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람들 ‘소울 푸드’ 돼지국밥, 미쉐린도 주목했다

2024. 2. 2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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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쉐린 가이드 부산
지난 22일 ‘미쉐린 가이드 부산’이 처음 발표되면서 부산의 ‘소울 푸드’라 불리는 ‘돼지국밥’이 화제로 떠올랐다. 돼지국밥집 ‘안목’과 ‘합천국밥집’이 빕 구르망에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6·25전쟁 때부터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은 돼지국밥은 부산을 여행하는 MZ세대들에게도 ‘꼭 한 번 맛봐야 할 맛’으로 인기가 높다. 서울에서는 어떻게 해도 현지에서 먹는 특유의 맛이 안 난다는 부산 돼지국밥의 매력에 대해, 자타공인 돼지국밥 매니어인 황인 미술평론가가 글을 보내왔다.

부산의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갈리는 서면역에는 돼지국밥 골목이 있다. 1번 출구로 나와 서면시장 골목으로 들어서면 가게마다 걸린 큰 솥에서 돼지를 삶는 구수한 냄새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돼지국밥은 부산 사람들의 소울 푸드다. 부산 사나이들은 8500원짜리 돼지국밥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의 낮술로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세상사의 시름을 날려 보낸다. 여유가 있으면 수육을 따로 하나 추가한다. 실속을 챙기려면 1만1000원으로 수육과 국밥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수육백반을 시킨다. 취향에 따라 순대, 내장도 따로 시킬 수가 있다. 토렴이 잘된 돼지국밥 위에 조심스레 새우젓을 넣고 푸짐하게 부추김치를 올리면 소박한 축제가 시작된다. 한 숟가락의 따뜻한 국물이 식도를 따라 부드럽게 내려오는 순간 온 세상이 나와 우리 편이 된다.

장터 돼지국밥, 도회지로 나와 진화

미쉐린 가이드 부산 빕 구르망에 선정된 ‘합천국밥집’은 깔끔한 맛의 맑은 국물로 사랑받는다. 고추·새우젓·간장소스·섞박지·부추무침 등의 반찬이 한상 가득 나오는 점도 정겹다. 송봉근 기자
예전에 시골에서는 돼지국밥을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돼지국밥을 먹을 일은 겨울에 많았다. 가을걷이가 끝난 시골에는 이듬해 봄이 올 때까지 들판에 나갈 일이 없어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잔치를 위해 준비한 음식 보관에 추운 날씨가 유리했다. 문중의 묘사나 결혼식은 늦가을과 겨울에 집중되었다.

요즘처럼 결혼식 축의금은 없었다. 살림이 넉넉한 사람은 비싼 청포묵을, 아니면 형편에 맞추어 도토리묵이나 상대적으로 값이 헐했던 메밀묵을 한 판 보내면 부조는 한 셈이다. 전기가 안 들어오는 시골에서는 양초 한 봉지도 훌륭한 부조가 되었다. 마을 사람 전체가 온몸으로 잔치에 힘을 보태었다.

살림살이가 큰 집은 결혼식 무렵에 돼지고기 맛이 가장 좋다는 백근(60㎏) 정도로 자라게 미리 적당한 크기의 새끼돼지를 구해다가 키웠다. 결혼식을 하루 정도 앞두고 그동안 잔반이나 등겨로 키우던 집돼지를 잡는다. 시골에는 도축장이 없었다. 도축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던 시절이라 널찍한 마당에서 돼지를 잡았다. 마을마다 돼지를 잘 잡는 근육질의 사내가 한두 명쯤은 꼭 있기 마련. 한쪽에서 돼지를 잡는 동안 마당 한쪽에서는 반으로 자른 드럼통이나 큰 무쇠 솥을 걸어놓고 물을 부어 장작불을 지핀다.

우선 피를 받아서는 선지를 만든다. 필요한 살코기는 발라내고 털을 뽑기 위해 나머지 몸통을 잘 씻어 드럼통 속 뜨거운 물에 넣어 살짝 익힌다. 털이 뽑힌 돼지는 부위를 골라 수육용으로 한 번 더 삶는다. 이 과정에서 짙은 흙탕 빛의 국물이 우러나온다. 이게 집에서 해먹던 돼지국밥의 베이스 국물이다.

