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일연의 발자취 간직한 비슬산과 대견사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2024. 2. 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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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대구 대견사(大見寺)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100곳의 사찰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열다섯 번째 방문지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대견사입니다. 〈편집자 주〉
대견사의 상징, 삼층석탑. 비슬산 절벽의 가장자리에 우뚝 솟아있다.

1022m 고지의 벼랑 끝에 선 3층 석탑은 멀리 일본 대마도를 바라보며 100여 년을 외로이 서 있었다. 2014년 삼일절, ‘일제에 의해 단절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뜻깊은 일’이라며 비슬산 정상에서 개산식(開山式)이 열렸다. 이곳에 있던 대견사가 일본의 기운을 막는 혈(穴)자리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1917년 강제 폐사된 지 백여 년 만에 중창한 것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고려 충렬왕 때 승려인 보각국사 일연은 승과에 급제 후 초임 주지로 대견사(당시 보당암)에 부임하여 22년간 이곳을 지켰다. 71년 승려 생활 중 37년을 비슬산에서 지내면서 삼국유사의 자료 수집과 집필 구상을 했을 것이다.

일연은 원나라 간섭기를 살던 고려 백성들이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단군 개국 설화를 접하고 민족혼을 되살리길 희망했다. 또 왕과 귀족 세력들에겐 중국과 동등한 자주의식을 갖추는 길만이 고려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일연 스님의 흔적을 찾아 대구광역시 달성군 비슬산으로 떠났다.

산꼭대기의 절
대견사의 아담한 경내, 고지대의 좁은 땅에 세워진 절이다.

‘크게 보고, 크게 느끼고, 크게 깨우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대견사는 대구 달성군 비슬산 산정에 자리 잡은 조계종 동화사의 말사다.

신라 헌덕왕 때에 보당암(寶幢庵)으로 창건된 천년고찰이며 조선 세종 때 대견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북 봉정(암), 남 대견(사)’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전국에서 손꼽히는 기도사찰이었다. 이 절의 석조관음상이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면서 세간에 영험한 절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폐허와 중건을 반복하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 강제 폐사돼 한동안 삼층석탑 흔적만 덩그렇게 남아 한때는 ‘대견사지’라고 불렸다. 2011년 11월 대구 달성군과 동화사에 의해 전각 재건공사가 시작됐고 2014년 삼일절에 기공식과 개산식을 열었다.

대견사의 상징인 삼층석탑. 절벽의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벼랑 끝에 세워진 삼층석탑은 1988년 가장 먼저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 이후 시간을 두고 대견보궁, 명부전, 산신각, 요사채 등 주요 건물도 다시 지어졌다. 대견보궁에는 2013년 스리랑카에서 기증받은 진신사리(부처의 유골) 1과를 두어서 적멸보궁(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절)의 지위를 얻었다.

설악산 봉정암(1244m), 지리산 법계사(1400m)와 더불어 1000m 이상 고지대에 자리 잡은 대표적인 사찰인데 방문하기가 어렵지 않다. 비슬산자연휴양림 초입에서 30여 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셔틀버스(편도 5000원)를 타면 절까지 닿는다.

대견사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삼층석탑은 절벽의 널따란 바위를 바닥돌 삼아 벼랑 끝에 서 있다. 명부전에는 천도재(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해 불교에서 행하는 의식)를 지내고 있는지 염불 소리가 끊이지 않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산신각은 일광욕을 줄기는 듯 문을 활짝 열고 햇볕을 받고 있었다. 앞마당이 훤히 열려있어 산 정상의 찬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대견보궁은 겨울철이라 비닐로 꽁꽁 싸매고 문은 닫혀 있다. 내부에는 불상이 없고 대신 큰 창이 나 있다. 거기로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사리탑이 보인다.

대견보궁 전각. 그 뒤쪽으로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있다.
대견보궁 내부에서 바라본 사리탑

대견사는 비슬산 정상부의 좁은 부지에 들어섰기에 사찰의 배치가 단조롭고 건물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다. 다만 앞으로 펼쳐진 풍광은 일품이다. 대견봉과 조화봉을 뒷배로 앞마당이 훤하게 열려 있고 멀리 관기봉(992m) 등 산자락 능선과 현풍읍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명부전 뒤 큰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마애불은 밀교(密敎) 문양이 있어 밀교 전파와도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그만 암굴이 나 있는데, 이곳에서 먼 옛날 일연선사가 면벽수행(面壁修行)했을 것으로 생각됐다.

