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24시간… 피부 감싸는 침묵의 가해자

김용출 2024. 2. 23.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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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항공사 유니폼 집단 피해 등
매일 입는 옷 ‘어두운 진실’ 고발
성분 표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각종 합성 화학물질 질병에 노출
인체 무해한 안전한 옷 고르려면
천연소재 확인하고 중고도 효과적

우리는 매일 죽음을 입는다/올든 위커/김은령 옮김/부키/2만원

승무원 메리는 비행기 통로에서 음료 서비스 카트를 멈추고 브레이크를 살짝 밟았다. 창가 좌석에 앉은 승객에게 미소를 지으며 마실 것을 묻기 전에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이 순간 갑자기 숨이 막혀 왔고, 계속해서 헛기침이 나와 감청색 웃옷의 팔꿈치에 얼굴을 파묻었다. 꾸준히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해 온 그녀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승객들에게 사과한 뒤, 물을 따라 마시고 나서야 다시 음료 서비스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메리는 3개월 전 동료 2800명과 함께 유니폼 제조업체인 트윈 힐로부터 새 유니폼을 든 상자를 받았다. 새 유니폼은 매끈한 폴리에스테르와 울 혼방 천을 사용해 유행하는 스타일로 만들어졌다. 화학물질로 난연처리를 해 불과 오염에도 강했다.
24시간 사람의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이 각종 화학물질로 인해 건강을 서서히 망가뜨리고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 책이 나왔다. 사진은 옷 판매 현장, 연합뉴스·세계일보 자료사진
얼마 뒤 새 유니폼 때문에 발진이 생겼다는 말이 승무원들 사이에 돌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호흡 곤란, 탈모, 피로 등을 실제로 호소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어떤 사람은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눈꺼풀이 부어올랐으며, 눈에 고름 딱지가 앉았다. 또 다른 이는 두드러기가 발생하고, 숨도 자주 가팔라진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2011년 봄, 메리를 비롯해 미국 알래스카항공 승무원 수백 명이 지급받은 새로운 유니폼을 입었다가 수많은 질병을 앓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의 하소연을 접한 미국 항공승무원협회의 산업위생사 주디스 앤더슨은 조심스럽게 사실을 확인해 나갔다. 아무래도 유니폼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알래스카항공 새 유니폼을 잘라낸 60개의 옷감 샘플을 워싱턴대 연구실로 보내서 조사를 의뢰했다.

워싱턴대 조사 결과, 새 유니폼에서 최소 97개의 화학 화합물이 확인됐다. 인체에 치명적인 납, 비소, 코발트, 톨루엔 외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사용이 제한된 분산 염료, 유럽연합(EU)에서 금지된 항진균제인 디메틸푸마레이트, 발암성 중금속 육가크로뮴 등을 함유하고 있던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독일 호헨슈타인 연구소의 분석에선 유니폼 섬유 염료에 분산 오렌지 37/76이 EU 한도인 1㎏당 50㎎을 10배 이상 초과한 것도 드러나기도 했다.
패션쇼.
알래스카항공 승무원 164명은 이듬해 새 유니폼에 포함된 특정 화학제품 탓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났다며 제조사 트윈 힐을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은 기각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알래스카항공 승무원뿐만이 아니었다. 2016년 가을에는 아메리칸항공 승무원들 역시 새 유니폼을 지급받은 뒤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피해자가 속출하는 등 최소 3곳 이상의 항공사 승무원 수천 명이 새 유니폼을 착용한 뒤 병을 앓기 시작했다.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수많은 승무원이 화학물질의 영향 아래 있던 유니폼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많은 이가 두드러기나 발진, 천식, 탈모 등을 겪었고, 어떤 승무원은 며칠 만에 호흡 곤란을 일으켜 응급실에 갔다. 또 어떤 승무원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직장을 잃고 마침내 인생이 무너졌다.

배냇저고리부터 수의까지.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수없이 많은 옷을 입는다. 우리가 평생 입는 옷들은 취급 허가증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소비재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다층적인 화학적 프로필을 갖고 있다. 옷 한 벌에 때로는 50가지 이상의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그중에는 호르몬을 교란하고 암과 불임을 유발하는 독성물질이 포함될 수 있다. 미세 플라스틱이 풀풀 날리는 바지, 중금속을 함유한 아기 신발, 발암성 아조염료가 든 포근한 스웨터, 프탈레이트로 범벅이 된 화려한 슬리퍼….
올든 위커/김은령 옮김/부키/2만원
지속 가능한 패션 전문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책 ‘우리는 매일 죽음을 입는다’에서 24시간 우리의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의 감춰진, 어두운 진실을 찾아 나선다. 책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서는 독 묻은 옷이 활활 타올라 영웅 헤라클레스를 삼켜 버리는 내용이 담겨 있고,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서는 독이 든 옷과 장신구는 신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위험이 됐다.

예를 들면, 프랑스 루이 14세는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저녁 식사 전 검시관에게 냅킨과 식탁보를 피부에 문지르고 입에 대 보게 했고, 영국 헨리 8세의 시종들은 독극물을 확인하기 위해서 매일 아침 침구 곳곳에 돌아다니며 입을 맞추곤 했다.

근대에 들어선 화학과 각종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옷에 사용되는 화학물질도 급격히 증가했다. 1937년 나치 독일에서 가죽을 대신할 식물성 소재로 폴리우레탄이 등장해 방호복 소재로 사용됐고, 1939년 듀폰은 스타킹에 쓰이는 나일론을 홍보했으며, 1941년에는 폴리에스테르가 등장했다. 아크릴, 스판덱스, 플라스틱….
미얀마 옷 공장 생산현장의 모습.
현재 우리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되지 않은 산업용 화학물질은 미국에서만 무려 4만에서 6만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옷에 들어가는지 성분 표시조차 되지 않고 있다. 소비자뿐만 아니라 옷을 만드는 제조업체나 판매하는 브랜드조차 제대로 모른다. 옷을 통해서 각종 합성 화학물질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환경은 불임, 자가면역질환, 화학물질 민감증을 비롯해 통증이나 알레르기, 내분비 교란, 발암 등을 일으킨다.

저자는 인도 티루푸르 공장을 방문해 옷감을 염색하고 마무리하는 과정을 조사하고, 미국 관세국경보호청 검사소에 가서 해외 배송 패션 제품의 유해 물질 검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 현장을 살펴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입으란 말인가. 저자는 독성 없는 옷을 고르고 관리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누구나 안전한 패션을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제안한다. 폴리염화비닐, 폴리에스테르, 폴리우레탄처럼 ‘폴리’로 시작하는 재료나 나일론, 아크릴 등을 피하라고. 실크, 캐시미어, 양모 등 천연 소재를 선택하라고. 안전한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업체를 인증하는 단체들이 공인한 제품인지를 확인하라고. 채도가 높거나 지나치게 밝은색 옷을 피하라고. 새 옷을 사면 입기 전에 무향 세제로 세탁하라고. 중고 옷을 입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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