흙탕 빛 국물에 봄동 등 넣어 맛 더해

잔칫상의 손님들에게 내놓는 건 돼지 수육이다. 수육용이 아닌 살코기는 신문지에 싸서, 선지와 국물은 큰 주전자나 들통에 담아 결혼식 음식을 만드는데 일손을 보탠 마을 여자들에게 골고루 나눈다. 아이들은 저녁을 기다리고 있다. 집집마다 새롭게 돼지국밥 축제가 열린다. 집으로 가져온 흙탕 빛의 돼지 국물에 양을 불리기 위해 물을 좀 더 붓고 겨울철 노지에서 나는 봄동이나 다른 채소를 넣어 맛을 더한다. 여기에다 식은 밥을 넣어 토렴을 하면 돼지국밥이 완성된다.

고기가 귀할 때였다. 몇 점뿐인 살코기에는 구둣솔을 방불케 하는 뻣뻣한 돼지털이 그대로 박혀있어도 상관치 않았다. 내장도 함께 삶아진 국물이어서 돼지 특유의 냄새가 강했다. 아까 근육질의 사내에게 잡혀왔던 ‘그놈’의 존재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잡내가 많이 나는 돼지국밥이었다. 흐린 불빛을 타고 오르는 구수한 돼지국밥 냄새로 겨울밤은 따뜻해졌다.

장날이 되면 시골 농부들은 수확물을 들고 읍내로 나가 돈을 만들어 돼지국밥을 사서 먹었다. 읍내 장터에는 장날마다 들어서는 돼지국밥집이 있었다. 밥 대신 국수를 넣은 돼지국수도 있었다. 친구나 친척, 사돈을 만나면 인사를 나누고 막걸리를 시켰다. 장터의 돼지국밥은 결혼식 때 잡은 돼지로 집에서 만든 돼지국밥과는 맛이 좀 달랐다. ‘그놈’의 존재감이 희석된 정제된 맛이 났다. 요즘 우리가 먹는 돼지국밥도 그렇다. 도축장에서 잡은 돼지는 전지, 후지, 목살, 삼겹살 등의 부위로 세분화되어 정육점에서 팔린다. 정육점에서 부위별로 분리된 돼지고기로 만든 돼지국밥은 맛이 말쑥하다. 오늘날 돼지국밥 전문식당의 돼지국밥은 읍내 장터의 돼지국밥이 도회지로 나와서 진화한 맛이다.

서면 말고도 사상, 해운대 등 부산 어디서고 돼지국밥집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구에도 봉덕시장에 돼지국밥집이 몰려 있다. 경상도 사람들은 돼지국밥을 참 좋아한다. 서울에도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사는데 돼지국밥집을 찾기가 쉽지가 않다. 드물게 있긴 있는데 부산의 돼지국밥 맛과는 다르다. 더 말쑥한 맛이라고나 할까. 야생의 기운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사람들은 돼지국밥보다는 순대국밥에 더 익숙하다. 또 돼지국밥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돼지국밥의 매력은 특유의 거친 맛에 있는 게 아닐까 한다. 남쪽 바다의 관대함, 시원시원한 부산 사람들의 성격과 돼지국밥은 잘 맞아떨어진다. 구로시오 해류가 흐르는 오키나와, 제주도, 부산은 음식문화를 일정 부분 공유한다. 삶은 돼지, 고기국수가 그렇다. 제주도에는 돼지고기로 만든 고기국수 맛집이 많다. 예전에는 경상도에서도 돼지국수를 많이 팔았는데, 요즘은 찾기가 힘들다. 국수라는 게 예전에는 귀한 음식이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서민들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돼지국수보다는 돼지국밥이 더 오래된 음식이고 또 생명력도 길다.

돼지국밥을 좋아한 일본 예술가로 아즈마야 다카시(1968~2012)가 있었다. 2010년 부산비엔날레 감독이 되자 1년간 부산에 상주하면서 활동했다. 해운대에서 처음 돼지국밥을 배웠는데, 챠슈가 듬뿍 들어간 일본라멘을 연상시키는 맛이어서 금방 적응했다. 나중에는 서면 돼지국밥 골목으로 진출해 가게마다 약간씩 맛이 다른 돼지국밥들을 섭렵했다. 아즈마야는 따끈한 돼지국밥을 통해 부산의 작가들과 정신적 온기와 영감을 나누고 싶어했다. 면면히 흐르는 구로시오 해류처럼 부산과 아시아, 세계를 이어주는 돼지국밥 공동체를 꿈꾸어 본다.

황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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