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군 “악한 신하 타도가 목적” 왕을 적으로 보지 않았다
[근현대사 특강] 동학 농민군의 항일투쟁
1894년 7월 23일 야반 일본군의 궁궐 침범 소동 소리에 왕과 왕비는 거처인 건청궁에서 나와 근정전 쪽 함화당에 머물렀다. 일본군이 닥쳐 호위 병력의 무장을 해제하려 하자 임금은 앞으로 나서 내 병사에 손대지 말라고 호령했다. 너희 공사관에 우리 대신이 갔으니 물러나라고 호통쳤다. 나카스카 교수는 자신이 처음 발견한 ‘은폐된 원고’에서 이 부분을 읽고 ‘무능한 군주’ 고종이란 인식을 거두었다고 했다.
임진왜란 의병과 달리 양반 지휘 안 받아
이틀 뒤 7월 25일 청일전쟁 개전과 동시에 일본군은 부산, 인천, 원산, 진남포 등지에 상륙하여 전국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일본군 측 기록은 “일본군의 살기로 조선인들은 산과 섬으로 피난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라고 하고. 우리 측 기록도 “명문대가 가족들이 모두 피란하여 도성을 빠져나가 민심이 들끓었다”라고 하였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7월 사태’로 서울은 철시와 물품 품귀가 빚어지고 있다고 했다. 당시의 식자들은 임진왜란을 방불케 하는 이 상황을 ‘갑오 왜란’이라고 불렀다. 최근 ‘청일전쟁’ 대신 이 단어를 직접 서명으로 붙인 연구서도 나오고 있다.
11월 19일(음력 10월 22일) 전봉준의 전라도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격전 끝에 패한다. 이후 전봉준은 남쪽으로 이동해 일본군의 ‘모조리 섬멸 작전’(2024.1.13. ‘근현대사 특강’)에 밀려 내려온 충청도 농민군과 합세하여 싸우다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순창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그리고 해를 넘겨 1895년 1월 2일 서울 일본 공사관에 도착해 4차에 걸친 심문을 받는다. 이 심문에서 그는 왕궁 점령 사건이 2차 봉기의 원인임을 아래와 같이 거듭 밝혔다.
“8월 17일(양력) 궁궐 침범 소식과 관련해 무주 집강소 앞으로 통문을 보내 왜구가 국왕을 욕보였으니 우리는 마땅히 목숨을 걸고 의(義)로서 싸우기를 결심했다. 그러나 자칫 그 화가 종사(왕실)에 미칠지 몰라 물러나 시세를 관망하기로 한 뒤, 9월 말 ‘평양전투’ 후 지도부가 다시 의논을 내기 시작해 10월 하순 충청도 동학 농민군의 거사를 보고 11월 초 삼례역에 4000여 명이 모인 뒤 북상하여 제2차 봉기를 시작했다. 우금치 패퇴 후인 12월 8일(양력)에 정부군, 지방 감영 병사 및 이서(吏胥), 상인 등에게 보내는 ‘고시’에서 ‘개화 간당’이 일본 군부와 결탁한 것을 비난했다.”
우금치 전투에서 마주한 관군에 대한 비난이었다. 전봉준은 그 관군이 국왕이 아니라 김홍집의 ‘개화 간당’이 보낸 것으로 간주했다.
고종, 일본군 감시 뚫고 동학군에게 밀지
동학 농민군에게 국왕이 밀지를 보낸 것도 주목할 사실이다. ‘왕궁 점령’ 후 오시마 여단의 정예 이치노헤(一戶) 대대(일명 전선 옹호대)가 경복궁 앞 조선 전보총국 일원에 상주하였다. 이를 뚫고 왕의 밀지가 밖으로 나갔다. 이용호, 송정섭, 윤갑병, 이건영 등 밀사 이름이 조선, 일본 양측 기록에 남아 있다. 왕이 궁 안에 갇히다시피 한 상황 때문인지 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 봉기를 종용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고종실록』에 밀사를 문제시한 기록은 모두 총리대신 김홍집의 의정부가 낸 것으로 확인된다. 시기도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가 부임한 11월이다. 일본 공사관의 앞잡이 노릇을 한 총리대신 김홍집이 이노우에 공사의 항의성 단속을 대행한 것이 분명하다. 동학 농민군은 스스로 ‘보국안민’의 주체를 자부한 만큼 왕의 밀지가 없어도 적극적으로 나섰을 것이다. 위와 아래가 하나가 된 나라 지키기 항쟁이었다.
전봉준의 신병은 2월 27일 조선 정부 법무아문으로 넘겨진다. 그사이 2월 23일 고종은 국한문 혼용체의 ‘교육조령(詔令)’을 반포한다. 덕·체·지 3양(養)의 실용 신교육으로 “나라의 분개를 풀어줄, 나라의 모욕을 막을, 나라의 정치제도를 닦아나갈” 국민을 창출하겠다는 선언이었다. (2024.2.3. ‘근현대사 특강’) 동학 농민군의 피나는 항쟁에 대한 군주의 엄숙한 보답 표시였을까? 소학교,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기술학교 등의 설립 ‘조령’이 뒤를 이어 백성이 국민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시작된다. 그러나 고종 정부는 전봉준 등의 목숨을 보전해 주지 못했다. 전봉준 석방은 일본군에게 재차 군사행동의 빌미를 줄 위험성이 높았다. 8개월 뒤 왕실이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요구하자 왕비 시해의 보복을 받지 않는가? 4월 23일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 5명은 법무아문 임시 재판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집행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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