친절한 신도회 임원 덕분에 공양간에서 점심공양을 했고 사찰 재건에 힘을 쏟은 최윤규 신도회장과 중창된 이후 지금까지 절을 지키고 있는 법희주지스님과도 인사할 수 있었다. ‘추노’, ‘대왕의 꿈’, ‘장영실’, ‘옥중화’ 등 여러 사극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대견사와 비슬산 일대는 여러 사극의 배경이 되었다.
비슬산의 생생한 파노라마

절이 자리잡은 비슬산(琵瑟山)이란 이름에는 비파 비(琵)와 거문고 슬(瑟)을 합쳐 임금 왕(王)자가 4개나 있다. 기본적으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여럿인 해발 1084m의 큰 산이다. 대구 남서쪽 달성군 6개 읍면과 청도군에 걸쳐 있어 대구 북쪽의 팔공산(1093m)과 더불어 대구의 양대 산맥이다.

팔공산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옛날부터 신성한 산으로 간주돼 유가사, 소재사, 용연사, 용문사, 임휴사, 용천사, 도성암, 대견사를 비롯해, 인흥사지, 금수암지, 염불암지, 용화사지 등 사찰과 사적지들이 골짜기마다 산재해 있다. 그리고 아직도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 있을 무주암, 묘문암, 관기암, 백암사, 선사암, 속성사, 정수암 등 역사 속 사찰들과 일연스님을 비롯해 관기, 도성 등 아홉 성인의 행적이 남아 있는 산이기도 하다.

비슬산 정상부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 진달래 군락지가 형성돼 있다.

대견사에서 10여 분 정도 더 올라가면 비슬산 정상이다. 밋밋할 것 같은 늦겨울에도 화려하게 피어 있는 상고대, 쭉쭉 뻗은 푸른 소나무와 신우대, 수줍게 봉우리를 드러내려고 준비하고 있는 참꽃 등이 어우러져 청초한 풍경을 자아낸다. 대견봉(1035m), 천왕봉(1084m), 월광봉(1003m) 조화봉(1059m) 사이에 펼쳐진 30만 평의 거대한 평원에는 진달래(참꽃) 군락지가 있다. 한두 달 후면 상춘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다. 풍부한 물줄기를 뿜어내는 계곡과 폭포의 여름, 화려한 단풍을 간직한 비슬산 가을 풍경 또한 결코 다른 곳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한다. 정상의 바위 모양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양이라고 해서 비슬산이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수목이 덮여 있는 산 이라 해서 포산(包山), 대견봉의 큰 바위 형상이 거문고나 비둘기 같다고 해서 소슬산(所瑟山), 비들산으로 불렸다.

비슬산에서 만날 수 있는 각양각색의 암석들

비슬산자연휴양림에서 대견사 가는 길엔 바위만 한 크기의 둥글거나 각진 암석덩어리들이 집단적으로 쌓여 있거나 흘러내리는 너덜지대가 있다. 빙하기 암괴류(岩傀流, 일명 ‘돌강’) 유적이라 하는데 규모도 크고 최장(最長)이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대견사 부근, 대견봉과 천왕봉 가는 길에도 기묘한 모양의 바위들이 산재해 있다. 상감모자바위, 뽀뽀바위, 참선바위, 기바위, 부처바위, 작은거북바위, 신중바위 등이 있었고 백곰바위, 형제바위, 소원바위, 층층바위, 큰거북바위, 코끼리바위, 부부바위 등도 찾아볼 만하다.

비슬산의 역사 - 일연스님과 삼국유사

비슬산에는 일연스님과 얽힌 흔적과 이야기가 많다. 북쪽 군위군 삼국유사면 삼국유사로 인각사에는 일연스님의 사리탑과 깨진 부도비가 남아 있다. 일연이 말년(78세)에 어머니(96세)를 모시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이곳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완결하고 84세로 입적한 곳이다. 매년 칠월칠석이면 재를 올리고 있다.

고려의 고승이요, 문장가요, 애국자인 일연은 최충헌이 집권한 무신정권 시대인 1206년에 비슬산 바로 옆 경산에서 때어나 9세 때 광주광역시 무량사에 입산하여 승려의 길로 들어선다.

