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4일!] 이보다 더 치욕스러울 순 없다… 무릎 꿇은 인조

서이원 기자 2024. 2. 24.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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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삼전도의 굴욕
1637년 2월24일은 '삼전도의 굴욕'이 일어난 날이다. 사진은 삼전도비 동판. /사진=머니투데이(문화재청)
1637년 2월24일(인조 15년 음력 1월30일)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가 청나라와 치욕스러운 강화를 맺었다.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강화조약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항복이나 다름없었다.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다. 하지만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 수 없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했다. 그러나 곧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청 태종이 도착한 후엔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20만 청나라 군이 집결해 성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성내에는 군사 1만3000명이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기에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했다. 성내에서는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청과 싸우자'는 척화파(김상헌 등)와 '일단 싸움을 멈추고 청과 협상해 나라를 지키고 보자'는 주화파(최명길) 사이에 논쟁이 지속됐다.

항전 47일이 되는 날 왕족들이 대피한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청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청의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은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다… 인조의 항복


인조는 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과 석촌동 부근에 있던 하중도의 나루터인 삼전도로 나갔다. 세자와 신하 500여명을 이끌고 나가 청 태종 앞에서 '삼궤구고두례'(또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삼궤구고두례'란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이다. 무릎 1번 꿇을 때마다 머리를 3번씩 조아려서 총 9번을 하는 것이다.

청나라는 맹약에 따라 소현세자·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삼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삼학사를 잡아 2월15일 철군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청나라와 조공책봉관계를 맺어 심양으로 방물과 세폐를 조공하고 청 황제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이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당한 것으로 외교권을 제한당한 것이었다.

조공책봉관계가 성립되면서 조선은 청의 연호와 책력을 채택해야만 했다. 인조는 숭덕 연호 채택에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청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등 사대하기를 거부하는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그들의 상소문을 접수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우리 민족 치욕의 유적… 삼전도비가 세워지다


삼전도비 전경. /사진=문화재청
전쟁 후 청나라는 병자호란에서 선봉으로 활약한 마푸타를 통해 인조의 항복을 받은 자리에 자신들의 승리를 기록한 비석을 세우도록 요구했고 결국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석의 앞면에는 몽고문자와 만주문자, 뒷면에는 한문이 새겨졌으며 정식 명칭은 만주어로 '대청국의 성스러운 한의 공덕비', 한문으로 "대청황제공덕비"라고 적혔다.

그러나 인조부터가 자신의 굴욕이 쓰인 비석을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리에 세운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비석을 세우는 일을 보류했다가 '크게 손해보지 않고 생색은 많이 낼 수 있으니 해버리자'는 김류의 청원에 마지못해 사업이 재개되기도 했다. 이로써 그해 8월16일부터 청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은 단을 개조하는 공사가 시작됐는데 홍수가 나면 침수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삼전도의 굴욕 당시보다 오히려 더 높고 크게 만들어야 했다.

다음해 4월1일까지 비석에 비각을 씌우는 공사가 완료되면서 삼전도비를 세우는 모든 공사가 마침내 마무리됐다. 이로써 삼전도의 굴욕에서 장장 3년 2개월이 걸린 모든 공정이 끝났다. 청 태종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이제는 거대한 비석이 들어서서 조선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영원히 상기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후 삼전도비는 허술한 관리 속에 위치가 변경되기도 했다. 강물 바로 옆에 위치할 땐 여러 차례 침식되기도 했다. 2007년 철거를 주장하는 범인에 의해 스프레이로 훼손되는 사건도 겪었다. 결국 해당 사건 이후에야 송파구에서 원래 위치 고증에 나섰다.

여러 작업을 진행한 끝에 2010년 현 위치인 석촌호수공원 서호 언덕으로 이전했다. 치욕적인 역사의 상징이자 상당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 서울 삼전도비는 서울 한복판에 위치했지만 묘하게 오르막과 나무로 살짝 숨겨진 듯한 위치에 있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거의 볼 일이 없다.

서이원 기자 iwonseo96@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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