자인 출판사가 정한 가격으로만 책을 판매하도록 하는 제도다. 최소 제작비를 보전해 창작자와 출판사가 다양한 분야의 책을 낼 수 있도록 돕고, 가격 할인 경쟁을 막아 출판 생태계를 안정화한다는 취지에서 2003년 도입했다. 2014년 개정된 현재의 도서정가제는 완전한 정가제는 아니다. 정가의 15% 이내에서는 가격 할인과 경제상의 이익(마일리지·사은품)을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지난 1월 22일 연 ‘민생 토론회’에서 단말기 유통법, 대형마트 영업 규제와 함께 도서정가제를 3대 규제의 하나로 보고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제도 틀은 유지하되 웹툰·웹소설을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현재 최대 15%인 직·간접 할인율을 ‘영세서점’에 한해 추가로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위기에 처한 영세서점의 활성화와 소비자들의 혜택을 늘리기 위한” 방안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동네 서점은 원하지 않는 조치다. ‘제 살 깎아 먹으며 버텨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온라인·대형서점의 경우 공급률(정가 대비 공급가 비율)이 60~65%인데 작은 서점은 65~75%이다. 정가가 1만원인 책을 온라인서점은 6500원에 공급받는데 작은 서점은 7500원에 받는다는 말이다. 천강희 책방나무야 대표는 “공급률의 차이로 인터넷서점은 15% 할인·적립을 할 수 있는데, 우린 인터넷서점에 비해 비싸게 들여오니 정가 판매를 고수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문체부는 우리가 할인할 수 없어서 어려워한다고 보는 거죠. 인터넷서점도, 우리도 정가제로 가야 공평해질 텐데 지금은 기울어진 우리 쪽을 망치로 더 내리치는 격이죠”라고 말했다.

정부는 악성 재고를 털어내도록 할인율을 확대해주겠다고 하는데, 이는 반품이 안 되는 전집류를 취급하는 소수의 서점에 국한된 문제다. 이정은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사실이 아닌 걸 근거로 삼아서 ‘너희가 더 싸게 팔도록 도와주겠다’는 건데 우리에겐 절대 득이 되지 않는다. 우리 같은 작은 서점만이 아니라 중대형 서점도 같은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이 국장은 경기도 파주 교하에서 협동조합 책방인 ‘쩜오책방’을 마을 이웃 15명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정부, 독서문화 자체를 줄이겠다는 발상”

한국출판인회의가 펴낸 <도서정가제 바로알기>(2020년)에 따르면 2014년부터 개정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이후 독립서점은 100개에서 600개 이상으로 늘었고, 신간 종수는 33% 증가해 8만 종 이상이 됐다. 도서정가제가 버팀목이 되면서 유명작가·대형출판사만이 아니라 신인, 소형 출판사도 공생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는 의미다. 독립서점은 북토크와 인문학 프로그램, 독서모임을 진행하면서 지역 문화 생태계의 중요한 거점이 되고 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지역 서점은 주민 간의 소통을 높이고, 공동체의 위상을 높이는 데 작지만 단단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행객이 찾아갈 만큼 굉장히 매력적인 공간이 많은데 그만큼 지역의 문화자산이 늘어난다. 그런 공간을 넓히는 게 살기 좋은 지역사회를 만드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이정은 국장은 “지역에서 독서 문화 활동을 하면서 대형서점이나 공공도서관이 할 수 없는 틈새를 메우고 있다. 우리가 큐레이팅한, 개성 있는 책을 골목골목에서 국민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 바탕에 최소한의 가격을 보장받을 수 있는 도서정가제가 있다”고 말했다.

도서정가제는 영미권을 뺀 다수의 OECD 국가(15개국)에서 시행하고 있다. 영미권은 출판 시장이 여러 나라에 걸쳐 있어 정가제를 시행하기 어렵다. 일본과 독일, 프랑스 등은 자국의 언어와 문화를 보호·발전하는 제도로 여겨 한국보다 훨씬 강력한 도서정가제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도서 발행 후 18개월간 할인을 전면 배제하고, 유통경로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다. 출판사는 동네 서점이든 온라인서점이든 같은 가격으로 책을 공급해야 한다. 프랑스는 2014년부터 ‘반아마존법’을 시행해 온라인서점의 할인을 금지했다.

도서정가제로 책값이 비싸진다는 주장은 현실과 다르다. 출판 전문가들은 오히려 책값 거품만 만든다고 본다. 백원근 대표는 “15% 할인을 실제 적용해 판매하는 곳은 대형 인터넷서점이고, 출판사는 이들 인터넷서점이 15%를 꽉 채워 할인할 것을 고려해 정가를 책정한다. 소비자는 인터넷에서 싸게 산다는 만족감이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할인이 아니고, 그걸 해주지 못하는 지역 서점만 경쟁에서 뒤처지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했다. 백 대표는 “지역 서점의 할인 경쟁을 부추긴다는 건데 공급률 때문에 할인 여력도 없거니와 실행되면 결국 도서정가제를 와해하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무조정실 관계자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웹툰·웹소설의 도서정가제 적용에 대해선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고, 작은 서점의 할인율 유연화는 그에 상응하는 지원책을 함께 내놓는 형태로 이야기되고 있다”면서 “법 개정 사항인데 국회 상황을 봐야 해 상반기는 어려워도 연내 마무리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정부는 물류 지원도 고려하고 있는데 동네 서점에서는 매장 직접 구매가 많고, 택배 비율은 높지 않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지원책이라고 보긴 어렵다.

서점·출판업계는 정부가 “문제의 원인을 완전히 잘못 진단하고, 대안도 엉뚱한 데서 찾고 있다”고 본다. 동네 책방과 독서 증진 사업 예산을 대규모로 삭감해놓고, ‘영세서점’ 지원을 명분으로 도서정가제를 흔드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이다. 정부는 올해 국민독서문화증진 지원 예산 약 60억원, 문학나눔 도서보급 약 56억원, 지역 서점 활성화 지원 예산 약 11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지역 서점 활성화 사업 예산이 사라지면서 강사와 작가 등을 초빙해 지역주민과 함께 진행하는 ‘풀뿌리 문화 운동’은 큰 타격을 받게 됐다. 이정은 국장은 “전반적으로 독서 문화에 대한 공격, 독서 문화 자체를 줄이겠다는 의도로밖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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