14세 때 설악산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8년여 영동의 여러 명찰을 찾아다니며 수행했다. 22세 때 승과에 장원급제해 ‘중의 벼슬’(법계)을 받아 비슬산의 보당암(현재 대견사) 주지로 부임했다. 승려 생활의 절반가량을 비슬산에서 보냈다.

삼국유사를 집필한 고려의 고승인 일연 기념비와 동상

이 시기는 몽골의 침략이 절정에 다다른 시절이었다. 최씨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다. 일연은 44세 때 남해 정림사, 길상암, 강화도 선월사, 포항 오어사 등에서 15년간 머물다 30년 전쟁이 끝나 환갑이 될 무렵 비슬산으로 다시 들어왔다. 59세 되던 해 비슬산 기슭의 인홍사(나중에 인흥사로 개칭)로 옮겨 13년을 머물면서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한 듯하다. 이후 청도 운문사와 경주, 개경 등을 거쳐 고향 경산에서 어머니 임종을 지켰다. 인각사에서 삼국유사 집필을 끝내고 84세에 입적했다.

일연은 56세에 ‘대선사’라는 중으로서 최고 지위에 올랐고 78세엔 국사(國師) 칭호까지 받았다. 처음 주지로 있었던 보당암은 대견사로 복원되었고 13년간 머물렀던 인흥사는 남평 문씨의 인흥서원으로 바뀌었다.

삼국유사는 유교적 합리주의와 중국 중심으로 기술했던 삼국사기가 놓쳤거나 드러내지 않은 것들을 적었다. 신라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한민족을 자주의식을 지닌 주체적인 역사로 재조명하고자 했다. 단군의 개국설화를 비롯해 가야와 삼국의 건국 설화, 민간의 삶 속에 전해지는 신화, 전설, 향가, 고승들과 신비한 불교 이야기는 불교적 세계관과 민족의 주체성을 고양하고 있어 민족사적으로나 불교사적으로 소중한 유산이다. 외세에 시달리는 격변기에 민족혼을 불어넣고자 방방곡곡 누비며 보고 들은 것을 투철한 주체의식에 입각해 기록한 답사문학의 걸작이기도 하다.

소재사와 비슬산 자연휴양림
비슬산의 또 다른 절인 소재사의 일주문

소재사(消災寺)도 들렀다. ‘일체의 재앙을 소멸한다’는 뜻이 절 이름에 담겼다. 아젤리아호텔 주차장에서 ‘일연선사길’ 포장도로를 따라 100m쯤 가다보면 비슬산 자연휴양림 표지석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난 좁은 옛길로 들어서 오르다 보면 소재교라는 작은 다리가 나타나고 소재사 일주문이 있다. 문을 지나면 나오는 널찍한 뜰을 지나면 멀리 대웅전이 보인다. 옆으로 삼신각과 명부전, 요사채가 있다. 천년고찰이지만 절 규모는 아담하다. 소재사에는 대웅전과 명부전 내의 ‘목조지장보살좌상’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지장(地藏)보살은 명부(冥府)를 관리하고 대지(大地)의 덕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윤회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해 준다고 한다.

소재사 경내

일주문과 나란히 계곡길을 따라 보각국사 일연기념비와 한 손엔 주장자(拄杖子)를 다른 손엔 삼국유사를 들고 있는 일연 동상이 있다. 과거 일연스님이 이 길을 따라 비슬산을 오르내린 인연 덕분에 동상을 세워둔 게 아닐까 싶었다. 휴양림 계곡엔 인공적으로 물을 뿌려 만든 얼음 동산이 이곳의 포토존 역할을 하고 있다. 의미 있는 볼거리가 많아서인지 겨울임에도 자연휴양림 내 숙박시설은 만석이고 아젤리아 유스호스텔도 남은 객실이 많지 않았다.

서점에 10여 종의 ‘삼국유사’가 출간돼 있다. 거기 담긴 글귀 하나가 다시 읽어야 할 이유를 말해주었다.

“삼국유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불교적 세계관과 자주의식으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일연의 의식세계를 들여다보는 과정이어야 한다.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기에 의무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신세계를 음미하는 유익한 독서가 될 것이다.”(임명현 편역 〈삼국유사〉에서)

글·사진 = ㈜헤럴드 정용식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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